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訓民正音)/훈민정음탐구_김슬옹

38. ≪훈민정음≫ 표기 첫 문헌, '용비어천가'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0.31

유위자 2026. 5. 20. 07:05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 38. ≪훈민정음≫ 표기 첫 문헌, '용비어천가'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0.31 38. ≪훈민정음≫ 표기 첫 문헌, '용비어천가' 위대한 진실...용비어천가 간행은 세종대왕의 신의 한 수 /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10.31.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다니는 만 원 권 지폐에 훈민정음 적용 최초 표기 문헌인 '용비어천가' 2장 서사시(악장)가 세종대왕 어진 옆에 새겨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사진 참조) 배경 그림으로 있어 언뜻 보면 잘 안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말로 바꾸면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아니하므로 내가 되어 바다에 이르니.(현대말 번역)”라는 뜻이다. ‘용비어천가’라는 제목 뜻은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한 하늘 같은 임금의 노래”라는 뜻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온 1446년 이후 이를 적용한 최초 문헌(1447년)으로 평가받고 있다. 용비어천가는 지금 책의 단위로는 5권(5책)으로 서문과 발문 등을 포함하면 무려 1054쪽이나 된다. 실제 저술은 정인지, 권제, 안지,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선로(이현로), 성삼문, 이개, 신영손 등 11명이나 참여했다. 이 가운데 정인지, 최항, 박팽년, 강희안, 신숙주, 이선로, 성삼문, 이개 등 여덟은 해례본 저술에 참여한 이들이므로 이 책이 훈민정음 보급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은 이 책을 위해 오랜 공을 들였다. 훈민정음 창제(1443년) 직전인 1442년부터 준비했기 때문이다. 해례본 반포 1년 전인 1445년에 세종실록에 용비어천가 저술 기록이 나오다보니 이때 완성됐고 훈민정음 반포(1446) 전 한글 기록서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이는 용비어천가의 다채로운 구성과 단계별 저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비어천가의 제2장 ‘불휘기픈-’이 새겨 있는 만 원권 지폐와 실제 수록 책인 ≪용비어천가≫. 용비어천가는 “자료 수집→ [우리말 노래(입말)] 지음(1445) → [한시]로 번역 표기 → 간단한 주해 → 훈민정음 표기 체계 최종 완성(1446) → [언문시] 표기 → 최종 주해 → 재배치 간행:[언문시] 주해, [한시] 주해→출판”이라는 단계로 저술되었다. 그러니까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표기 체계가 완성되기 전에 훈민정음 표기 책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1445년은 우리말(입말)로 노래를 짓고 그것을 한시로 번역한 수준이었고 실제 표기는 해례본 나오고 나서 한 것이다. 실제 내용은 한글 표기 서사시 125수 외 풀이와 해설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다. 전체 한글 표기 최초 문헌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펴낸 한글 불경책인 ≪석보상절≫이다. ‘석보상절’은 일반 백성들을 목표로 펴낸 책이라면 ‘용비어천가’는 양반 지식인들 1차 독자로 펴낸 책이라 볼 수 있다. ‘용비어천가’가 한글로 표기한 시가가 분량은 적지만 노래집인 만큼 그것이 핵심 내용이다. 훈민정음 보급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의 발간은 신의 한 수인 셈이다. 왕조의 정당성에 대한 노래한 고귀한 시에 새 문자를 적용함으로써 한자, 한문을 통한 사대주의가 목숨 같은 신념이었던 양반 지식인들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막는 구실을 했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라는 말이 지금은 지도자에 대한 아부라는 비아냥의 말로 쓰이지만, 실제 세종이 신하들과 펴낸 ‘용비어천가’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내용으로 보더라도 125수 시가 단순히 왕조의 정당성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후대 왕들이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제대로 하라는 내용이다. 중국의 역사 사례에 비추어 왕조의 정당성을 합리화하는 사대주의 측면이 강하지만 그 이면에 새로운 문자, 그 문자를 통한 원대한 자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하늘(천)의 기운으로 수도(지, 한양)가 이루어진 것이니 임금(인)은 임금답게 하늘(천)을 받들고 백성을 다스리는데 근면해야 조화로운 세상(천지인, 나라)이 더욱 굳을 것이라고 노래한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주석과 풀이를 보면 조선 문명사와 역사서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추구하고 조화시키는 다중 전략가였다. 용비어천가는 노래이자 문학 시가이자 역사서이자 세종의 사상이 응축된 사상서이기 때문이다. ≪용비어천가≫ 간행 흐름도. 또한 첫 출판물을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550부나 신하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새 문자 보급에 필요한 실질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이 책은 사대부들이 새 문자를 배우는 학습서 역할도 했을 것이다. 125수 대부분 한자 병용체이지만 2장, 30장, 67장, 28장 네 수는 순우리말로 구성된 한글전용으로 되어 있다. 토박이말에 담긴 입말의 전통이 글말로 그대로 녹아 들었음을 의미한다. 이후에 나오는 한글전용 문체의 뿌리는 바로 이들 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용비어천가가 훈민정음(한글) 반포 1년 전인 1445년에 나왔다는 것과 왕조의 정당성 홍보만을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용비어천가'는 한자 교리주의에 빠져있는 양반들이 훈민정음을 거부하지 못하게 하면서 뿌리 깊은 왕조의 뿌리 깊은 사상과 역사를 담은 위대한 책이요 노래요 시였다. 1445년 4월에 완성된 한시와 간략한 주해를 다듬고 보충하고, 언문시와 언문시에 대한 주해를 지어 편찬을 이 날 완료하고 세종에게 바침. * 훈민정음 해설서 집필자와 용비어천가 2차 집필자가 신영손을 제외하고는 같은 것으로 보아 반포 후에 언문시와 주해 작업에 집중하여 매달린 듯함. 언문시가 매우 정교한 것은 훈민정음 해설가들이 참여해서 그런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