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訓民正音)/훈민정음탐구_김슬옹

13.《훈민정음》해례본과 언해본, 실록본의 차이와 진실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04.18

유위자 2026. 5. 20. 02:33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 13.《훈민정음》해례본과 언해본, 실록본의 차이와 진실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04.18 13.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실록본의 차이와 진실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04.18 김주원의 '훈민정음 실록본 연구'에서 풀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 《훈민정음》(1446) 해례본이 중요한 만큼 이 책에서 갈라져 나온 언해본과 실록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만 세 문헌의 정확한 차이와 가치를 전문가들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 문헌의 역사적 맥락과 정확한 차이를 짚어보기로 한다. 세 문헌의 차이를 알기 위해서는 해례본의 독특한 짜임새를 알아야 한다. <그림 1>에서처럼 한문으로 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빨간 동그라미 친 부분인, 정음편과 ‘정인지서’만을 한문 그대로 세종실록에 실은 것이 <실록본>이다. 한문으로 된 정음편(보라색 동그라미 부분)을 자세히 풀고 번역한 것이 언해본이다. 별 표시한 ‘해례’ 부분은 오로지 해례본에만 실려 있고 1940년에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야 그 내용이 세상이 드러났다. 실록본은 세종실록 속에 3쪽 분량으로 실렸다. 세종실록 초간본은 남아 있지 않고 선조 때 재간행한 것만 남아 있다. 언해본은 30쪽으로 소책자 형식의 단행본으로 나왔을 초간본은 남아 있지 않고 세조 5년(1459)에 세조가 펴낸 ≪월인석보≫ 1권 앞부분에 실려 있는 것(월인석보 권두본)만이 오늘날 남아 있다. <그림 1> 훈민정음 해례본의 짜임새. 기록 순서는 ‘해례본(1446)→실록본(1446)→언해본(1446년? 추정)’이고 간행 순서는 ‘해례본(1446)→언해본(1446-1447년 추정?)→실록본(단종 2년, 1454년)이다. 세종실록은 세종 승하 후 단종 때 간행했기 때문이다. 일단 기록 순서로 재현해 보면, 제일 먼저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해례본을 간행했고 이러한 간행 사실을 사관이 기록했다(사초). 기록할 때, 해례본 66쪽 가운데 앞 7쪽(정음 1ㄱ-4ㄱ) 뒤 7쪽(정음해례 26ㄴ-29ㄴ) 일부를 발췌 기록했다. 이 기록물은 단종 2년(1454년)에 편집되어 간행됐고 이것이 <실록본 훈민정음>이다. 해례본 간행 직후 해례본 세종과 해례본 공저자들은 해례본이 한문본이라 이 책으로 훈민정음을 보급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해례본 가운데 세종이 직접 저술한 부분만을 쉽게 풀어 펴내기로 했고 그것이 언해본이다. 세종 때의 언해본은 해례본 간행 이후 최소 두 달 이내, 최대 1년 이내에 펴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림 2> ≪세종실록≫에 실려 있는 훈민정음 <실록본>(세종실록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1446년) (1606년/선종 39년 설치된 태백산사고본) 전문(음영 부분) @조선왕조실록(온라인). 이 언해본은 전해지지 않고 첫 쪽만을 바꾼 모두 30쪽짜리의 언해본이 세조가 1459년에 펴낸 ≪월인석보≫ 1권 앞에 실려 전한다. 첫쪽이 바뀐 것은 세종 사후에 펴낸 것이라 ‘세종 어제-’이란 별칭을 더 붙여 제목이 ‘세종어제훈민정음’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시호(諡號)가 아니라 묘호(廟號)이다. 시호와 묘호 모두 승하 뒤 부르는 이름이지만, 묘호는 제사를 지낼 때 부르는 호이고, 시호[존호(尊號)]는 승하 뒤 임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붙인 호로 세종의 시호는‘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세종의 생전의 실제 이름은 이도(李裪)이므로 특별한 경우 현대 관점에서 묘호와 실제 이름을 합쳐‘세종 이도’로 부르기도 한다. 실제 이름은‘옷소매 도(裪)’인데 지금 대부분의 기록은 ‘복 도(祹)’로 되어 있다. 이는 후대에 글자를 오인하여 잘못 기록된 것이다. <그림 3> 훈민정음 언해본이 실려 있는 ≪월인석보≫ 1권의 짜임새 @김슬옹 글, 강수현 그림(2012). ≪누구나 알아야 할 훈민정음, 한글 이야기≫ 28(글누림), 37쪽. 세조 때 언해본(1459, 서강대학교 소장)을 바탕으로 세종 시대 언해본을 문화재청이 2017년에 국어사학회 도움을 받아 복원했고 이를 <재구정본 언해본>이라고 한다. 2017년에 공개된 논문 자료 형식의 재구정본을 2023년에 가온누리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단행본으로 해례본과 함께 출판했다. 이러한 간행 순으로 첫 쪽만을 내보이면 다음과 같다. [사진 1] 훈민정음 해례본과 재구정본 언해본과 월인석보 권두본 첫 쪽 비교. 해례본의 앞 두 장(4쪽)은 세종 당대의 기록이 아니라 훗날 복원한 기록이다. 세종이 직접 펴낸 초간본은 오랜 세월 묻혀 있다가 1940년에 경상북도 안동에서 이용준 선생에 의해 발견되어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들여 현재는 간송미술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간송본은 발견 당시 세종의 정음편 1쪽부터 4쪽까지 모두 4면은 없었다. 찢긴 4면을 누가 어떻게 복원했는지는 역사 속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어떻게 복원(보사)했을지 추론은 가능하다. 실록본과 언해본 덕분에 가능했다. 간송본의 낙장 부분의 복원은 실록본과 언해본이 있어 가능했으니 사관이 해례본의 정음편과 정인지서를 그대로 실록에 전재한 것은 해례본 못지 않게 매우 중요하다. 해례본은 일찍 희귀본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례본의 맨 끝의‘정인지서’는 언해본에도 없으므로 해례본 발견(1940) 전까지는 실록본으로 유통되었다. <그림 4> 훈민정음 해례본 낙장 복원 과정 추정도. 해례본과 실록본 오류 재해석 실록본은 여러모로 중요하다. 실록본에 대해서는 김주원(2013)의 “훈민정음 실록본 연구( ≪한글≫ 302호. 한글학회)‘로 자세히 드러난 바 있다. 실록본에 대한 여러 오인과 오해가 이 연구로 풀렸다. 단종 2년(1454년)에 완간된 최초 ≪세종실록≫은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는 태백산본은 임진왜란 이후 선조 39년(1606년)에 재간행된 실록본이다. 그동안 실록본에 대한 오해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실록본에서 이체자로 바꿔 놓은 것을 오탈자로 오해한 경우이다. 대표적인 것이 “欲使人人易習”에서 해례본의 ‘易(쉬울 이)가 오늘날의 ‘昜(볕 양)’으로 쓰여 있다 보니 오탈자로 생각했다. 그러나 ‘昜’는 ‘易’의 이체자이다. 이체자는 자형은 조금 다르지만, 뜻은 같아 서로 바꿔쓸 수 있는 글자를 말한다. 이에 반해‘대용자’는 서로 다른 글자지만 뜻은 같은 경우이다. 해례본의‘辨(분별할 변)’이 실록본에서 대용자‘卞(분별할 변)’으로 쓰였다. 해례본의‘不終朝(아침을 마치기 전에)’의 終(마칠 종)을 실록본에서는‘崇’으로 되어 있다. 이 글자도‘마치다’의 뜻이 있으므로 대용자로 볼 수 있다. 실록은 있는 그대로 기록한 사초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이렇게 대용어로 바뀐 것은 재간행 당시에 바뀌었을 확률이 높다. [표 1]훈민정음 실록본의 오류에 대한 재해석(김주원, 2023: 301쪽, 일부 차례 바꿈)에 대한 추가 의견(김슬옹). 김주원(2023)에서‘탈락’과‘오자’로 나눈 것을‘탈락’도 오타의 일부이므로‘오탈자’로 용어를 통일해 보았다. 왕실 가족을 관리하던 직책인‘敦寧府主簿(돈녕부주부)’는 실록본에서는‘敦寧主簿(돈녕주부)’라고 나오지만, ‘돈녕부주부’를‘돈녕주부’로도 불렀으므로 오탈자가 아니라 대용어로 보았다. 김주원에서 지적 안된 글자로는“是猶枘鑿之鉏鋙也”에서‘ 枘(도낏자루 예)’가‘柄(자루 병)’으로 바뀐 경우로 이것도 오탈자이다. 김주원(2023)에서의 종합 검검 내용과 필자의 의견을 결합해 보면 [표 1]과 같다. 실록본이 현재 간송본 낙장 부분의 오탈자를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글자도 있다. 세종 서문의 맨 끝 글자는 실록본의‘耳(따름 이)’가 맡다. 간송본의‘矣(어조사 의)’는 보사 과정에서 생긴 오탈자이다. <그림 5> 해례본(간송본)과 실록본(색깔그림자 표시 부분)의 대비표. 언해본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자세히 논의할 것이므로 해례본과 실록본과의 차이만을 주로 살폈다. 실록본이 중요한 것은 언해본에 없는‘정인지서’가 실려 있다는 점이다. 후에 다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정인지서’에는 훈민정음의 실용적(기능적) 우수성과 역사적 가치가 명쾌하게 기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창제 반포한 세종을 “하늘이 내린 성인으로 모든 왕을 초월했다.”라는 중국 황제 이상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더군다나 훈민정음으로 인해 진정한 지혜의 세상을 열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 17.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긴 불교 관련 숫자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05.16 17. ≪훈민정음≫ 해례본에 담긴 불교 관련 숫자 훈민정음 비밀코드…28자와 해례본 33장, 108번뇌? [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05.16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어찌 보면 과학이고 어찌 보면 비밀 같은 특정 숫자가 부여돼 있다. 훈민정음 28자, 해례본 책의 장 수는 33장, 해례본의 한자 갈래 수는 108자, 상형 기본자는 3자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수의 의미 부여는 우연이 아니고 기획된 것이라는 필자의 해례본 12주 강의를 들은 불교 전문가이기도 한 최시선 교장은 ≪훈민정음 비밀코드와 신미대사≫(2020, 경진)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물론 불교는 오랜 우리의 생활문화이기도 했으므로 이러한 수가 불교 의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일부는 유교 문화를 반영하는 등 복합적 의미를 띠고 있기도 하다. 세종은 재위 28년에 간행한 해례본에서 직접 저술한‘정음편’에서 초성ㆍ중성(자음과 모음) 기본자를 28자로 명시적으로 분명히 했다. 훈민정음 관련 최초 기록인 세종실록 1443년 12월 30일 자에서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서체를 닮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한자에 관한 것과 우리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결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라고 처음으로 28자를 글자 예시 없이 밝혔다. 이건 사관의 기록이었다. 세종은 해례본 정음취지문(세종 서문, 어제 서문)에서 “우리나라 말은 중국말과는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글 모르는 백성이 말하려고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글로 펼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쉽게 익혀서 날마다 편안하게 쓸 수 있게 할 따름이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_정음1ㄱ”라고 세종이 새로 만든 글자가 28자임을 밝히고 글꼴을 28자로 드러냈다. 글꼴만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1> 세종 의도대로 쓰인 최초 한글 세종글꼴. 신하들이 풀어 쓴‘정음해례편’에서도 “정음 스물여덟 자는 각각 그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다. (正音二十八字,各象其形而制之.[정음해례1ㄴ:2_3_제자해])”라고 28자를 밝히고, ‘정인지서’에서도 “계해년 겨울(1443년 12월)에 우리 임금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설명한 ‘예의’를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_[정음해례27ㄴ:5_^_정인지서])”라고 밝혔다. 초성자와 중성자를 합한 기본자도 28이지만, 해례본에서 실제 쓰인 초성자(자음자)도 28자이다.(7회 연재 참조). 중성자(모음자)는 기본자 11자 외에 18자가 더 쓰여 모두 29자이다. 그런데 해례본에서는 ‘ㅣ’는 “ㅣ만 홀로 자리와 수가 없는 것은 대개 사람은 곧 끝없는 태극의 참과 음양과 오행의 정기가 묘하게 어울리고 엉기어서, 진실로 자리를 정하고 수를 이루는 것을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ㅣ獨無位數者, 盖以人則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 固未可以定位成數論° 也._[정음해례7ㄱ:6_7_제자해])” 라고 하여 중성자에 두루 쓰이는 글자로 숫자 부여에서 제외하는데 이런 맥락이라면 모음자도 28자와 일치한다. 3‧28‧33의 의미 그렇다면 28이란 숫자는 우연의 숫자가 아니라 의도적인 숫자라는 것을 당시 철학의 바탕인 천문학과 당시의 종교 문화적 관습에서 두루 짐작할 수 있다. <그림 2> 동양 28수 방위도 /한글 표기 재구성: 김슬옹, 강수현 첫째는 동양 천문도에서는 하늘의 별자리를 크게 동방, 서방, 남방, 북방 네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 7개의 별자리를 부여해 28수로 자리매김했다. 곧 동방은 “각角, 항亢, 저氐, 방房, 심心, 미尾, 기箕”, 서방은 “규奎, 루婁, 위胃, 묘昴, 필畢, 자觜, 심參”, 남방은 “정井, 귀鬼, 유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 북방은 “두斗, 우牛, 여女, 허虛, 위危, 실室, 벽壁” 등으로 분류했다. 훈민정음 28자가 동양 천문도의 별자리 수, 28수에서 비롯됐다는 것은 반재원․허정윤(2007)의 “≪한글 창제 원리와 옛 글자 살려 쓰기:한글 세계 공용화를 위한 선결 과제≫(역락)에서 주장됐다. 물론 28이란 숫자는 불교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숫자이다. 불교에서는‘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힌 세계’인 욕계(慾界)의 6개 하늘나라, ‘몸이나 물질을 살펴 선정을 닦는 고귀한 세계’인 색계(色界)의 18개 하늘나라,‘물질이 아닌 대상으로 마음을 집중해 얻어진 고귀한 세계’인 무색계(無色界)의 4개 하늘나라를 합치면 3계 28천이 된다. 또한 새벽에 나라에 불음(佛音)이 가득하라는 뜻으로 종을 28번 친다. 법화경은 28개의 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해례본의 종이 장 수는 33장이다(66쪽). ≪법화경≫의 <보문품>에는 위기를 당한 중생이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관음이 즉시 33종류의 화신으로 변해 그들을 구해준다고 되어 있다. 불교는 천상에 모두 33등급의 하늘이 존재한다고 믿는데 사면팔방이라는 말에서 4×8=32가 나오고 여기에 하늘의 뚜껑 1을 더해 33이란 세상의 완성 수가 만들어진다. (차길진의 영혼 산책 블로그 참조). 28개의 나라에 욕계의 지옥·축생·아귀·아수라·인간 세상을 더한 숫자로, 사찰에서는 저녁에 28+5=33번을 타종한다고도 한다. 이밖에 정치 문화적 관습적 의미도 있다. 조선시대 과거 무인 급제자 수는 28인(문인은 33)이고 조선시대 통행금지(밤 10시)인‘인경’종 수 역시 28회(통행금지 해제 파루는 33회)이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훈민정음 28자가 당시의 보편적 철학과 천문학적 배경에 의해서만 나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철저한 음성과학, 문자과학을 적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훈민정음의 명시적인 수 가운데 3과 5도 있다. 훈민정음 모음자(중성자) 상형 기본자는 3자이고, 자음자(초성자) 상형기본자는 5자이다. 천지인 삼재와 오행에 따른 숫자이다. <그림 3> 상형 기본도 /김슬옹 3이란 숫자는 특정 종교만의 숫자는 아니다. 삼태극으로 상징되는 동양 보편 천문학적 숫자이기도 하고 삼보, 삼귀의(부처님께, 불법에, 승가에), 삼법인 등 불교 핵심 가르침과 관련된 수이기도 하다. 또한 세종이 우리말에 담겨 있는 음과 양, 음양의 기운을 음성과학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수이기도 하다. 박병천(2016)의“세종의 ≪훈민정음≫에 숨겨진 불교적 숫자와 그 의미: ≪훈민정음≫ 예의편(정음편)의 전체 한자 숫자와 그 종류(≪월간서예≫ 422호. 미술문화원)”에서는 해례본 정음편 한자 갈래 수가 108자라는 사실을 밝혀 냈다. 실제 한자 수는 고대 역학의 1년 길이와 같은 366자인데, 반복 빈도를 빼면 108자이다. 필자가 빈도수와 더불어 재구성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표 1> 정음편 단순 출현 한자 108자 12*9 배열표(괄호는 빈도) 해례본이 나오고 나서 해례본의 세종 정음 취지문(세종 서문) 한문 54를 번역한 훈민정음 언해본 세종 서문이 108자라는 것은 김광해(1987)의 “<훈민정음 어지>는 왜 백 여덟 글자였을까. ≪우리시대≫ 2월호. 60-63쪽”라는 글로 처음 밝혀냈다. 다음 [표]는 108자가 잘 드러나도록 12*9 배열 표로 필자가 재구성한 것이다. <표 2> 언해본 세종 서문 108자 12*9 배열표 언해본 세종 서문이 108자라는 것이 불교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 뿌리는 해례본의 한자 108자에서 비롯된 것이 될 수도 있다. 해례본이 먼저 나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불교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면 왜 108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김광해(1987)에서 지적했듯이 108이 불교를 상징하는 대중적인 숫자이기 때문이다. 15세기에도 불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108은 불교의 108번뇌로 각인 되었을 것이며, 지식 중심의 이해와 표현에서 일반 백성들의 문자 번뇌나 한자로 인해 교화 정책을 맘껏 펼칠 수 없는 세종의 번뇌 또한 같았을 것이다. 108은 이런 번뇌에서 헤어 나오게 하려는 염원을 담은 숨겨진 상징 기호로 볼 수 있다. 108의 구체적 의미는 감각기관인 6근(六根)의‘눈, 귀, 코, 혀, 피부, 뜻’에다가 감각 대상인 6경(六境)인 ‘색깔, 소리, 향기, 맛, 감촉, 의식’을 곱하면 36이 되고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3을 곱하면 108이 된다. 해례본이나 실록 등 그 어떤 문헌에서 이러한 불교적 배경을 설명한 적은 없다. 성리학이 국시인 나라에서 아무리 임금이라도 명시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훈민정음 비밀 코드’라고 할만하다. 그러나 해례본이 나온 직후에 펴낸 한글 불경책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등으로 보아서도 불교문화를 존중하고 그 문화에 기대 훈민정음을 보급하려 했던 세종의 의도만큼은 너무도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비밀코드가 아니라 암묵적 보편 코드로 볼 수도 있다. 2024/5/15일은 세종 나신 날과 부처님 오신 날이 겹쳐 훈민정음에 얽힌 불교 의미를 더욱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이 글은 2023년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 최초 복간본의 필자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탄생과 역사≫(가온누리)를 대중용으로 수정 보완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