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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45. 훈민정음 언해본 간행 시기와 유통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2.19
45. 훈민정음 언해본 간행 시기와 유통
언해본, 언제 누가 주도해 처음 나왔을까?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12.19
《훈민정음》 해례본의 앞부분인, 세종 서문과 예의만을 언해한 언해본이 단독으로 간행된 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해례본’에 준해 ‘언해본’이라 부르지만 15세기에 단행본으로 간행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1932년에 공개된 박승빈 소장본이 단행본처럼 되어 있지만
이는‘월인석보권두본’을 따로 제본한 것이니 실제 단행본은 아닌 셈이다.
단 해례본이 간행된 지 13년 만인 세조 5년(1459)에 《월인석보》 앞머리에 실렸음이
1972년 월인석보 1ㆍ2권이 발견되어 알게 되었다.
서강대가 소장한 것은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가 지금도 인사동에 있는 통문관(通文館)으로부터 구입했다고 한다.
언해본이 따로 존재했다고 보는 이유는 ≪월인석보≫ 1권 자체가 서로 다른 책 세 권의 합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훈민정음≫ 해례본 가운데 세종이 직접 저술한 부분으로
훈민정음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언해를 해례본 간행 13년 뒤에나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종 시대에 언해가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고 그 시기 추정이 매우 중요하게 되었다.
학자마다 시기 추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언해본 세종 때에 존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문화재청은 2007년에 국어사학회와 함께 세종 때의 재구정본안을 발표했고
2023년에 가온누리에서 필자 해제와 2023년에 작고한 정우영 교수 감수로 단행본 복간본을 펴냈다.
세종 때 언해본 복원은 복원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훈민정음 보급의 초기 역사를 복원한 더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
2023년에 최초로 복간된 세종 때 ≪훈민정음 언해본≫(가온누리)과 ≪훈민정음≫ 해례본을
세종한글국제홍보대사 후지모토 사오리(왼쪽, 언해본)와 크리스티안 부르고스(오른쪽, 해례본)가 각각 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언해본의 역사성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월인석보로 언해본이 수용된 그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1568년 사찰(희방사)에서 복각도 가능했던 것이고
이렇게 불경과의 결합이 안 되었다면 아마도 해례본 못지않은 희귀본이 되었을 확률이 높다.
희방사본은 선조 1년(1568)에 복각한 것으로
언해본이 1459년에 최초 간행된 이래 50년 만에 복각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언해본이 더욱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전국 주요 도서관에 희방사본 후쇄본이 많이 남아 있을 정도로 이 책판을 통해 수많은 언해본이 퍼져 나간 셈이다.
불경 보급뿐만 아니라 훈민정음 보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희방사 언해본 판목이 6.26 전쟁 중에 불탔다고 한다.
이런 유통 과정이 중요한 것은 해례본이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서조차
해례본을 보았다는 증거가 없을 정도로 일찍 희귀본이 되었으므로
언해본이 훈민정음 보급 발전에 절대적인 구실을 한 문헌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세조가 주도한 것 확실시
그렇다면 누가 언해를 주도했는가이다. 그것은 세조 곧 수양대군이 거의 확실하다.
1459년의 월인석보 발간 주체가 세조일 뿐 아니라 세조는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을 지었으므로
훈민정음 반포 이후 이를 적용한 최초의 개인 저술자다.
≪용비어천가≫는 여러 명의 공저인데다가 125수 시가에
국한문 혼용으로 훈민정음을 적용했을 뿐 책의 대부분인 주석은 한문이므로 사실 90% 이상이 한문으로 된 책이다.
본격적으로 훈민정음을 적용한 최초의 책은 “석보상절”이고
이를 단독 저술한 세조의 역할은 초기 훈민정음 보급사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
또한 세조는 임금이 된 뒤에도 불경언해를 국가 차원에서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추진하였을 뿐 아니라
훈민정음을 이용한 구결 작업에 직접 참여할 정도였다.
더욱이 왕자 시절부터 불교 신자와 다름없었다는 것이 불교계의 중론이다.
어제 서문을 108자로 하여 불교적 의도를 반영할 수 있는 실질적인 주체였던 셈이다.
물론 세조가 주도 했더라도 그와 가까웠던 신미 대사와 같은 불교계 인사가 도와주었을 것이지만
그런 도움이 아니더라도 세조는 그런 불교적 기획을 주도할 만한 충분한 위치에 있었다.
희방사본 언해본 첫 쪽(범우사 소장).
언해본의 실체가 공적 학술서로 처음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3년 권덕규의 《조선어문경위》(광문사)라는 책 부록으로 실리면서였다. 권덕규(1923)에서
언급한 원본의 실체는 4년 뒤에 발간되는 1927년 ≪한글≫ 동인지 창간호에서 박승빈 소장본임이 밝혀진다.
이 동인지의 동인은 1914년에 작고한 주시경의 뜻을 잇는
조선연구회 소속 “권덕규, 이병기, 최현배, 정열모, 신명균” 등 5인이다.
언해본이 ‘世宗御製訓民正音原本’이란 이름으로 영인 되어 있다.
이때만 해도 언해본을 세종실록 ≪훈민정음≫ 책 완성 사실을 최초로 알린
1446년 9월 29일 기사에 의한 훈민정음 원본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인 서문에 의하면 이 언해본은
박승빈 소장본, 광문회 소장본, 어윤적 소장본(일본궁내성소장본의 소장본) 가운데
정확히 어떤 본을 사진을 찍었는지가 나와 있지 않지만, 전후 맥락으로 보아 박승빈 본을 기준으로 삼은 듯하다.
다만 박승빈 본 맨 앞장이 후대에 고친 것이므로 이 부분만 광문회 본을 따랐다고 하였다.
문화재청에서 국어사학회와 함께 2007년에 펴낸 재구정본의 원조 격인 셈이다.
국어사학회/문화재청(2007)에서 재구정본을 내면서 1927년의 재구본에 대해 “약간의 잘못이 없지 않지만,
이른 시기에 언해본의 정본을 수립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라고 평가한 것은 매우 적절하였다.
이때는 해례본의 실체를 전혀 모르던 상황이어서
박승빈 본이 원본이라는 핵심 증거로 단본(단행본)임을 들고 있다. 동인지 영인본은 많은 인기를 끌어
수천 부를 발행했을 뿐만 아니라 아예 단행본처럼 다시 간행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러한 흐름에 문제를 느낀 박승빈은 한글 동인지 영인본이 나온 지 5년만인
1932년에 소장본을 그대로 영인하여 공개했다. 박승빈 본이 최초로 영인이 된데다
단행본 형식의 최초 영인인지라 박승빈은 무척 감격해 하고 그 느낌을 영인본 간행사에 그대로 담았다.
이 책 또한 많은 인기를 끌어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전형필 소장자에 의해 전문가들에게
비밀리에 공개되기 전까지 원본으로 여겨져 유통되었다.
●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