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1_3 :『桓』, 선도]* 난랑비 서문(鸞郞碑序) / 나무위키1. 개요
鸞郎碑 序文. 통일신라 시기 최치원이 작성한 난랑비의 서문. 난랑비서(鸞郞碑序)라고도 한다.
2. 내용
崔致遠鸞郞碑序曰(최치원난랑비서왈)
최치원이 난랑비 서문에서 말하기를
國有玄妙之道(국유현묘지도)
나라에 현묘[1]한 도가 있으니
曰風流(왈풍류)
풍류라 한다
設敎之源(설교지원)
그 가르침을 창설한 내력은
備詳仙史(비상선사)
선사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實乃包含三敎(실내포함삼교)
실로 곧 삼교[2]를 포함하여
接化羣生(접화군생)
뭇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다.
且如入則孝於家(차요입즉효어가)
집에 들어와서는 효를 행하고
出則忠於國(출즉충어국)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魯司寇之旨也(노사구지지야)
노나라 사구[3]의 뜻이요
處無爲之事(처무위지사)
무위로(자연 그대로) 일을 하면서도
行不言之敎(행불언지교)
말없이 가르침을 행하는 것이
周柱史之宗也(주주사지종야)
주나라 주사[4]의 근본이요
諸惡莫作(제악막작)
모든 악을 만들지 말고
諸善奉行(제선봉행)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竺乾太子之化也(축건태자지화야)
축건태자[5]의 가르침이다
3. 상세
현재 난랑비가 현존하지 않아 본문의 내용은 알 수 없고,
서문 내용만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년) 기사에 인용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478년 조선 성종 시기 서거정 등이 편찬한 동문선이라는 책에 수록된
곽동순이 지은 팔관회 선랑 하표라는 글에서
난랑이 원랑(原郞)과 함께 신라의 대표적인 화랑으로 언급되어 있어
난랑비가 신라의 화랑 난랑을 위해 세운 비석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난랑비의 본문은 화랑 난랑의 생애나 업적 등에 대한 기록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다만 서문의 내용이 한 인물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화랑도의 가르침에 가까운 내용이다보니
난랑이 인물이 아닌 신라의 화랑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주석 해설)
[1] 현묘(玄妙) : 이치의 경지가 깊고 미묘하다.
[2] 삼교(三敎) : 유교, 불교, 도교를 이르는 말.
[3] 사구(司寇) : 사구(司寇)또는 대사구(大司寇)는 노나라의 벼슬 이름 중 하나이며, 오늘날의 법무부 장관에 해당된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가 노나라에서 사구에 임명된 적이 있어 공자를 비유적으로 지칭한 것이다.
[4] 주사(柱史) : 주사 또는 수장실사(守藏室史)는 주나라 장서실의 관리인을 말하며 오늘날의 국립도서관장에 해당된다.
노자가 한때 주나라 주사로 일한 적이 있어 노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단어이기도 하다.
[5] 축건태자(竺乾太子) : 축건은 인도를 뜻하는 천축(天竺)을 말하며, 석가모니는 인도의 여러 왕국 중 하나인
카팔라 왕국의 태자로 태어났다. 즉 축건태자는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의 별칭이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년) / 화랑을 받들다
三十七年, 春, 始奉源花. 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校勘 034類聚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遂簡美女二人, 一曰南毛,
一曰俊貞, 聚徒三百餘人. 二女爭娟相妬, 俊貞引南毛於私第, 强勸酒至醉, 曳而投河水以殺之. 俊貞伏誅, 徒人失和罷散.
其後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故金大問 花郞世記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崔致遠 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羣校勘 035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 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笁校勘 036乾大校勘 037子之化也.”
唐 令狐澄 新羅國記曰, “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曰花郞, 國人皆尊事之也.”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註 001를 받들었다.
처음에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어 근심하다가,〔사람들로 하여금〕
무리를 지어 놀게 하고 그 행실을 관찰한 연후에 발탁해서 등용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을 뽑았는데, 한 사람은 남모(南毛)註 002이고,
또 한 사람은 준정(俊貞)註 003으로 무리 3백여 인을 모았다.
두 여자가 아름다움을 다투고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한 뒤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남모를〕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일이 발각되어〕 준정은 사형에 처해졌고,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註 004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선발하여 곱게 꾸미고 화랑(花郞)註 005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註 006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 들었다. 혹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즐겨서 산과 내를 찾아 노닐며 멀리까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의 그릇됨과 올바름을 알게 되어, 훌륭한 자를 발탁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이런 까닭에 김대문(金大問)註 007의 『화랑세기(花郞世記)』註 008에는
“현명한 보필자와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하였다.
최치원(崔致遠)註 009의 「난랑비(鸞郞碑)」註 010 서문(序文)에는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풍류(風流)라고 이른다.
교화를 행하는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註 011에 자세하게 갖추어 있는데,
실로 이에 삼교(三敎)註 012를 포함하여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註 013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註 014
노(魯)나라註 015 사구(司寇)註 016의 가르침이다.
무위(無爲)의 일에 처하고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註 017
주(周)나라註 018 주사(柱史)註 019의 본뜻이다.
갖가지 악(惡)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善)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註 020
축건태자(竺乾太子)註 021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당(唐)나라註 022 영호징(令狐澄)註 023의 『신라국기(新羅國記)』註 024에는註 025
“귀인(貴人) 자제(子弟) 가운데 아름다운 이를 선발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이름을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떠받들며 섬겼다.”라고 하였다.
註) 001
원화(源花):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원화(原花)라고 하였다.
원화는 북방 샤머니즘과 습합(拾合)하여 무녀적(巫女的) 성격을 지녔다고 보는 견해(三品彰英, 117~121쪽),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태후(只召太后)와 밀접한 관련을 지닌 여성이 원화에 임명되어
제사를 주관하는 일을 보좌하였다고 보는 견해(고현아; 조범환),
미륵의 현신으로서 원화를 임명하고, 6부의 남자 청소년들로 그 무리를 구성한 것으로 보는 견해(朴南守) 등이 제기되었다.
〈참고문헌〉
三品彰英, 1942,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
고현아, 2008, 「신라 원화제 시행의 배경과 성격」, 『역사와 현실』 67
朴南守, 2008, 「新羅 眞興王代 政治社會와 花郞徒 制定」, 『史學硏究』 92; 2013,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 재수록
조범환, 2012, 「신라 원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한국고대탐구』 11바로가기
註) 002
남모(南毛):
원화에 선발된 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남모랑(南毛娘)이라고 하였다.
註) 003
준정(俊貞):
원화에 선발된 2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는 교정랑(峧貞娘)이라고 전한다.
註) 004
두 여자가 … 무리들도 사이가 나빠져 흩어졌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교정(峧貞)이 남모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하여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이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후에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노래를 지어 동네 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는데,
남모의 무리들이 그 노래를 듣고 북천에서 남모의 시체를 찾아내고 교정랑을 죽였다.”고 하였다.
註) 005
화랑(花郞):
신라의 청소년 수련집단을 이끄는 중심인물을 말한다. 화랑이 이끈 무리들을 낭도(郎徒)라고 부르며,
화랑과 낭도를 합쳐서 흔히 화랑도(花郞徒)라고 이른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화랑을 국선(國仙)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화랑도는 삼한사회의 청년집회에서 시원하여 발전·법제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화랑도를 창설한 목적은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삼국유사』에 원화제도가 폐지된 뒤에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화랑도 창설을 명령하였다고 전한 사실을 통해 화랑도를 전사단(戰士團)으로 편성하여
군사력을 키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겠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15세의 진골 청년을 화랑으로 선발하였고,
본서 권제47 열전제7 김흠운조 말미에 실은 사론(史論)에서 김부식(金富軾)은
신라 삼대(三代: 상대·중대·하대)에 걸쳐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다고 언급하였다.
화랑도 조직은 화랑 1명, 그를 지도·고문(顧問)하는 승려 낭도 1명,
진골 이하 평민에 이르는 수백 명에서 천여 명에 이르는 낭도들로 구성되었다.
화랑도는 원칙적으로 3년을 수련기간으로 설정하였고, 연령은 대체로 15~18세까지로 추정된다.
수련 기간이 끝나면 정병(正兵)에 징발되어 복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련 기간 동안 화랑과 낭도들은 충(忠)과 효(孝) 등의 덕목을 연마하고,
산수(山水)를 유람하며 가락(歌樂)을 즐기고 집단의식과 인성(人性)을 배양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구성원 사이에는 사우(死友)를 약속할 정도로 서로 간에 인간적인 유대가 긴밀하였다.
화랑도 조직을 총괄하는 조정의 관리가 화주(花主)였는데,
여기에는 대아찬 이상의 고위관리가 임명되었고,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한편 화랑은 불교신앙과도 긴밀하게 연관성을 지녔는데, 통일 이전에 화랑을 하생(下生)한 미륵의 화신으로 간주하였다.
이와 같은 화랑도는 삼국통일 과정에서 전사집단으로, 그리고 관인선발의 장으로 널리 활용되었고,
아울러 사회학적인 면에서 그들의 활동은 계층사회에서 발생하는 신분계층 간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고 이해되고 있다
(李基東, 1984; 정구복 외, 127~128쪽).
삼국통일 이후에 장기간의 평화가 지속되면서 전사단적인 화랑도의 성격은 희석되고,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며 명산대천을 찾아 노닐며 낭도 상호 간의 친목과 우의를 다지는 전통이 강조되었는데,
이러면서 화랑도에서 신선사상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화랑도를 풍류도(風流徒) 또는 풍월도라고도 불렀을 뿐만 아니라
화랑을 국선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三品彰英; 李基東, 1997a; 1997b; 박남수)
〈참고문헌〉
三品彰英, 1942,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
李基東, 1984, 「新羅 花郞徒의 社會學的 考察」,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李基東, 1997a, 「新羅社會와 花郞徒: 身分制社會에서의 靑少年運動」,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
李基東, 1997b, 「花郞像의 변천에 관한 覺書: 花郞文化論에 부쳐서」, 『新羅社會史硏究』, 一潮閣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박남수, 2013, 『신라 화백제도와 화랑도』, 주류성바로가기
註) 006
다시 미모(美貌)의 남자를 …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받들었는데:
본 기록에서는 원화제와 더불어 화랑제도 역시 진흥왕 37년(576)에 시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상이한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제4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조에서는
진흥왕대에 원화제를 실시하였다가 폐지한 지 여러 해 뒤에 화랑을 받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일연(一然)은 『삼국사기』에서 576년에 화랑을 받들었다고 전하는 것은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라고 밝혔다.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권6 진흥왕 원년(540) 12월조에서
용의(容儀)가 단정한 동남(童男)을 풍월주(風月主)로 삼고 무리를 모아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닦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진흥왕 원년에 화랑제를 실시하였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찾을 수 없다.
본서 권제44 열전제4 사다함조에 사다함이 화랑에 선임되었고, 그의 무리가 1천 명에 다다랐으며,
그가 진흥왕 23년(562) 대가야 정벌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화랑제는 진흥왕 23년 이전에 처음으로 시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三品彰英, 199~201쪽).
본서의 찬자는 원화제를 실시한 시기뿐만 아니라
그것을 폐지한 시기 및 화랑도를 창설한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던 듯하다.
다만 그 시기가 분명히 진흥왕 때였다는 사실만을 인지하고,
원화와 화랑에 관한 전말을 진흥왕 말년, 즉 진흥왕 37년조에 일괄 정리하여 서술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강래, 129쪽; 전덕재, 134~140쪽).
〈참고문헌〉
三品彰英, 1942, 『新羅花郞の硏究』, 平凡社
이강래 옮김, 1998, 『삼국사기 Ⅰ』, 한길사
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註) 007
김대문(金大問):
김대문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남해차차웅 즉위년조 참조.
註) 008
『화랑세기(花郞世記)』:
신라의 진골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漢山州: 경기도 하남시·광주시) 도독을 역임한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화랑들의 전기(傳記)이다.
현재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본서의 열전에서 화랑으로 알려진 인물들에 관한 기록의 기본원전은 『화랑세기』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한편 1989년에 경남 김해시에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필사하였다는 『화랑세기(花郞世紀)』가 발견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를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나(李載浩; 李鍾旭, 1995; 1997),
일반적으로 이것은 위작(僞作)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盧泰敦; 권덕영; 金基興; 박남수).
〈참고문헌〉
李載浩, 1989, 「 『花郎世記』의 史料的 價置; 최근 발견된 筆寫本에 대한 檢討」, 『정신문화연구』 36
盧泰敦, 1995, 「筆寫本 花郞世紀의 史料的 價値」, 『歷史學報』 147
李鍾旭, 1995, 「 『花郎世記』 硏究 序說」, 『歷史學報』 146
李鍾旭, 1997, 「 『花郎世記』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 『韓國史硏究』 97
권덕영, 2000, 「筆寫本 『花郎世記』 진위 논쟁 10년」, 『韓國學報』 99
金基興, 2003, 「 『花郎世記』 두 사본의 성격」, 『歷史學報』 178
박남수, 2007, 「신발견 朴昌和의 『花郞世紀』殘本과 '鄕歌' 一首」, 『東國史學』 43바로가기
註) 009
최치원(崔致遠):
최치원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4 신라본기제4 지증마립간 즉위년(500)조 참조.
註) 010
「난랑비(鸞郞碑)」:
난랑이란 화랑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으로 추정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
난랑은 다른 기록에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계와 행적에 대해 더 이상 알 수 없다.
난랑을 진흥왕대 최초의 화랑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63쪽), 경문왕대에 활동한 화랑으로 보는 견해(張日圭),
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화랑이라고 보는 견해(정구복, 129쪽) 등이 있다.
〈참고문헌〉
李丙燾, 1977, 『國譯 三國史記』, 乙酉文化社
張日圭, 2005, 「최치원의 삼교융합사상과 그 의미」, 『新羅史學報』 4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註) 011
선사(仙史):
선(仙)은 국선(國仙), 곧 화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므로,
선사는 화랑의 역사서로서, 김대문의 『화랑세기』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29쪽).
註) 012
삼교(三敎):
유교, 불교, 도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註) 013
중생(衆生)들을 접하여 교화하는 것이다:
사회와 동떨어진 공허한 가르침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교화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129쪽).
註) 014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원문은 “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이다.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의 “入則孝, 出卽悌”에서 응용하여 인용한 말로 보인다.
註) 015
노(魯)나라:
중국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남쪽에 있었고, 노나라의 지배자들은 그들의 조상을 주(周)나라(B.C. 1111~B.C. 255)까지 올려 잡았다.
공자(孔子)가 출생한 나라이며, 『춘추(春秋)』는 B.C. 722~B.C. 481년에 걸쳐 노나라 궁중에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을 편년체로 기록한 책이다. B.C. 249년 초(楚)에게 멸망하였다.
註) 016
사구(司寇):
사구는 중국의 고대 왕조인 하(夏)·은(殷)·주(周) 3대에 형옥(刑獄)을 맡은 6경(卿)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孔子)는 50세 때인 노(魯)나라 정공(定公) 9년에 대사구(大司寇)에 임명된 적이 있으므로,
공자를 지칭하여 사구라 하였던 것이다.
註) 017
무위(無爲)의 일에 … 행하는 것은: 원문은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이다.
『도덕경(道德經)』 제2장의
“天下皆知美之爲美 斯惡已 皆知善之爲善 斯不善已 故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 恒也.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萬物作焉而弗始 生而弗有 爲而弗志 功成而不居 夫唯弗居 是以弗去”라는 대목에서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무위(無爲)’는 인위적이 아닌 자연스럽게 또한 망령되이 하지 않는 것을 뜻하고,
‘불언(不言)’은 명령이나 지시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여지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註) 018
주(周)나라:
고대 중국의 왕조로, 하(夏)나라와 상(商 또는 은(殷))나라 다음으로 등장한 왕조이다.
하·상·주 세 나라를 통틀어 3대(三代)라고 부른다.
견융(犬戎) 때문에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왕권은 쇠하였고,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갔다.
註) 019
주사(柱史):
주사는 주하사(柱下史)의 약칭으로, 중국 주(周)나라 장서실(藏書室)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이다.
진(秦)나라 때에 시어사(侍御史)로 바뀌었다.
노자(老子)가 한때 주나라의 장서실 일을 맡아보았으므로 노자를 일컬어 주사라 하였다.
註) 020
갖가지 악(惡)을 행하지 말고 갖가지 선(善)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는 것은:
원문은 “諸惡莫作 諸善奉行”이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의 줄임말로,
이 4구게(句偈)는 대·소승(大·小乘)을 막론하고 중시하는 게송(偈頌)이다.
『열반경(涅槃經)』과 『법화현의(法華玄義)』 등에서 이 구절의 중요성을 언급하였다.
註) 021
축건태자(竺乾太子):
축건은 천측(天竺), 곧 인도의 별칭이다.
석가모니가 인도 카필라(Kapila) 국왕의 태자였으므로, 그를 일컬어 축건태자라 하였다.
註) 022
당(唐)나라: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존속한 나라이다.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룬 왕조로서,
당의 선진문물과 율령(律令)을 비롯한 다양한 제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註) 023
영호징(令狐澄):
당나라 의주(宜州) 화원(華原) 사람이며, 아버지는 영호도(令狐綯)이다.
진사(進士)로 등제(登第)하여 건부(乾符) 연간(874〜879)에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하였고,
저서로 『정릉유사(貞陵遺事)』가 있다. 『정릉유사』에서 정릉은 당 선종(宣宗)의 능묘명(陵墓名)이다.
선종대의 연호는 대중(大中: 847~860)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릉유사』를 『대중유사(大中遺事)』라고 부르기도 한다.
註) 024
『신라국기(新羅國記)』:
혜공왕 4년(768)에 당나라 책봉사(冊封使) 귀숭경(歸崇敬)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신라에 왔던 고음(顧愔)이 신라를 견문(見聞)하고 지은 책이다. 『신라기(新羅記)』라고도 한다.
『신당서(新唐書)』 권58 예문지(藝文志)제2에 고음이 지은 『신라국기』 1권이 있다고 기술되어 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註) 025
당(唐)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국기(新羅國記)』에는:
원(元)나라 도종의(陶宗儀)가 찬한 『설부(説郛)』 권49에 『대중유사』 일문(逸文)이 전하는데,
여기에 고음의 『신라국기』에서 인용한 문장이 보인다.
그것은 “신라국기에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제2골이라 한다[其國王族 謂之第一骨 餘貴族 謂之第二骨].
귀족의 자제 중 아름다운 이를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서 이름을 화랑이라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들어 섬겼다[擇貴人子弟之美者 傅粉粧飾之 名花郎 國人皆爭事之]”이다.
이에 따르면, 영호징은 고음의 『신라국기』에서 이들 기록을 인용하여 『정릉유사』에 실은 것으로 볼 수 있고,
본서의 찬자는 『신라국기』가 아니라 영호징의 『정릉유사』에 인용된 『신라국기』의 기록을 신라본기에 옮겨 서술하면서
『신라국기』가 영호징이 지은 것으로 오해한 것으로 이해된다(岡田英弘; 전덕재, 2015; 2018, 131~133쪽).
〈참고문헌〉
岡田英弘, 1951, 「新羅國記と大中遺事について」, 『朝鮮學報』 2
전덕재, 2015, 「 『三國史記』 신라본기 중고기 기록의 原典과 完城」, 『歷史學報』 226
전덕재, 2018, 『三國史記 본기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 동국(東國) 고대古代) 선교고(仙敎考) / 단재 신채호
(수필)〈大韓每日申報[대한매일신보] 1910. 3. 11〉
우리나라 역사를 읽어보면 선교(仙敎)는 우리나라 고대에 성행한 교(敎)이다.
당시 서적이 흩어져 없어져 그 원류(源流)를 상고키 어려운 까닭에
어떤 자는 이것을 중국 도교(道敎)가 동쪽으로 들어온 것으로 인정할 뿐이나
좌우로 참조하건대 이 교가 우리나라에 고유한 것이요, 중국에서 오지 아니한 증거가 참으로 많다.
천선(天仙)ㆍ국선(國仙)ㆍ대선(大仙)의 명칭이
삼국 이전 및 삼국 초기에 여러 번 나오는데,
도교(道敎)의 경전(經傳)은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에 처음 들어온 것이 그 첫째 증거이다.
도교의 동쪽으로 들어옴이 불교(佛敎)가 들어온 뒤에 있었는데
선교(仙敎)는 불교 수입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그 둘째 증거이다.
도교는 노자(老子)에 비롯하였는데,
『기년아람(紀年兒覽)』에 단군(檀君)을 천선(天仙)이라 불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단군을 선인(仙人)이라 불렀은즉 단군과 노자의 선후를 계산해 보라.
단군은 천수 백년 이전 사람이요 노자는 천수백년 이후 사람이니,
천수백년 이전 사람이 어찌 천수백년 이후 사람이 창설한 교를 수입하리요.
그러니 이는 말이 되지 않는다는 세번째 증거이다.
선교가 만일 삼국시대의 인군(人君)이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것이라면
동명성왕(東明聖王)과 대무신왕(大武神王)도 저 한(漢)나라 무제(武帝)ㆍ선제(宣帝)같이
방사(方士)를 바다로 보내 불사약(不死藥)을 구하였을 것이며,
명림답부(明臨答夫)와 김유신(金庾信)도 저 장량(張良)ㆍ이필(李泌)같이
곡식을 먹지 않고 도인법(導引法)을 배웠을 것이거늘 이것이 없는 것이 넷째 증거이다.
도교는 비록 천사진인(天師眞人)의 봉작이 있으나
이것이 당ㆍ송(唐宋) 이후에 시작되었을뿐더러
또한 하늘ㆍ땅ㆍ별에 제사지낼 뿐이요 정치상 하등 실권이 없는 것이요,
고구려ㆍ백제의 조의(皂衣)ㆍ대선(大仙) 등은 그 권력이 당시 왕자(王者)와 서로 버텨
서양 고대의 예수교 승정(僧正)과 같은 것이 다섯째 증거이다.
중국 도교는 세상을 피하는 교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도이다.
그러므로 제왕이 된 자가 이 교를 믿으면
임금의 자리를 뱀 허물같이 보고 대낮에 하늘에 오늘 것을 바라며,
사민(士民)으로 이 교를 믿으면
산속에 들어가 금단(金丹)을 만들되 우리나라의 선교(仙敎)는 그렇지 아니하다.
명림답부는 대선(大仙) 이로되
폭군(次大王[차대왕] ─ 原註[원주])을 폐하고
외구(外寇:公孫度[공손도] ─ 原註[원주])를 물리쳤으며,
바보 온달(溫達)은 대형(大兄:곧 仙人[선인] ─ 原註[원주])이로되
선비(鮮卑)를 물리쳐 영토를 개척하였으며, 또 신라와 격렬히 싸우다가 죽었으며,
김유신은 국선(國仙)이로되 중악(中嶽)에 들어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고구려ㆍ백제를 멸망시켰으며,
김흠순(金欽純)ㆍ김인문(金仁問)은 선도(仙徒)로되 모두 전쟁에 종사하던 이름난 장군이요,
관창(官昌)ㆍ김영윤(金令胤)ㆍ김흠운(金歆運)도 또한 선도로되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 여섯째 증거이다.
그런즉 그 선교라 일컬음은 단지 당시 한문학자(漢文學者)가 이와 같이 번역한 것이요,
기실은 장생불사(長生不死)의 미신을 가진 중국 선교 즉 도교와는
소리와 영위하는 취미 및 그 역사가 전혀 같지 않은 것이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라에서 세운 깊고 묘한 도는 선교이다.
(國立玄妙之道[국립현묘지도] 仙敎是已[선교시이])”라고 하고
또 “설교(說敎)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갖추어졌다.
(說敎之源[설교지원] 備詳仙史[비상선사])” 라고 하였다.
슬프다,
선사가 오늘날에 전해진 것이 있으면
민족 진화(進化)의 원리를 고찰 구명하는 큰 재료가 될뿐더러,
또한 동양 고대 여러 나라에는 보통 역사만 있고 종교ㆍ철학 등 전문 분야 역사는 없는데,
홀로 이 선사는 우리나라에서만 특별히 산출된 종교인 까닭에 역사상 일대 광채를 더할 것이다.
아아, 그 책이 오늘날에 전하지 못함이 아깝다. (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