41. ≪석보상절≫, 훈민정음 보급 첫 한글 불경책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1.22
유위자2026. 5. 20.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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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41. ≪석보상절≫, 훈민정음 보급 첫 한글 불경책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1.22
41. ≪석보상절≫, 훈민정음 보급 첫 한글 불경책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훈민정음 첫 보급서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11.22.
훈민정음 표기 불경책인 ≪석보상절≫은
세종이 기획하고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 이유가 신미 스님, 김수온 등의 도움을 받아 펴낸 24권의 책이다.
이 가운데 지금까지 여섯 권이 발견 되었는데.
일종의 편역서로 석가 일대기와 여러 불경이 언문으로 옮겨져 있다.
불심과 새 문자를 널리 알리기 위한 책이므로 한문 텍스트를 함께 수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석보상절≫ 자체에 간기(刊記)는 없으나
<월인석보> 권1에 있는 ‘석보상절서’의 수양대군이 쓴 서문 날짜인 ‘정통(正統) 12년 7월 25일에
수양대군이 서문을 쓰노라’에 따라 세종 29년(1447)을 간행 연대로 본다.
‘석보상절(釈譜詳節)’의 ‘석’은 석가, ‘보’는 평생의 처음과 끝의 모든 일을 다 쓴 책이라는 뜻이고,
‘상’은 중요한 말을 자세히 다 쓴다는 것이고 ‘절’은 중요하지 않은 말은 덜고 쓴다는 뜻이다.
석가 생애 전체를 중요한 것은 자세히 쓰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빼거나 줄여 쓴 책인 것이다.
이 책의 발간 동기는 석보상절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세종의 왕비인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년 9월 28일~1446년 3월 24일/음력) 죽음에 따른
개인적 불심 외에 어려운 불경을 쉬운 언문으로 옮겨 부처님의 뜻을 널리 펴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석보상절≫ 6권 첫 쪽.
여기서 우리는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훈민정음 첫 보급서로서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적용하였고
한자병기 협주 등의 배치가 그러한 텍스트로서의 짜임새를 보여준다.
새 문자를 적용하는 첫 책인 만큼 기존 한자를 배치하고 그 음을 달았다.
이 책은 전술한 발간 동기 외에도 텍스트적으로 여러 귀중한 특징들이 있다.
먼저 문학서로서의 양식을 최대한 배려하여 책의 대중성과 읽기 가독성을 높였다는 것이다.
훈민정음으로 불경 이야기를 풀어 적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풍부한 구어체, 토박이말 등이 반영되어
문학 텍스트로서 손색 없는 다채로운 글이 된 것이다.
활자 인쇄 측면에서도 대중성과 실용성이 고려되었다.
중성(中聲) ‘ㆍ’와 ‘ㆎ’의 표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음이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둥근 점을 벗어나 짧은 획으로 바뀐 것은 그만큼 문자와 보급의 대중성이 고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석보상절≫은 팔종성법을 가장 잘 지킨 초기 대표 문헌이다.
물론 받침에 ‘ㅿ’이 쓰인 것은 용비어천가와 같다.
그러니까 지금 맞춤법처럼 ‘높’이라고 안 쓰고 소리나는 대로 ‘놉’이라고 쓴 것이다.
이는 새 문자을 쉽게 배우게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사실 성리학의 나라, 유교가 국시인 나라에서 아무리 임금이 정음을 창제했다 하더라도
불경책을 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역설적이게도 소헌왕후의 죽음이었다.
소헌왕후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오기 6개월 전에 운명했다.
서거 후 세종은 추모 사업을 본격화 하였는데,
1446년 3월은 훈민정음 창제 후이고 해례본이 거의 완성된 시점이었으므로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 등의 한글 불경책 편찬과 간행을 이미 해례본 간행 전에 기획했을 것이다.
세종은 하루빨리 훈민정음을 보급하고 싶어했으므로
일반 백성들의 종교와 생활문화였던 불교에 의지해 보급하는 전략을 세웠음이 틀림없다.
훈민정음 언해본의 세종 서문이 108자로서 불교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그런 점을 잘 말해 준다.
소헌왕후와 한글 불경책 상상도. /이무성 화백
세종과 소헌왕후는 1444년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을, 1445년에는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을 잃었다.
소헌왕후는 이로 인한 충격이 컸을 것이다.
세종의 슬픔은 두 아들의 죽음에 왕비 죽음까지 더해진 것이니 그 슬픔은 더했을 것이다.
수양대군도 결국 두 아우의 죽음과 어머니까지 잃었으니 그 슬픔은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석보상절≫은 비록 불교 책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명복을 빌기 위한 의도이므로 양반 사대부들이 반발할 수 없었다.
세종은 줄글 형태의 석보상절로 훈민정음의 실용성과 우수성을 입증한 셈이다. 6권 첫 문장을 지금처럼 옮겨보면
“世尊(세존)이 象頭山(상두산)애 가셔서 竜(용)과 鬼神(귀신)을 위하여 説法(설법)하시었다.”와 같이 된다.
이보다 앞서 편찬한 용비어천가는 시가였으므로 “석보상절”은 최초의 산문집이다.
이렇게 우리말의 조사와 어미가 쓰인 산문 문학에 쓰임으로써 비로소 한자와 한문으로 도저히 담을 수 없던
우리말의 섬세함이 그 형체를 드러내고 우리말의 실체와 숨결이 고스란이 드러나
훈민정음 실용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세조는 세조 5년(1459년)에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 두 책을 합본한 ≪월인석보≫를 펴냈다.
이 책은 훈민정음 해례본 간행. 직후에 펴낸 것으로 보이는
훈민정음 언해본(2023년. 가온누리 출판사에서 최초 복간)과 더불어
한글이 널리 퍼져나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