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16 : 월인천강지곡 전문해설]*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 아미산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이 소헌왕후(昭憲王后)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직접 한글로 지은 찬불가 모음집으로,‘월인천강(月印千江)’은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에 비친다.’는 뜻으로, 부처의 공덕을 칭송하는 의미이다.
그리고‘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제목은 부처님이 백억 세계에 화신해 교화하심이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아서, 부처님의 자비가 달빛처럼 모든 중생에게 비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월인천강지곡>은 세종대왕이 한글로 지은 최초의 불교 서사시로서,
불교 경전 중 하나로 수양대군이 편찬한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읽고 한글로 찬탄한 책이다.
<월인천강지곡>은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한글 활자본으로, 원문은 1447년에 인쇄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석보상절(釋譜詳節)>과 함께 합편돼, 세조 등극 후 <월인석보(月印釋譜)>로 간행됐다.
<월인석보>에 전하는 <석보상절서>에 의하면, 수양대군이 <석보상절>을 지어 올리자, 이를 본 세종이
<석보상절>의 내용에 맞추어 부처의 공덕을 칭송해 읊은 서사시이다.
원간본과 대조해보면, 이때 <석보상절>보다는 심하지 않으나, 한
자(漢字)와 독음의 위치 변경, 한자음 종성(終聲)에서의‘ㅇ’ 사용, 협주(夾註-본문의 주석)의 추가,
가사(歌詞)의 수정 등 부분적인 변개와 변동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이 단독으로 중간된 일은 없었다. 이 책의 간행 시기는
<석보상절>이 이루어진 1447년(세종 29)에서 그 다음해인 1448년 사이에 완성해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상(卷上)에 실린 노래가 모두 194곡이므로 전체로는 모두 580여 곡의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월인석보>에 실린 노래까지 합하면 모두 약 440곡이 알려져 있다.
1961년 통문관(通文館)에서 실물 크기대로
영인해서 간행했고, 그 밖에 1962년 <국어학> 1호 등에도 영인본으로 수록됐다.
1985년 대제각에서‘국어국문학 총림 11’로 <월인석보>와 함께 영인했으며,
2002년에는 대산문화재단의 해외 한국학 연구지원을 받아 함부르크 대학의 베르너 삿세(Werner Sasse),
안정희 교수팀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된 것이 소학사에서 출간되기도 했다.
―---서지사항---―
활자본. 상⋅중⋅하 3권으로 돼있으나, 현재 상권 1책과 중권의 낙장(落張)이 전할 뿐이다.
상권 1책과 중권 낙장이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가 2017년에 국보로 승격됐다.
상권과 중권의 낙장이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석보상절>에 끼어 전한다.
<월인천강지곡>은 3줄로 이루어진 11자 음보의 시 형태로, 각 줄은 33자 내외이다.
전체는 15구, 41행, 약 2,979자로 구성돼있다. 한글은 큰 활자로, 한자는 작은 활자로 표기돼있다.
원점은 쓰지 않고, 받침 없는 한자음에 ‘ㅇ’의 종성을 붙이지 않는 등 당시 한글 표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모니의 전생, 탄생, 성장, 출가, 교화, 열반 등
일대기를 소설적 구조로 서사화했으며, 불교의 진리와 석가모니의 권능을 예술적으로 미화했다.
작품 전반에 효행, 인륜도덕, 출가의 의미, 불교의 교화적 역할 등이 강조돼있으며,
세종은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윤리적 삶을 가르치고자 했다.
<월인천강지곡>은 석가모니의 전생에서부터 도솔천에 하강해 왕자로 태어나
성장[生長]하고, 결혼생활을 하면서 인생에 대한 번민으로 출가, 수도해 불도를 깨치고,
장엄한 권능으로 중생을 교화, 제도하다가 열반해, 그 진신 사리를 신중[女僧]들이 봉안하고,
믿고 받들기[信仰]까지의 전 생애를 소설적인 구조로 서사화했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부처님의 인격과 권능을 신화적으로 미화함으로써,
이 작품은 영웅의 일생을 찬탄하는 전형적인 서사시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는 명칭 자체도 부처님의 공덕을 칭송한 것으로서,
<월인석보> 권1의 첫머리의 아래 글과 같이 말했다.
“부톄 百億世界에 化身ᄒᆞ야 敎化ᄒᆞ샤미 ᄃᆞ리 즈믄 ᄀᆞᄅᆞ매 비취요미 ᄀᆞᆮᄒᆞ니라”
(부처가 백억세계에 화신해 교화하심이 달이 천개의 강에 비치는 것과 같으니라)
주석에서 보듯이, 곧 부처님의 본체는 하나이지만 백억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이
마치 달이 하나이지만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수많은 강에 비치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 말미암은 것이다.
별곡계통의 악장체를 집대성한 거작으로 자리를 굳혔고,
<용비어천가>와는 달리 일관된 서사성을 지님으로써 시가문학사상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곧 이 작품은‘이야기체 노래’로서 가사(歌辭)의 기본 형태를 나타내고 있으며, 가사문학의 형성과정에서
한시 계통의 가사 구조로부터 본격적인 한글 가사에 이르는 중간에 자리 해 그 맥락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불(成佛)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교만심, 재물욕, 색욕 등을 버리고 불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했으며,
석가모니의 설법이 서술돼있다. 그리고 삽화가 있어 석가모니와 여러 부처가 설법으로 중생을
가난, 죽음, 이산(離散) 등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 모습을 표현했다.
성불의 방법으로 보시와 효도를 제시하고,
석가모니가 비록 열반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무르고 있음을 서술했다.
이와 같이 <월인천강지곡>은 불교의 위대함, 불교 교화를 통한 갈등의 해소,
불사(佛事)의 필요성, 도덕적 윤리 등을 다루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은 <월인석보>에 이르러 불교계 강창문학(講唱文學)의 대본이 됐을 것이다.
※강창문학(講唱文學)----중국 당나라와 송나라 때에 발전한 문학 양식의 하나로서,
노래와 이야기가 혼합되어 무대 예술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전체적으로 보아 상절부(詳節部)는 강설하는 부분이고, 월인부는 가창하는 대목으로 돼있어서,
이것이 강창문학의 표본이라면 국문학의 소설사 내지 희곡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글로 표기된 운문(韻文)으로서는 <용비어천가> 다음가는 最古의 자료로서, 장편서사시의 선구적인 작품이다.
――――국어학적인 의미――――
1. <월인천강지곡>은 한글 창제 이후
가장 빠른 시기에 간행된 한글 활자본으로, 조선 전기의 언어와 어법 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2. <월인천강지곡>은 표기에 있어서 한글을 위주로 하고, 한자를 협주로 처리한 점에서
자주적 국가 의지의 표명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 한글 위주의 체제는 한자를 먼저 놓고 한글을 그 아래에
달아놓은 <월인석보>의 <월인천강지곡> 부분과 대조적이어서 한글을 존중한 세종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당시의 맞춤법은 모두 표음(表音)의 원칙, 즉 소리 나는 대로 적는 원칙에 따랐다.
3. 훈민정음으로 쓰인 중세국어의 문헌자료들은 대부분 음소적 표기를 따르고 있는 반면에,
<용비어천가>와 함께 <월인천강지곡>은‘낱’,‘앒’,‘ᄂᆞᆾ’ 등과 같이
형태음소적 표기를 따르려는 노력이 나타나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4. 사이시옷의 표기는 모두‘ㅅ’으로 통일돼 있으며,
한자음 표기에 있어서도 음가(音價) 없는 종성에‘ㅇ’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이 특징이다.
5. 같은 중세국어의 문헌자료이지만, <석보상절> 이후의 문헌에서는
동국정운식(東國正韻式) 한자음 표기의 한 특징으로서 위와 같은 환경의 종성에‘ㅇ’을 사용했다.(예: 子 ᄌᆞᆼ)
6. 이 밖에 중성(中聲)의 자형(字形)에 있어서도‘ㆍ’, ‘ㆎ’의 경우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한글 자형의 변천을 아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7. 한편, 활자는 <석보상절>과 똑같이 갑인자(甲寅字)인 한자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와 함께 쓰인 한글 활자를 포함해 서지학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용비어천가>와의 관계――――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에 이어서 만들어진
악장 시가(樂章詩歌)로 둘 사이에 공통점 내지 유사점을 살필 수 있다.
1)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의 율격적 특징은 한 행(行)을 단위로 해서 찾을 수 있다.
한 장(章)은 두 행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경우 앞 행과 뒤 행의 율격은 동일하게 이루어져 있다.
2)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는 한 행이 세 구(句)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경우 제1구와 제2구는 대체로 2음보의 양상을 보인다.
그리고 제3구는 2음보, 3음보, 4음보가 두루 나타나는 다양한 율격을 보여준다.
제3구의 음보가 가변성을 보이는 것은 4음보격을 완성해가는 과도기적 형태이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3) <월인천강지곡>은 순서를‘其一, 其二, ······’로 표기해
‘第一章, 第二章, ······’로 표기한 〈용비어천가〉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월인천강지곡〉의 其一은 한 행으로 이루어지고 其二 이하는 두 행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은
〈용비어천가〉의 제1장은 한 행으로 이루어지고 제2장부터는 두 행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이 동일하다.
또 〈월인천강지곡〉의 其一과 其二에서는 석가(釋迦) 공덕의 위대함을 전체적으로 노래하고,
석가의 구체적 사적은 其三에서부터 노래하는 전개 방식은,
〈용비어천가〉의 제1장과 제2장에서 6조(六祖)의 사적과 나라의 번영이 위대함을 전체적으로 노래하고,
6조의 구체적 사적은 제3장에서부터 노래하는 〈용비어천가〉의 전개와 동일하다.
4) 이처럼〈월인천강지곡〉은 그 구성이 〈용비어천가〉를 닮았다.
이러한 사실은〈월인천강지곡〉이 〈용비어천가〉를 전범(典範)으로 해서 제작됐음을 드러내준다.
5) 그러므로〈월인천강지곡〉은〈용비어천가〉라는 영웅 서사시의 형식을
석가모니의 전기(傳記)에 적용한 불교 서사시라고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월인천강지곡>은 <용비어천가>와 함께 최고의 국문시가로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종교성과 문학성을 조화, 통일시킨 장편서사시로서,
인도문학의 걸작이라는 <불소행찬(佛所行讚)>과 대비되는 명작으로 평가된다.
최초의 한글 활자본으로서, 중세국어의 언어를 연구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될 가치가 높은 문헌이라 할 수 있다.
내용이나 구조 및 표현상에 있어서도 완벽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음곡(音曲)에 의해 가창(歌唱)됨으로써 거기에 알맞은 운율로 조화돼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의 묘사에서 서경이나 서정이 뛰어나고 수사법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수려한 서사시로 완결됐다.
세종은 소헌왕후의 죽음 이후 불교에 대한 신앙이 깊어졌으며,
<월인천강지곡>은 개인 신앙의 표현이자, 불교와 유교의 조화, 왕실의 위상 강화 등 다양한 의도를 담고 있다.
이처럼 <월인천강지곡>은 불교적 교화와 세종의 애민정신, 한글의 발전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해석되는 조선 초기의 대표적 찬불가이다.
<월인천강지곡>은 조선시대의 시가로, 세종대왕이 직접 작품을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중요한 문헌이다.
이 작품은 세종대왕이 천강지곡을 주제로 여러 시인들과 함께 작업해 완성된 것으로,
왕이 직접 지은 시와 함께 그 시에 대한 해설과 주석이 포함돼있어 문학사적 가치가 높다.
16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 우주와 만물의 조화 등을 탐구하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또한,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인간 존재의 의미와 미의식은
그 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세종대왕은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국문학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조선시대는 한글의 창제와 보급이 이루어진 시점이며, 이는 문학과 교육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2024년) 미국의 시나리오작가 겸 PD인 조 메노스키(Joe Menosky)가
우리나라 한글 창제를 배경으로 한 <킹세종 더 그레이트(King Sejong The Great)>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조 메노스키는 한국어를 배우다 한글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자신의 책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글을 처음 알았을 때, 충격을 받았다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정말 놀라웠다.
한글 자체가 가진 기록 체계의 정밀함과 기능적인 우월함도 대단했지만,
이 모든 것이 천재적인 왕에 의해 창제되었다는 이야기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런 이야기가 전 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한글은 어떤 문자보다 창의적이고 과학적이고 위대한 작품이며,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은‘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이라는 존경심으로 이 소설을 쓰게됐다고 밝혔다.
<월인천강지곡>은 단순한 시가 아닌, 조선 초기 문학의 전환기적 성격을 띤 작품으로서 중요성을 가진다.
이 작품의 내용 역시 주목할 만한데, 인생의 덧없음, 자연의 아름다움, 우주의 신비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세종대왕이 날카로운 관찰자였음을 보여준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들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