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단군(檀君)/『桓』선도사상

*‘단군신화는 과연 언제 만들어졌을까? / <방랑하는예맥인>

유위자 2025. 9. 4. 15:51
*‘단군신화는 과연 언제 만들어졌을까? / <방랑하는예맥인> 머리말 현재 한국사회에서 단군은 단순히 신화적인 인물을 넘어서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주는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고 사회적 인식상으로도 한민족의 기원으로 인식되고 있다. 허나 현존하는 사서상 단군신화에 대해 처음 쓰여진 책인 삼국유사는 고려 말인 13세기에나 쓰여졌기에 몽골의 침략에 의해 민족통합을 위해 만들어진 신화로 보고 단군신화를 한민족의 최초의 신화로 보기 어렵다는 회의론적인 시각 역시 많다. 때문에 본 글에선 단군신화에 대한 학계의 그간의 연구 성과를 통해 단군신화가 어느 시기에 성립되었는지를 여러 자료들과 사료 검증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2. 단군신화 성립 시기에 대한 문헌고증상 검토 먼저 단군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는 나오지 않으나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는 인물은 12세기에 쓰여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단군신화를 서술할 때 고기(古記)라는 책을 10여회 인용하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20여회나 인용하는데 사료상 두 인물 모두 평양과 관련된 공통점이 있고 두 책 다 고기라는 책을 인용한 만큼 삼국사기의 선인왕검은 삼국유사에서 나온 단군왕검과 동일인물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또 고기라는 책은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만큼 사료적 가치로도 어느 정도 검증되었다 볼 수 있고 최소 삼국사기가 쓰여진 12세기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문헌 고증을 통해 한일학계의 공통적 견해로 그 시기를 11세기까지로 소급할 수 있는 것1)으로 드러났다. 특히 일본 학자 다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는 고기(古記) 및 단군본기(檀君本記) 기록을 11세기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삼국유사와 제왕운기가 단군신화에 대해 각각 다른 버전이 존재하는 점을 보아 원본 설화 자체는 10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존재했을 것2)이라 주장했다. 즉, 결론적으로 말해 단군신화 원형은 최소 10~11세기 이전에 존재하였음이 분명하며 후대에 고기와 단군본기 등의 사서로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다만 일연이 기록한 단군신화에선 한가지 특이한 점이 보이는데 바로 위서(魏書)라는 책이다 제왕운기와 달리 삼국유사에서만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단군이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아사달로 도읍을 정하고 조선을 개창하니 그 시기가 중국 요(堯) 임금 시대와 동시라는 내용으로, 내용상에서 잡다한 신화적 요소를 배제한 채 짤막하게 서술됐다. 허나 위서(魏書)라는 책은 같은 제목의 책으로만 여러 권이 있고 현전하지 않은 책만 8권이 넘으므로 어느 위서를 뜻하는지 제대로 알기 어렵다. 현재 전해지는 진수의 삼국지 위서의 다른 판본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진수의 삼국지를 인용할 때 위지(魏志)라고 일일이 구분하였으므로 가능성은 극히 낮고 또 시기상 전국시대 위나라가 편찬한 위서라는 말이 있으나 부여, 고구려 신화가 다른 중국 사서에도 실린 것과 달리 후대인 사기, 한서, 삼국지 등의 사서에서도 이 위서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아 논리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그러한 이유로 학계에선 이 위서(魏書)가 위만조선의 자체 사서라 보는 시각이 대세인데 그 이유로는 1. 앞서 말한 것처럼 단군에 관한 내용이 중국 사서들에서 전혀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2.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위만(衛滿)의 성을 잠부론(潛夫論)과 동일하게 한서의 위(衛)자와 달리 위(魏)자로 명시해 모두 위만(魏滿)이라고 표기한 점 3. 위만조선 시기(기원전 2세기)를 기준으로 놓고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한 지 2천년 전이라는 기사를 적용하면 전 설상의 요(堯) 임금 시기(기원전 24세기)와 근접한 점 등을 들었으며 이를 통해 위만조선의 전승이 한반도 내에서 자체적으로 전승되어 고려까지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외에도 북위(北魏) 위서의 고본(古本)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3) 이와 같이 단군신화의 존재 자체는 10세기 이전 시기로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위서(魏書)를 통해 실제로 고조선에서 내려오던 전승일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다음에선 단군신화가 실제로 언제 생성되었는지 시기별 근거를 통해 가정해보았으며 각 근거들은 항상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부분적으로 교집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또한 현재의 평양이 고조선 수도인 왕검성 지역일 가능성 역시 있으나 일단 본 글에선 평양 지역 고조선 유적의 낙후성과 왕검성과 동일한 곳이어야 할 낙랑 치소(治所)인 낙랑토성에서 고조선 유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 최신 학계 연구 경향에 따라 왕검성 위치를 요동 및 압록강 일대 비정설4)로 놓고 서술하겠다. 3. 단군신화 성립 시기에 대한 각 시대별 가설 (1) 고려시대 중국과 일본 학자들 대다수가 주장하는 설이며 한국 학계에서도 일부는 이에 동의하지만 반론도 상당수 존재한다. 단군신화가 고려 시대에 쓰여졌다는 가장 큰 근거로는 단군이라는 용어 자체가 한국과 중국 사서 통틀어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야 등장하며 삼국유사가 인용한 고기와 단군본기 역시 고려시대에 쓰여진 것이 거의 명백하다는 점 및 단군신화 내에서 나오는 역사 내용이 실제 역사와 대부분 일치하지 않는 것 등이 문제점이라 볼 수 있다. 중국, 일본 학계에선 거란과 몽골의 침입 같은 국가적 재난을 맞아 민족적 통합을 위해 창작됐다 보는게 통설이며 이에 따라 신화 내용상의 역사적 가치는 사실상 없다고 보고 있다. 다만 단군신화의 형성이 최소 고려 초 시점이라는 점은 한일 양국 학계 대부분이 동의하는데 문헌 고증상으로 고기와 단군본기가 11세기 즈음에 형성됐다는 점과 고려사 기록에서 단군(壇君)으로 추정되는 평양신(平壤神)과 평양군(平壤君)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고 고려실록을 토대로 쓴 고려사의 지리지에서 단군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다수 나오는 점과 조선시대 영조대 승정원일기 기사5)에서 현전하지 않는 고려사의 다른 판본에선 단군편이 존재하였음이 추측되는 점 등이 그 근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2) 남북국시대 2-1 통일신라 고기를 직접 읽어본 조선 후기 18세기의 실학자 안정복은 저서인 동사강목에서 “‘고기’ 1책은 바로 신라의 이속(俚俗, 상스러운 것)을 전한 것으로 고려에서 이뤄진 것인데 대부분 신령하고 괴이한 말들이고 승가의 언어가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라는 말을 통해 고기가 신라 시대 기록이 기반임을 주장했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엔 대동강 이북으론 신라의 영역이 아니었으므로 고기 내용 중 단군신화에 대해서만큼은 적어도 통일신라 시기에 지어지진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고로 남북국 시대에 지어졌다면 해당 영역을 차지한 발해에서 구전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발해의 영역에 대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우선적으로 발해가 차지한 영역을 고증해보고자 한다. 2-2 발해 먼저 1차적 사료상 요사 지리지에서 발해 대인수(선왕)가 신라를 평정했다는 기사와 신라가 826년에 패강장성을 쌓았던 점, 신당서에서 신라와 발해가 국경이 접한다는 사료를 통해 발해와 신라의 국경이 적어도 발해 선왕 시기엔 맞닿았음을 알 수 있고 거기에 더해 발해고를 지은 유득공은 평양을 발해가 점유했다고 서술했다. 또한 고고학적으로 현전하는 발해 최남단 유물은 평양 고구려성 안학궁지(安鶴宮址)에서 출토된 와당 중에 발해시대 와당으로 추정되는 것6)이 나왔으며 신당서 발해전에 낙유(樂游)의 배가 발해의 특산물임을 밝혔는데 낙유는 발해의 지명으로서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보통 낙랑(樂浪)의 오기7)로 보고 있다. 따라서 평양 일대를 발해가 점유한 걸로 보는 게 타당한데 그 외에도 평안남도 영원군 용성리에서 발해 성터가 발굴 됐으며 평안북도 태천군 양화사(陽和寺)가 통일신라의 제48대 경문왕 당시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 점, 평안도 안주군 칠불산 칠불사와 황해도 구월산 연등사 등은 고구려 시기에 지어졌지만 발해 시대에도 폐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8)되므로 이에 따라 단군신화의 내용상 배경이 되는 지역 대부분이 발해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통해 평안도 및 평양을 점유하고 있던 발해 세력으로 추정되는 금용 등 한반도 내 발해 세력들을 흡수해 나갔는데 요사 지리지에서 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이 포로로 획득한 발해항호(渤海降戶)들을 통해서 이들이 고려 내에서 단군신화 내용상의 중심지이자 원래 살던 지역과 동일하거나 가까웠던 고려 북계와 서경(평양)지역에 안치됐음9)을 알 수 있다. 또 설화의 전승 특성상 보통 지역 설화의 경우 기왕이면 기존 전승이 계속 이어지는데 우위를 가지며 단군신화 내용상의 불교적 특성을 고려해 볼 때 고려사에서 나타난 발해 멸망 전후로 고려에 내투하는 발해 승려들이 평안도 등에서 왔다 가정하면 이들의 영향을 받아 전해지던 지역설화가 후삼국 통일 후에 그대로 고려로 이어져 내려왔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단군신화가 10세기 즈음에 형성됐다면 발해 멸망 후 발해인들이 대규모로 고려로 내투한 시기와도 근접하고 신화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도 원래 한반도 북부에서 발해인들이 거주하던 지역과도 상당 부분 겹쳐 단군신화가 발해에서 고려로 전파됐다고도 가정해볼 수 있다. 물론 고구려-발해간의 계승성상, 남북국 시대 이전에 고구려에 존재하던 전승이 그대로 내려왔을 점 역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3) 고구려 6세기에 쓰여진 역도원의 수경주(水經注)에서 고구려 사신의 언급에 따르면 이 시기에 이미 고구려는 낙랑군을 고조선의 땅이라 인지했으며 이는 평양이 곧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라는 인식으로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대 특성상 고조선의 수도가 정확히 어느 지역인지 시간이 지나 잊혀졌고 한 때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낙랑군(樂浪郡)에서 그곳의 조선현(朝鮮縣)이라는 지명에 따라 자연히 그곳이 왕검성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졌을 수 있으며 아니면 새로 도읍한 평양 지역을 신성시하기 위한 차원에서 전승을 의도적으로 바꾸거나 새로 창조하고 이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원래 요동에 있던 선인왕검의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으로 인식이 전환되어 후대에 오인 됐을 수도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묘청이 서경천도를 위해 서경 안에 팔성당을 설치했는데 이 중 구려(駒麗) 평양선인이라는 언급을 보면 묘청이 알던 평양 지역 설화는 고조선이 아닌 고구려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당서에 따르면 고구려가 영성신(靈星神)·일신(日神)·가한신(可汗神)·기자신(箕子神)을 토착신(土着神)으로 모신 것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기자신은 낙랑 지역에 전승되던 기자동래설이 평양 천도 후 고구려의 주신 격으로 격상한 것으로 보이며 그보다 주목할만한 신은 가한신(可汗神)이다. 가한(可汗)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중앙아·동북아 유목민이 믿던 텡그리(Tengri) 신앙과 관련이 있다 보고 또 이것이 단군신화와도 연관되는 것으로 간주10)하는데 만약 단군신화가 고구려 시기에 외부에서 들어왔다면 돌궐 제국 전성기에 튀르크족 텡그리 신앙이 고구려로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 시기에 선인왕검의 선인(仙人)이라는 단어는 도교가 전파됨에 따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선인(仙人)이라 쓰인 글자가 확인되지만 벽화 그림 내용상 중국의 도교적 신선관과 관련 있지 단군 신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각저총 널방의 왼쪽 벽화[사진=한성백제박물관 제공] 만주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각저총(角抵塚) 벽화. 두 장정이 씨름하는 왼쪽 구석에 작은 호랑이와 곰 한 마리가 앉아 있다. 고구려 시대에도 단군신화가 이어졌다고 주장하게 되는 유명한 벽화다. 그러나 곰과 호랑이는 만주 지역을 대표하는 토템이어서 이를 무조건 단군신화와 연관시키는 것은 지나치다. 이 벽화는 중국 측의 관리 소홀로 크게 훼손됐다(오른쪽 작은 사진). 김운회 교수 제공 ②단군신화와 한민족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4962787 한편, 중국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벽화들 중 각저총의 나무를 놓고 나란히 있는 곰과 호랑이 그림과 장천 1호분에서 나타난 수목숭배 사상은 단군신화에 관한 모티브11)라 봐도 좋을 것이다 (4) 고조선 4-1 고조선 내 전승 기원전 시기에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쓰여진 사기(史記)에서 왕험(王險)이라는 글자가 최초로 등장하는데 선석열 교수는 중국 차자표기법의 적용에 따라 왕험(王險)이 지명이고 왕검(王儉)은 인칭을 뜻한다고 검증했다.12) 또 앞서 밝혔던 대로 삼국유사가 인용한 위서(魏書)는 위만조선의 자체 사서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따르면 일연에 의해 삼국유사에 인용되기 전까지 한반도 국가들 내에서 전승되어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준왕이 위만의 반란으로 축출되어 남하한 지역은 현 전북 익산시 금마현이고 이는 마한(馬韓)의 건마국(乾馬國)임이 문헌상과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는데 준왕이 자처한 한(韓)왕에서 한(韓)은 유목민족에서 군주를 부르던 칸(Khan)과 동의어이며 건마국의 건도 중고한어 음운상으로 *gan이므로 한(韓)과 동일한 단어이므로 한마국(韓馬國)이고도 불릴 수 있으며 이는 마한(馬韓)과도 연결되는 어휘라 보인다. 단군이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 최남선은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하늘[天]을 의미하는 고어인 [Taigar]에 주목해 단군(壇君)은 단굴(Tan-kul) 혹은 당굴(Tan-gul)을 이두적으로 사음(寫音)한 것이며, 돌궐(突厥) 및 몽골어의 [Tengeri] 또는 [Tangri]와 어원(語原)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해 결과적으로 단군 개념이 흉노, 튀르크, 몽골 등이 믿던 천신(天神) 텡그리(Tengri)에서 왔다고 보았다. 당시 흉노는 자신들의 군주를 탱리고도선우(撑犂孤塗單于)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탱리는 텡그리와 동계어이며 직역하면 하늘의 아들 선우란 뜻이다. 단군신화도 신화 계통상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인 점에서 공통점이 보이며 준왕의 남하지인 마한(馬韓)에서 섬기던 천군(天君)의 뜻도 탱리와 의미상에서 동일하다. 또한 고조선의 8조법에선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은 노비로 삼고 노비가 되지 않으려면 1인당 50만을 내야 한다는 구절에서 절도 행위는 형벌 노비로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부분은 흉노의 법과 동일하며 당시 중국의 법에선 관물절도는 기시(棄市), 우마절도는 사형이나 육형(肉刑)에 처해진다는 점에서 고조선과는 달랐다. 앞서의 기록과 사기(史記)의 흉노열전에서 흉노가 동쪽으로 고조선과 접했다는 기록 및 한서(漢書)에서 고조선이 흉노의 왼팔이라는 기록을 볼 때 이미 고조선은 준왕 시기에 흉노의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종합해볼 때 흉노가 믿던 텡그리 신앙이 흉노의 전성기 때 묵돌이 동호를 멸망시킨 시점 이후로 고조선에도 들어와 고조선 내 주요 신앙으로 자리 잡았을 수 있다는 가정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4-2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시조인식의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 本有五族(본유오족) 有涓奴部 絶奴部 順奴部 灌奴部 桂婁部(유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本涓奴部爲王(본연노부위왕) 稍微弱(초미약) 今桂婁部代之(금계루부대지) 漢時賜鼓吹技人(한시사고취기인)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상종현토군수조복의책) 高句麗令主其名籍(고구려령주기명적) 後稍驕恣(후초교자) 不復詣郡(불부예군) 본래 (고구려는) 다섯 부족이 있는데,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가 있다. 본래 연노부에서 왕이 되나, 점점 (세력이) 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그것을 대신한다.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를 부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토부에 나아가 조복과 의책을 받아 갔는데, (현토군의) 고구려 수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주관하였다. 그 뒤에 점점 교만하고 방자하여, 다시는 (현토)군에 오지 않았다. 涓奴部本國主(연노부본국주) 今雖不爲王(금수불위왕) 適統大人(적통대인) 得稱古雛加(득칭고추가) 亦得立宗廟(역득립종묘) 祠靈星(사령성) 社稷(사직) 연노부는 본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한 종묘를 세우고, 신성스러운 별과,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위의 삼국지 위서 고구려전의 내용에 따르면 원래 고구려는 연노부(소노부)에서 왕을 배출했으나 今(지금)이라 부를 만큼 삼국지 위서가 쓰여진 지 얼마 안되는 이전 시점에 고구려 왕통이 기존의 연노부에서 부여계인 계루부에 의해 교체됐다고 한다. 또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현토군을 설치한 시점에서 사서상 이미 고구려가 현토군의 속현으로 등장하며 이 때문에 원 고구려 세력 중에서 왕을 배출했다는 연노부가 아무래도 고조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사서와 금석문의 내용을 보면 연노부를 시조로 보느냐 계루부를 시조로 보느냐에 따라서 고구려의 건국연대가 달라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삼국지 위서가 쓰여진 시점에서도 전왕족인 연노부의 종묘와 영성, 사직에 대한 독립적인 제사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독립성이 보장되었으며 그 말은 즉, 연노부는 부여계인 동명이나 주몽신이 아닌 다른 신을 종묘에서 모실 확률이 높으므로 이 시기에 고구려 내 이원적 종교관이 존재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구삼국사 동명왕편에서 비류국의 송양과 주몽이 대립하는데 송양은 선인지후(仙人之後)를 자처하고 주몽은 천제지손(天帝之孫)을 자처하는데 송양이 자처한 이 선인이라는 단어는 삼국사기에서도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는 언급으로 등장한 바 있다. 단군신화에서 단군이 최후에 아사달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 한자 仙의 뜻은 산에 들어가다라는 뜻이 있어 단군은 산신적 존재인 선인(仙人) 계통으로 이해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구삼국사에서 선인지후(仙人之後)라 한 송양이 단군과도 연결되며 단군신화가 쓰여진 당시대에도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비류국의 송양 세력을 단군을 섬기는 원 고조선 세력이라고 해석13)했다. ‘《삼국사기》 권17 동천왕 21년(247년)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왕검(仙人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위 구절에서 말하는 평양은 같은 삼국사기 기록 내의 김헌창의 난 당시, 김헌창 세력이 새로운 수도로 천도할 지역으로 언급한 “고구려의 옛 땅, 평양(平壤)”이 현 서울시 종로구 지역을 지칭하던 것처럼 당시엔 아직 낙랑군이 건재할 시기이기에 현재 평양 지역과는 완전히 다른 지역이며 어디까지나 임시로 수도를 옮긴 곳이므로 보통 국내성의 대피용 성인 환도성의 인근에 있던 나합성(喇哈城)으로 비정된다. 14) 즉, 선인왕검이 구전되던 평양이라는 지역은 국내성 도읍기인 초기 고구려 중심부와도 연관됐던 만큼 부여계인 계루부로 왕통이 교체되고 고구려 내에서 주몽신화가 정착되기 전에는 고조선의 선인왕검에 대한 전승이 주요 신화였을 가능성이 있다, 고조선사 전공자인 조법종 교수는 서광이 사기집해에서 왕험성(王險城, 왕검성)이 창려 험독(險瀆)에 있다라는 언급을 했고 사기색은에서 왕검성이 요동 험독현(險瀆縣)에 있었다는 점과 사기(史記) 건원이내후자연표(建元已來王子侯者年表), 한서(漢書) 경무소선원성공신표(景武昭宣元成功臣表) 등으로 낙랑, 진번, 임둔군은 왕검성 함락 전인 기원 전 108년에 설치됐지만 현토군은 기원 전 107년에 설치된 점을 지적하며 우거왕의 암살 이후로도 왕검성에서 계속 한나라에 저항해 농성이 일어났고 결국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암살되어서야 비로서 왕검성이 함락됐다고 보았다. 또한 한사군 중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현토군의 영역 내에 최후까지 저항한 왕검성이 당연히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고 고구려 역시 사료상으로 현토군이 설치된 시점에 이미 현토군에 종속된 정치 세력으로 존재했던 만큼 선인왕검 전승이 내려올 만큼 왕검성의 위치에서 그리 멀지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있던 원 고조선 세력 휘하 정치 세력이었을 것으로 간주했다. [만발발자 유적 발굴 전경] [통화 지역과 환인 지역 위치] [만발발자 유적의 위치] 고고학적으로도 통화 지역 만발발자 유적에서 고조선의 물질문화로 알려진 세형동검문화 요소와 방단석광적석묘와 같은 고구려 초기 물질문화 요소가 복합적으로 나타나 고조선-고구려간 물질문화에서 연속성이 나타나는데 그 위치가 고구려 시조인 주몽이 남하한 졸본천으로 내려가는 길목인 점을 고려해 학계에선 졸본천을 포함한 만발발자 유적 일대를 송양의 비류국(연노부)의 영역15)으로 보고 있다. 또 졸본 환인 지역의 망강루 고분군에서는 그곳에서 출토된 토기가 만발발자 유적 출토 토기와과 유사성이 발견됨은 물론이고 부여계 유물까지 다수 출토16)됐는데 이 같은 점 등은 고구려 지역에 부여계의 유입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이며 구삼국사 동명왕편과 삼국지 위서에서 나타난 부여계 유이민이 주축이 된 계루부의 왕위 찬탈 역시 역사적 사실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 세력에 의한 주요 정치세력의 교체는 왜 단군신화가 고구려 내에서 주몽 신화처럼 주요 신화에 이르지 못했는지에 대한 해답이라 볼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준왕은 그의 근신(近臣)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위략(魏略)에 따르면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韓氏)라는 성(姓)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외의 나라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위 사료 내용상에서 준왕의 축출 뒤로도 준왕의 아들과 친척들이 계속 고조선에 남아있었고 초 창기 고구려 세력인 송양 세력이 고고학적으로도 고조선과 연관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위만조선 멸망 후 송양의 비류국으로 불리는 원 고조선 세력에 의해 위만 이전 준왕 고조선이 섬기던 단군신화가 계속 전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여러 사서상과 고구려 묘지명 중 특히 "동명(東明)의 후예가 진실로 조선을 세웠도다.(東明之裔寔爲朝鮮)“ 연남산 묘지명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인들의 확고한 고조선 계승의식들을 고려해 볼 때 비록 주몽신화에 밀려 단군신화가 고구려의 주요 신화로는 이르지 못했지만 대신 잊혀지지 않고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내용이 변형되어 구전 됐다고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4. 마치며 본문의 여러 자료들 종합적으로 볼 때 일본과 중국 학계의 주장과 달리 단군신화 성립연대가 고려 시대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최대 고조선 시대까지도 올라 갈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또한 현재도 계속해서 고대사 연구가 진척됨에 따라 여러 연구 성과들이 나오므로 기존의 인식이 언제든 변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요약 1. 단군신화는 한일 학계의 공통적 인식상 10~11세기 이전에 형성되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2. 단군신화의 실제 성립 시기는 고려 시대 뿐 아니라 남북국 시대, 고구려, 고조선 등 여러 관점들이 존재한다. 3. 비록 정확한 시기를 확정 지을 순 없지만 적어도 단군신화가 고려 시대에 국한된 신화가 아닌 것만은 명백하다. 참고 논문 및 1) 이성시, 중국 문화권 내 주변 諸國의 세계관 -한반도의 제 왕조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2015, vol., no.36, pp. 207-223 (17 pages) 2) 田中俊明, 檀君神話の歷史性をめぐって-史料批判の再檢討 , 『韓國文化』 33, 1982 3) 단군, 신화에서 역사로, 동북아역사논총, 2022, vol., no.76, pp. 115-157 (43 pages) 4) 조법종,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2006 정인성, 고고학으로 본 위만조선 왕검성, 한국고고학보, 2018, vol., no.106, pp. 104-137 (34 pages) 김남중, 위만조선의 멸망 원인에 대한 새로운 접근-왕검성의 소멸과 조선현의 中心地化와 관련하여-, 고조선단군 학, 2021, vol.46, no.46, pp. 37-90 (54 pages) 5) 승정원일기 1280책 (탈초본 71책) 영조 44년(1768년) 5월 22일 http://sjw.history.go.kr/id/SJW-F44050220-01800 6) 송기호, 발해사학사 연구, 2020 7) (駒井和愛,<渤海の五京とその名産>,≪史觀≫81, 1945 ;≪中國都城·渤海硏究≫, 雄山閣, 1977, 207쪽). 8) 황인규, 북한지역 고구려와 발해의 불교 사찰, -고구려와 발해의 사찰 발굴 복원 一試攷-, 불교연구, 2019 9) 박순우, 고려 내투 발해인들의 처치 지역 검토 -고려시기 유적 출토 발해계 막새기와를 중심으로-, 백산학보, 2019, vol., no.114, pp. 97-120 (24 pages) 10) 한영우, 기자조선은 사실인가 허구인가, 진단학보, 2021, vol., no.136, pp. 1-40 (40 pages) 11) 김성환, 고조선 건국신화의 계승과 고조선 인식, 동북아역사논총, 2015, vol., no.47, pp. 11-56 (46 pages) 12) 선석열, 일인 관학자들의 단군신화의 불가조작설과 그 비판, 한일관계사연구, 2022, vol., no.76, 통권 76호 pp. 181-208 (28 pages) 13) 조법종, 한국 고대사회의 고조선단군인식 연구- 고조선고구려시기 단군인식의 계승성을 중심으로 -, 선사와 고 대, 2005 14) 조법종, 고조선 고구려사 연구, 2006 15) 동북아역사넷, 고구려문화유산자료, 중국 길림성 통화시(吉林省 通化市) 동창구(東昌區) 만발발자유적(萬發拔 子遺蹟)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ku.d_0001_0040_0010_0050 16) 양시은, 통화 만발발자 유적을 통해 본 고구려 토기의 기원과 형성, 동북아역사논총, 2021, vol., no.71, pp. 56-99 (44 pages) 강인욱, 강현숙, 이종수, 이후석, 김상민, 양시은, 박선미, 동북아역사재단, 2021, 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길림성 통화 만발발자 유적 단군신화에 대해 그간의 학계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참고했으며 출처도 가능한 한 표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