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도 지(符 都 誌)
제 1 편 : 마고(麻故)의 시대(第一章 ∼ 第四章)
제 2 편 : 부도(不渡)의 시대(第五章 ∼ 第十章)
제 3 편 : 배달국 시대(第十一章)
제 4 편 : 임검(壬儉)씨 시대 (조선시대)(第十二章 ∼ 第十六章)
제 5 편 : 오행(五行)의 화(禍)(第十七章 ∼ 第二十四章)
제 6 편 : 잃어버린 부도의 법(第二十五章 ∼ 第二十六章)
제 7 편 : 삼한에서 삼국으로(第二十七章, 小符都誌)
제 8 편 : 어둠 속으로(第二十八章 ∼ 第三十三章)
부도지(符都誌) 제7장 : 삼한에서 삼국으로(第二十七章, 小符都誌)
- 김은수 역, 양해전 편역, 부산민박사님 -
□ 第二十七章 기자가 부도의 법을 거역하다
* 27장 부터는 소부도지(小符都誌)라 한다.
은(殷)의 망명자 기자(箕子)1)가, 패한 군사와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에 도망하여 왔다.
명예를 위하여 당우(唐虞)의 법을 행하고,
오행 삼정(五行三正)을 써서,
홍범 무함(洪範巫咸)을 시행하였다.
천웅(天雄)의 도(道)와는 절대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은의 군민(軍民)이 무력으로 부도의 유중(遺衆)을 억압하므로,
유중이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壇)을 봉해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살았다.
즉 옛날의 사례벌(斯禮筏)의 공지(空地)였다.
사례벌은 긴 기(長旗)니,
광야(曠野)에 유배된 사람이,
아침에 내걸고, 저녁에 거둬들여, 먼곳에서 살면서 지키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곧 육촌(六村)을 설치하고, 인접의 제족과 분담하여, 함께 지키되,
각각 한(韓)이라 하고, 보위(保衛)하였다.
한은 보위(保衛)의 뜻이다.
북의 마한(馬韓)과,
남의 변한(卞韓)과,
동의 진한(辰韓)의 삼한이 부족의 자치를 행하고,
선세(先世)의 도를 굳게 지켜,
이후 천년 사이에 기자의 법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보위 방비하는 일에 전념하여, 거의 여력이 없었다.
이 때 하토(夏土)의 쟁탈의 바람이 점차 격심하여,
동요와 혼란이 삼한에 파급되므로,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 모의하고,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여, 지켜내기가(保守) 장차 위태로우니,
어쩔 수 없이 통합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마침내 경계를 정하고, 요새(要塞)를 세워,
혁거세(赫居世)를 추대하여, 다스리는(統御) 일을 위임하였다.
여러 부족들 또한 수령을 추대하고 방비하게되니
남은 백제(百濟)요, 북은 고구려(高句麗)였다.
고구려가 곧 북쪽 성(北堡)의 땅을 회복하여,
서침(西侵)하는 사람들을 쫓아버리고, 그 지역을 완전하게 지켜내었다.
殷之亡人箕子 率敗軍難民逃來於符都之西
은지망인기자 솔패군난민도래어부도지서
爲名 行唐虞之法 用五行三正 施洪範巫咸
위명 행당우지법 용오행삼정 시홍범무함
與天雄之道 固不相容
여천웅지도 고불상용
殷之軍民 武壓符都之遺衆 遺衆 遂封禁明地之壇 避住於東海之濱
은지군민 무압부도지유중 유중 수봉금명지지단 피주어동해지빈
卽昔世斯禮筏之空地也 斯禮筏者 長旆 曠野之謫人
즉석세사례벌지공지야 사례벌자 장패 광야지적인
朝揭暮藏 使遠居之守者 知其不逃也
조게모장 사원거지수자 지기부도야
乃設六村與隣接諸族 分擔共守 各稱韓而保之 韓者保衛之意
내설육촌여인접제족 분담공수 각칭한이보지 한자보위지의
北馬南弁東辰之三韓 自行部族之治固守先世之道
북마남변동진지삼한 자행부족지치고수선세지도
爾來千年之間 不納殷箕之法 專以保防爲事殆無餘力
이래천년지간 불납은기지법 전이보방위사태무여력
於是 夏土爭奪之風 漸次激眼搖混亂 波及於三韓
어시 하토쟁탈지풍 점차격심동요혼란 파급어삼한
是時 六村之人相謀 以爲西禍漸迫 保守將危不可不統合防備
시시 육촌지인상모 이위서화점박 보수장위불가불통합방비
遂限境設塞 推擧赫居世 委任統御之事 諸族 亦擧首領而防備
수한경설색 추거혁거세 위임통어지사 제족 역거수령이방비
南曰百濟 北曰高句麗
남왈백제 북왈고구려
高句麗仍卽恢復北堡之地
고구려잉즉회복북보지지
驅遂西侵之人 完保其域
구수서침지인 완보기역
주석 해설)
1) 기자(箕子) : 은나라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B.C1122년 은나라가 망하자 주 무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조선(고조선)으로 왔다고 하는데, 조선땅에 살다 죽었다. 그가 살아 활동하던 산동성, 하남성 등은 조선땅이다.
- 기자무덤 : 산동성 조현(曹縣 : 산동성 하택시 조현)
- 기자사당 : 하남성 기현(淇縣 : 하남성 학벽시 기현)
[1] 은 : 《한단고기》에 의하면 은은 서기 전 1766년에 건국하여 서기 전 1122년에 멸망했다.
[2] 기자 : 은이 망하자 태행산太行山 서북지역, 태원太原 부근에 숨어 살다가 서기 전 1114년에서화西華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서화는 고비사막 남쪽, 난하欒河의 서쪽 어느 지역으로 추정된다.
[3] 동해지빈 : 동해의 물가라는 뜻인데, 여기서 동해지빈은 경주가 아니다. 《한단고기》에, 「을미(서기 전 86
년) 한소漢昭 대에 부여의 고도古都를 점거하여 나라를 동명東明이라 하니, 이것이 신라의 옛 땅이다.」라고 하고
(김은수, 《주해 한단고기》, 23쪽 참조), 「일찍이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구漢寇가 아주 성해지는 것을 보고 개
연히 세상을 구할 뜻이 있어, 이에 이르러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칭하기를 동명이라 하였다.」고 했다(위
의 책 109쪽 참조). 또 「사로斯盧의 첫 왕은 선도산仙挑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夫餘帝室의 딸 자
소姿蘇가 남편이 없이 잉태하므로 사람들에게 의심을 당하여,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러 또 배를 띄
워서 남하하여 진한의 내을촌柰乙村에 닿았다.」고 했다(위의 책, 241쪽 참조). 단기고사에 보면 43세 단군 때 융
안(隆安)의 사냥꾼 우화충(于和沖)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를 모아 서북 36군을 함락 시키며 난을 일으키고, 46세
단군 때에 한개(韓介)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입하였고, 47세 단군 때는 해모수가 웅심산(熊心山)을 내
려와 군대를 일으키는 등 삼한(조선)의 말기에는 크고 작은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나게 된다. 해모수는 우화충(于和
沖)의 반란을 진압하고 단군이 되어 나라의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로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바
꿔 불렀다. 삼조선이란 신조선(辰韓), 불조선(卞韓), 번조선(馬韓)을 말한다.
[4] 사례벌 : 탈해脫解가 왕이 되어 서라벌로 고쳤다. 사례벌은 ‘장기長旗’라는 뜻이다(〈부도지〉32장 참조)
[5] 북의 마한 : 고구려는 옛 마한의 땅이었다.
[6] 남의 변한 : 백제는 단군왕검이 축성한 요중遼中 12성 가운데 하나인 번한 백제성에서 유래했다.
[7] 동의 진한 : 월지月支에는 탁대卓大의 중마한中馬韓, 금마金馬에는 기준箕準의 마한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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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제27장(소부도지) 13.08.21
第二十七章
殷之亡人箕子 率敗軍難民逃來於符都之西 爲名 行唐虞之法 用五行三正 施洪範巫咸 與天雄之道
固不相容 殷之軍民 武壓符都之遺衆 遺衆 遂封禁明地之壇 避住於東海之濱 卽昔世斯禮筏(茷)之空地也
斯禮筏者 長旆 曠野之謫人 朝揭暮藏 使遠居之守者 知其不逃也 乃設六村與隣接諸族 分擔共守
各稱韓而保之 韓者保衛之意 北馬南弁東辰之三韓 自行部族之治固守先世之道 爾來千年之間
不納殷箕之法 專以保防爲事殆無餘力 於是 夏土爭奪之風 漸次激甚動搖混亂 波及於三韓 是時
六村之人相謀 以爲西禍漸迫 保守將危不可不統合防備 遂限境設塞 推擧赫居世 委任統御之事 諸族
亦擧首領而防備 南曰百濟 北曰高句麗 高句麗仍卽恢復北堡之地 驅遂(逐)西侵之人 完保其域.
은나라의 망명인인 기자가 패한 군사들과 난민을 이끌고 부도의 서쪽으로 도망하여 왔다.
그 이름을 위한다 하고, 당우의 법을 행하며,
오행 삼정을 사용하고, 홍범 무함을 시행하니, 천웅의 도와 진실로 서로 용납할 수 없었다.
은의 군사와 백성이 무력으로 부도의 남은 무리들을 억압하니,
남은 무리들이 마침내 밝은 땅의 단을 봉금해 버리고, 동해의 물가로 피하여 이주하였다.
곧 옛날 사례벌의 빈 땅이었다. 사례벌이란 장기이니,
광야에 유배된 사람들이 아침에 내 걸고 저녁에 거둬들이면서,
먼 곳에 살면서 이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도망가지 않았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에 육촌을 건설하고 인접한 여러 족속들과 함께 공동의 방어를 분담하면서,
각기 한이라 칭하고 서로를 지켰으니, 한이란 보위의 뜻이다.
북에는 마, 남에는 변, 동에는 진의 삼한이다.
스스로 부족의 자치를 시행하면서, 선세의 도를 굳게 지켰다.
이리한 지 천년의 시간에도, 은나라와 기자의 법은 받아들이지 아니하였으며,
오로지 보위하고 방어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다른 여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이르러 하의 땅에서 일어난 쟁탈의 풍습은 점차 격심하여져,
동요되고 혼란함이 마침내 삼한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때에 육촌의 사람들이 서로를 도모하였다. 서쪽의 화가 점차 임박하다고 생각되어,
보위하고 지키는 것이 장차 위태로우니, 불가불 통합하여 방비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마침내 경계를 제한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혁거세를 추대하여 통치와 방어의 일을 위임하였다.
여러 족속들 또한 수령을 추대하고 방비하게 되니, 남은 백제라 이르고 북은 고구려라 하였다.
고구려는 곧 거듭하여 북보, 즉 북쪽의 보호지역의 땅을 회복하고,
서쪽에서 침입해 온 사람들을 몰아내니, 그 지역을 온전히 지키게 되었다.
이제는 역사에서 한 번쯤 들었던 이야기들이.... myh1117 13.08.21
기자가 나오는군요...기자조선이라 할 때의 그 기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 내용은 상당히 다르죠....
아마도 한국사의 많은 부분들이 이와 같은 해석상의 오류와, 사실관계의 미확인이란 의문에 잡혀 있습니다.
어쨌든 부도지는 신라의 입장에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은 이 대목에서 좀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박제상에 의한 기록물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 되겠죠....
경주를 가면 선덕여왕릉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결선생이 살았다는 곳이 나옵니다.
여기 경주를 말하면, 또 대륙의 신라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고,,,
음! 여러 의문들이 겹치면서 역사의 실제란 과연 무엇일까를 떠올리게 됩니다.
역사가들의 가열찬 분투가 요구되는 대목이기도 하구요...
그러나 여기서 역사를 논한다면, 또 다시 숱한 사실관계의 확인과 이어지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과거의 사실들이 오늘 살아서 우리에게 걸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니까요...
그래서 최선의 추론과 측량을 통해 이해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역사철학이 전통적으로 말해 온
"현실적인 것은 합리적이다. 합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떠 올리게 됩니다.
부도지의 기사를 마구 내팽개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제 개인적으로 말해 이것이 개인적으로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고대사 이해의 한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만 이것이 기록되고 알려지는 방식은 신라인 박제상의 눈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역사학에서는 이러한 <박제상의 기록>이라는 첫 부분 부터 문제삼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만....
이후 이어지는 부분들을 좀 더 보면서...이 논의를 진행시켜 가 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