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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1 : 훈민정음 關聯기사]* 한글날, 이극로를 생각한다 / <조선일보> 2006.10.09
[이희용의 글[오피니언] 한글날, 이극로를 생각한다
집념 끝 ‘최초의 한글사전’ 편찬 … 辭典에 일생거는 狂人 그리워
한글날(9일)만 되면 으레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예찬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런 한글을 지키고 가꾸는 데 일생을 바친 분들에 대한 고마움은 종종 잊어버린다.
대표적인 예로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한글사전’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선각(先覺)들의 고초와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쉽게 잊는다.
한글은 조선시대에 언문이라 멸시당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식민지 글이라고 탄압받았다.
한글 창제 465년 만인 1911년 조선광문회
주시경, 최남선, 김두봉이 최초로 한글사전 편찬을 시작했으나 일제 탄압 속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나 나타난 이극로에게 조선어사전 편찬은 독립운동이고 문화운동이며 계몽운동이었다.
물불 이극로(李克魯·1897~1982)는 17세에 만주로 건너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난다.
1916년 상해 동제대학 수학을 거쳐 1922년 베를린대학에 입학,
궁핍과 싸우며 5년간 학업에 몰두해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이 대학에 조선어강좌를 개설, 3년간 강의했다.
학생들로부터 “어째서 조선에는 사전 하나 없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수치와 비애를 절감, 조국에 돌아와 조선어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2006/10/09 09:27:19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를 다시 일으키고 한글사전 편찬운동을 주도해 나간다.
동지들과 맞춤법 통일, 표준어 사정 등의 작업을 거쳐
16만 어휘가 정리된 사전 원고를 완성하고 조판에 들어간 것이 1940년 3월.
그러나 1942년 9월 5일 편찬원 정태진이 함경도 홍원경찰서에 잡혀가
고문 끝에 조선어학회가 비밀 독립운동을 한다는 허위 자백서를 쓰고 만다.
잡혀간 회원은 27명. 참혹한 고문 속에 이윤재, 한징은 옥사한다.
이극로 6년, 최현배 4년, 이희승 2년 6월, 정인승 2년 등의 형을 선고받는다.
한글 타자기 발명가 공병우는 자전(自傳)에서 이극로를 말한다. “그의 한글 애정은 종교적 신앙처럼 뜨거웠다.
눈 치료 받으러 와서 처음 보는 의사에게까지 한글을 전도할 수 있었던 그 신념.
그것도 서슬이 시퍼런 일제 치하에서 ‘우리 조선 사람이 한글을 알아야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다’고 태연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해방을 맞아 감옥에서 풀려난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은 조선어학회 재건에 착수,
애타게 찾던 사전 원고를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한다. 조선어학회 간사장 이극로는
을유문화사에서 출간을 두 번 거절당하고 세 번째 찾아가서 책상을 치며 호통쳤다. “해방이 되었는데도
나라문화 기둥인 한글사전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니 왜놈에게 가서 사정하라는 말입니까!”
정진숙 등 을유문화사 간부들은 크게 감명받아 출판 결단을 내린다.
드디어 1947년 10월 9일 한글큰사전 제1권이 발행되었다(1957년 전6권 완간).
이극로와 조선어학회 간부들은 잉크도 마르지 않은 큰사전을 앞에 놓고 감개무량해 눈물을 흘린다.
조선광문회가 편찬을 시작한 지 37년 만이었다. 이로써 우리 민족은 최초의 한글사전을 갖게 된다.
“이극로의 물불 가리지 않는 무서운 추진력은 누구도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물불이라는 별명이 그의 호가 되어 버렸다.” 이희승의 회고다.
흔히 우리말과 한글의 수난을 얘기한다. 그러나 말과 글의 집인 사전이 제 역할을 하는 한 걱정은 기우가 될 수 있다.
물불과 같이 일생을 사전 편찬에 거는 광인(狂人)들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 걱정일 뿐이다.
고정일 소설가·동서문화 발행인 입력 : 2006.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