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訓民正音)/훈민정음기원설

일본 神代文字에 관한 연구 / 방통대 <정재철>

유위자 2025. 11. 14. 09:34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1 : 훈민정음 기원] * 일본 神代文字에 관한 연구 / 방통대 <정재철> 韓國放送大學校 論文集 第25輯(1998. 2) 매개커뮤니케이션 效果에 관한 이론적 고찰 일본학과 4학년 정 재 철 目 次 Ⅰ. 서 론 Ⅱ. 한글이 만들어진 원리 Ⅲ. 한글이 일본에 전파된 경로 Ⅳ. 신대문자의 위작증거 V. 신대문자의 위작경위 Ⅵ. 결 론 참고문헌 Ⅰ. 서 론 神代文字는 한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일본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문자를 말한다. 神代라고 하는 것은 「고지키(古事記)」와 「니혼쇼키(日本書紀)」에서 초대 진무(神武)천황(660-585 B.C) 이전을 '神의 代'라고 한 것에서 유래한다. 최근에 일본에서 간행된 '世界の文字の圖典'에는 신대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술을 싣고 있다.1) 인베노 히로나리(齋部廣成)의 「코고슈이(古語拾遺)」(807)에 '대체로 들으니 상고시대 말에 문자가 있었다고 한다'는 기사가 있고, 「샤쿠니혼기(釋日本紀)」에는 일본글자의 기원이 신대에 있다고 한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 설은 14세기경 神道家들 사이에 있었고 18세기 에도시대 중엽 이후가 되면 국학자가 애국심에서 신대문자 실재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는「神字日文傳」에서 쓰시마국(對馬國)의 우라베 아히루(卜部阿比留)씨에게 전해진 아히루문자, 이즈모(出雲)大社에 전해지는 문자 등 13종을 들고 있으며, 오치아이 나오즈미(落合直澄)의 「日本古代文字考」에는 아나이치(阿奈以知) 등 12종을 들고 있다. 특히 히라타는 아히루문자를 중시해서 이를 '日文四十七音'이라 했고, 반 노부토모(伴信友)는 「神代字弁」에서 이를 '甲本眞字體'라고 했다. 아히루문자(Ⅳ장 참조)는 그 자체로 부터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의 한글을 모본으로 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히라타는 거꾸로 한글이 아히루문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긴다. 특히 神社의 오후다(神璽)2) 등에 신대문자로 쓰여진 것이 여기저기 있음이 알려져, 서서히 신대문자 존재설을 뒷받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神璽라는 것은 히라타 등이 주장한 바에 고무되어 근세에 들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되며, 이른바 신대문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문헌도 내용에서 보면 이는 전혀 황당무계한 것이다. 위에 인용한 책에는 신대문자의 여러 종류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그런 각종 물증과 기록에도 불구하고 신대문자가 후대에 위작으로 보여진다고 적고 있다. 고대 일본에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다는 설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거니와 한글이 어떻게 일본에 전해지게 되었는지 고찰해 보는 것 또한 한일문화교류사의 차원에서도 흥미있는 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분야의 연구로 일본에서는 많은 연구서가 간행되고 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부산외국어대 김문길 교수의 연구가 독보적이다. 본 논문에서는 위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한글의 창제 원리를 다시 고찰해 보고 한글이 신대문자의 위작에 미친 영향을 중심으로 한글이 일본으로 전파된 경로에 대해 상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한글이 만들어진 원리 1.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이라는 말은 오늘날 두 가지 뜻으로 쓰인다. 하나는 조선조 제4대 임금인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년)에 손수 만든 새 글자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고, 또 하나는 이 새 글자를 해설한 책이름도 훈민정음이다. 해설서인 훈민정음에는 한문으로 된 것과 우리말로 된 것이 있는데 앞엣 것을 훈민정음해례본3)이라 하고, 뒤엣 것을 훈민정음언해본이라고 한다. 훈민정음해례본은 '國之語音異乎中國...'으로 시작되는 세종대왕의 서문과 'ㄱ 牙音如君字初發聲...'으로 시작되는 본문(이를 흔히 例義(보기와 뜻)편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 본문에 대하여 여섯 분야로 나누어 해설한 解例, 마지막에 당시 예조판서이자 집현전 대제학이었던 정인지가 쓴 서문으로 이루어 졌다. 훈민정음언해본은 해례본 중에서 세종대왕의 서문과 본문인 예의편 만을 국역한 것으로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된다. 이 언해본은 비교적 일찍부터 알려져 왔지만4) 가장 중요한 훈민정음을 만든 원리를 설명한 해례가 빠져있다. 이로 인해 이전부터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하여 구구한 억측이 난무하였으나 1940년 경북 안동 어느 옛집에서 훈민정음 원본이 발견됨으로써 모든 의혹은 해소되게 되었다. 2. 만든 원리 훈민정음 해례의 制字解에는 훈민정음이 다음과 같은 원리에 의하여 창제되었다고 적고 있다.5) 正音二十八字 各象其形而制之 정음 스물 여덟자는 각각 그 꼴을 본떠서 만드니라. 初聲凡十七字 첫소리(자음)는 무릇 열 일곱자이다. 牙音 ㄱ 象舌根閉喉之形 어금니소리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고 있는 꼴을 본뜬 것이다. 舌音 ㄴ 象舌附上악之形 혓소리 ㄴ은 혀가 윗 잇몸에 붙은 꼴을 본뜬 것이다. 脣音 ㅁ 象口形 입술소리 ㅁ은 입의 꼴을 본뜬 것이다. 齒音 ㅅ 象齒形 잇소리 ㅅ은 이의 꼴을 본뜬 것이다. 喉音 ㅇ 象喉形 목구멍소리 ㅇ은 목구멍의 꼴을 본뜬 것이다. ㅋ比ㄱ 聲出稍려 故加화 ㅋ은 ㄱ에 비해 소리 남이 조금 세므로 획을 더하였다. ㄴ而ㄷ ㄷ而ㅌ ㅁ而ㅂ ㅂ而ㅍ ㅅ而ㅈ ㅈ而ㅊ ㅇ而ㆆ ㆆ而ㅎ 其因聲加화之義皆同 ㄴ이ㄷ ㄷ이ㅌ ㅁ이ㅂ ㅂ이ㅍ ㅅ이ㅈ ㅈ이ㅊ ㅇ이ㆆ ㆆ이ㅎ도 그 소리를 따라 획을 더한 뜻이 모두 같다. 而唯 ㆁ爲異 半舌音ㄹ 半齒音ㅿ 亦象舌齒之形 而異其體無加화之義焉 그러나 오직 ㆁ(옛이응)만은 다르며 반설음ㄹ 반치음ㅿ 역시 혀와 이의 꼴을 본뜨되 그 몸꼴이 다르며 획을 더하는 뜻은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음은 발음기관과 그 발음기관의 調音상태를 본떠서 만들어졌다. 즉 기본 다섯자 중 ㄱ과 ㄴ은 발음할 때의 발음기관의 조음상태를 본뜬 것이고 ㅁ, ㅅ, ㅇ은 그대로 발음기관을 상형한 것이다. 한편 모음은 자음과는 다른 원리로 만들어 졌는데 기록된 바 中聲凡十一字 가운뎃소리(모음)는 무릇 열 한자이다. ㆍ 舌縮而聲深 天開於子也 形之圓象乎天也 ㆍ(아래아)는 혀가 옴추러들고 소리가 깊으니 하늘이 자에서 열림이다. 글자의 꼴이 둥근 것은 하늘을 본뜬 것이다. ㅡ 舌小縮而聲不深不淺 地闢於丑也 形之平象乎地也 ㅡ는 혀가 조금 옴추러지고 소리가 깊지도 않고 얕지도 않으니 땅이 축에서 트임이다. 글자의 꼴이 평평한 것은 땅을 본뜬 것이다. ㅣ 舌不縮而聲淺 人生於寅也 形之入象乎人也 ㅣ는 혀가 옴추러지지 않고 소리가 얕으니 사람이 인에서 남이다. 글자의 꼴이 곧추 선 것은 사람을 본뜬 것이다. 此下八聲 一闔一闢 ㅗ 與ㆍ同而口蹙 ... 이하 여덟 소리는 하나가 닫히고 하나가 열려니 ㅗ는 ㆍ로 더불어 같되 입이 오므려지는 것이다... 이처럼 모음은 하늘ㆍ땅ㆍ사람의 三才를 본떠 기본 세 글자를 만들고 이 세 글자를 결합시켜서 나머지 모음자를 만든 것이다. III. 한글이 일본에 전파된 경로 한글이 일본에 전해지기는 두 가지 경로를 예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임진왜란(1592∼1598) 때 왜군들이 우리 문화재 특히 서적의 약탈을 통해서 이고, 또 하나는 임진왜란후 일본의 요청으로 우리 조정에서 파견된 이른바 조선통신사에 의해서이다. 이하 절을 나누어서 상술해 보고자 한다. 1.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영토침략이 그 일차적 목표이었지만 오늘날에 와서 임진왜란을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우리의 탁월한 문화를 부러워해서 일으킨 문화약탈전쟁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6) 당시 왜장들의 행동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가 있다. 그 많은 왜장들이 일사불란하게 각각 우리 문화재를 종류별로 나누어 약탈해 간 것이다. 왜장 가운데 수하에 가장 많은 병졸을 거느렸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주로 궁궐에 있는 불화와 석탑을 약탈해 갔고,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은 주로 문화인과 기술자들을 생포해 갔다. 그런가 하면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서적을 닥치는대로 약탈해 갔다.7) 약탈해간 서적들은 토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수립되면서 정리작업에 들어갔는데 이에야스 자신이 스루가(駿河)성에 스루가 문고를 만들었고(현재 불교서적들이 보관됨), 유교서적은 하야시 라잔(林羅山)의 「旣見書目」이 되어 수만 권이 보관되어 있다. 그외에 토쿠가와 미야케(德川三家)문고 혹은 御讓本으로 수만 권 보관되어 있다.8) 大正·昭和시대의 일본 국문학자로 알려진 山田孝雄은 '豊臣秀吉의 조선정벌시 일본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조선 글을 희귀하게 여겼고 그 글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쓰고 있다.9) 일본인으로서는 임진왜란 7년전쟁을 통해서 한글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 글이 일본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우리 글이 일본에서 읽혀지기로는 임란후 조정에서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들의 도움에 의해서 이다. 2.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에 들어선 토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가 조선에 요청하여 이루어 졌다. 1607년(선조 40년)에 제1차로 파견된 후 이후 총 12회에 걸쳐 파견된다.10) 3회때 까지는 국교재개와 임란때 끌려간 양민 송환의 목적이었고(그리하여 이름도 회답겸 쇄환사였다.) 나머지는 우호와 장군 취임축하의 목적으로 파견되어 일본은 이들을 통해 괄목할 만한 문화적 성과를 이루었다. 통신사는 보통 400명이상의 막대한 인원으로 이루어졌고11) 이들을 접대하기 위한 일본의 재정도 엄청나게 소요됐는데 결국은 막부의 재정난으로 조선통신사파견은 중단되고 만다. 에도 바쿠후의 최고의 유학자이자 토쿠가와의 고문이었던 기노시타 쥰안(木下順庵)은 조선통신사가 투숙한 혼노지(本能寺)에 찾아와 조선 주자학을 틈틈히 배워 일본 최초의 주자학자가 된 것이고 조선의 한글을 최초로 읽고 쓰기까지 했다.12) 기노시다 쥰안은 퇴계학을 많은 청년들에게 강의했는데 그의 문하생 중에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나 아메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있었다. 둘 다 조선어를 쓰고 읽는데 능통하여 아라이는 1709년 토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의 보좌관이 되었고, 아메모리는 近江國(지금 滋賀縣)에 朝鮮語塾을 열어 조선어 교사로 대활약을 한다. 그는 우리나라 외교관으로 활약까지 하고 그의 노년기에 썼던 「交隣須知」라는 조선어 책은 명치신정부가 들어서서 일본자본가들의 경성 활약에 회화교재로 필독되기도 했다.13) 또 한사람 「昆陽漫錄」(1763)을 지은 靑木敦書가 특기할 만하다. 앞서 언급한 국어학자 山田孝雄은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본)일반인에게 (조선)언문이란 글이 널리 알려진 것은 靑木敦書의 昆陽漫錄이다. 2책 1권 마지막 부분에는 조선 언문으로 기록했는데 그 자모표에 가타카나(片假名)로 발음이 붙여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모표의 구체적인 증거는 이보다 앞선 1719년(肅宗45) 우리나라 사신 일행이 일본사람들에게 적어준 「諺文書」 또는 「朝鮮諺文」으로 나타난다.14) 전자는 正使書記 강백이 나고야(名古屋)의 유학자 木下實聞에게 써준 것으로, 客館최粲集(後編)에 실려있다. 初終聲通用八字에서 ㅂ, ㅣ를 빠뜨리는 등의 오자도 있으나, 우리 나라 개화기의 국어교재로부터 옮겨 실은 反切表 그대로인 것이다. 행의 순서가 11행부터 「파타카하」로 된 점이 다를 뿐이다. 후자는 從事官書記 장응두가 오사카(大阪)의 池田南溟의 질문에 답하여 써 준 것인데, 和韓唱和集(下)에 실려 전한다. IV. 신대문자의 위작증거 1. 신대문자의 종류 히라다는 '古史徵開題記'(1805)의 첫째권에서 신대문자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은 1819년 「간나히후미덴(神字日文傳)」이란 이름으로 재판되었다. 이 책은 두 권으로 첫째 권은 眞書肥人書를 담고 있고, 둘째 권은 草書蔭人書를 담고 있다.15) '肥人書'는 확연히 한글의 변형임이 나타나나 '蔭人書'는 글자 모양만 보면 일본 히라카나(平假名)를 흘겨 쓴 것 같기도 하고 한자를 초서로 쓴 것 같기도 하다. 일본인들은 한글을 너무 닮은 진서보다 더 신비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고문서에도 섞여 나와 연구하는 이들에게 어느 것이 고문서이고 어느 것이 위작된 신대문자인지 혼동을 주고 있다 한다.16) 그러나 신에게 드리는 축송문인 노리노(祝詞)나 오후다(神璽)는 대개 肥人書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글이 짧고 장식미도 있을 뿐 아니라 읽거나 쓰기가 쉽기 때문인 듯하다. 아래는 阿比留文字(眞書체 神代文字) 47자를 나타낸 것이다.17) *( )안은 현재 음가임. 한글자모순서에 맞게 재배열했음. フ フ フ フ フ ㅏ (가) ㅣ (기) ㅜ (구) ㅓ (게) ㅗ (고) レ レ レ レ レ ㅏ (나) ㅣ (니) ㅜ (누) ㅓ (네) ㅗ (노) ㄷ ㄷ ㄷ ㄷ ㄷ ㅏ (다) ㅣ (찌) ㅜ (쯔) ㅓ (데) ㅗ (도) コ コ コ コ コ ㅏ (라) ㅣ (리) ㅜ (루) ㅓ (레) ㅗ (로) ㅁ ㅁ ㅁ ㅁ ㅁ ㅏ (마) ㅣ (미) ㅜ (무) ㅓ (메) ㅗ (모) ㅅ ㅅ ㅅ ㅅ ㅅ ㅏ (사) ㅣ (시) ㅜ (스) ㅓ (세) ㅗ (소) エ エ エ エ エ ㅏ (야) ㅣ (이) ㅜ (유) ㅓ (에) ㅗ (요) ㅇ ㅇ ㅇ ?? ㅇ ㅏ (와) ㅣ (이) ㅜ (우) ㅡ (에) ㅗ (오) ㅇ ㅡ (아) ㅅ ㅅ ㅅ ㅅ ㅅ ㅇ ㅇ ㅇ ㅇ ㅇ ㅏ (하) ㅣ (히) ㅜ (후) ㅓ (헤) ㅗ (호) 2. 신대문자의 문제점 위에서 살펴본 바 이른바 신대문자란 그 형태에서 볼 때 한글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글자꼴의 유사성을 보고 어느 문자가 어느 문자를 모방했다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한글의 기원에 관해 한때 유력한 가설의 하나였던 독일 학자 에카르트(P. A. Eckardt)의 한글은 문창호를 보고 만들었다는 설이나18) 또 최근까지도 한글 자모의 일부 꼴이 다른 문자와 닮은 것을 보고 한글의 모방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그렇다.19) 그러나 한글과 신대문자와의 관계는 그 글자꼴의 유사성에 더하여 결정적으로 신대문자는 일본 국어학의 입장에서 보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20) 첫째는 만약 한자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고 한다면, 왜 한자와 가나문자가 활용되게 되었는가 이다. 둘째는 신대문자의 구성을 보게 되면 어느 것이고 모두가 일종의 단음문자다. 가나가 음절문자임에도 신대문자는 그것보다도 발전된 문자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신대문자는 47음 내지 50음밖에 분리될 수 없다. 가나가 발달하던 당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일본어의 음절은 47자 정도로서는 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만엽가나가 1음절에 대해서 몇 개인가의 자체를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상과 같은 점에서 신대문자가 가나 또는 만엽가나 이전에 존재했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신대문자는 한글을 그 저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자이고 그것은 위에서 고찰해 본 바대로 한글이 창제되고 나서 임란이후에 일본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위작한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V. 신대문자의 위작경위 신대문자의 위작은 섬나라라는 지형학적으로 폐쇄적인 공간에서 나온 일본인들의 집요한 자기문화 우월주의의 소산이다. 특히 일본의 한반도 문화에 대한 문화열등 컴플렉스는 그것의 또 다른 이면이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 기록된 진구(神功)황후의 삼한정복 기사나 任那日本府 기사는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1883년 일본 육군 포병 중위 사코 가게아키(酒勾景信)가 만주 집안현 통구에서 발견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의 비문 탁본을 입수하여 일본참모본부가 발표하였는데 이 비문의 내용 중 신묘년(391)조의 기사는 그대로 임나일본부의 실재를 확인해 주는 자료로 원용하고 있다. 그런데 1972년 재일 한국인 사학자 이 진희는 일본 육군에서 비문에 석회칠을 하여 글자를 변조하였다는 설을 제기한 바 있다.21) 이 설은 현재까지도 한.중.일 사학계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을 뿐 아니라 임나일본부설 자체에 대해서도 새로운 학설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22) 신대문자에 대하여는 앞서 언급한 山田孝雄의 말처럼 히라타가 앞장에서 소개한 靑木敦書의 「昆陽漫錄」(조선 언문 교재)을 옆에 놓고 소위 「神字日傳」을 변형 위작하지 않았나 추측이 간다.23) 히라타는 국학을 마지막으로 장식했던 인물이고 그는 일본 신도를 고취시켜 왕정복고의 정치를 꾀했던 인물이다. 그가 한글을 보고 위작하게된 연유는 우리 나라 훈민정음이 음양오행설에서 창제된 것이고 일본신도의 교리에 가장 가까운 것이며 글의 가치가 세계 어느 나라의 문자문화에 비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고 보여진다.24) Ⅵ. 결 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일본 학자들은 신대문자가 위작된 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신대문자를 연구하는 풍조가 등장하여 사지 요시히꼬(佐治芳彦)의 「수수께끼의 신대문자(謎の神代文字)」(1979)을 필두로 지금까지 100여종의 관련 서적이 나와 일본 서점가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다 한다.25) 고대에서부터 최근세까지 유달리 외침과 식민지배가 많았던 우리 나라는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그 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우리의 이웃이자 숙적이라할 수 있는 일본으로부터의 두 번의 침략과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침략전쟁의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근세의 식민지시기에 지배자인 일본인들이 그들의 지배에 불리한 역사적 증거를 인멸하거나 은익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 법이다. 한일간의 수많은 역사적 문화적 쟁점가운데 이 신대문자 문제는 1940년 우리측의 문헌인 훈민정음이 발견됨으로서 일거에 해결을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이 얼마나 뛰어난 문화 민족인지를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신대문자에 관한 우리들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계속 새로운 신대문자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오래된 신사의 비석이나 건물 등에 그럴 듯 하게 적어 넣어 문화우월주의 내지 국수주의에 빠져들고 있음은 지극히 우려할 만하다. 그것은 최근세기 일본이 태평양 전쟁 도발시 감행한 카미카제(神風)특공대의 발상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릇된 신념과 사고 그리고 오도된 역사의식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이웃에서 늘상 피해만 당해온 우리로서는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참 고 문 헌 김문길, 『일본의 고대문자연구-神代文字는 우리 한글이다』, 형설출판사, 1992. ______,『빼앗긴 문화유산을 찾아서-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도서출판혜안, 1995.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저, 조학윤역,『근세일본과 조선통신사』, 경인문화사, 1996 세계문자연구회엮음, 김승일옮김, 『세계의문자』, 범우사, 1997. 유창균, 훈민정음역주, 형설출판사, 1993. 최현배, 『한글갈(正音學)』, 경성 정음사, 昭和15(1940년)(영인본) 世界の文字硏究會編, 『世界の文字の圖典』, 吉川弘文館, 1993. 李進熙, 『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弘文館, 昭和47(1972년) 世宗實錄(조선왕조실록 국역 CD ROM) 月印釋譜(영인본) 新東亞(1997. 5월호) 대한매일(2000. 6. 12일자) 주석 1) 世界の文字硏究會編, 『世界の文字の圖典』, 吉川弘文館, 1993. 세계의 문자연구회엮음, 김승일옮김, 『셰계의 문자』, pp.520-521. 범우사, 1997. 2) 신을 모신 위패(필자 주) 3) 이를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현재 국보 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그 구입자인 전형필님이 세운 간송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4) 경북 풍기 희방사에서 발견된 월인석보(月印釋譜) 제1권의 책머리에 실려 있고, 세종실록 세종28년 9월조에는 세종대왕의 서문등이 실려 있다. 5) 원문이 순 한문으로 되어 있다 함은 앞서 밝힌 바와 같으며, 국역은 유창균, 『훈민정음역주』, 형설출판사,1993. 에 의거했다. 6) 김문길, 『빼앗긴 문화유산을 찾아서-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 p.162, 도서출판혜안,1995 7) 그 수효는 알 수가 없거니와 현대 들어와서도 일제 식민지시대에 일본으로 유출된 고서적포함 각종 문화재가 29,637점이나 된다고 한다.(1994. 2. 14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청) 집계): 김문길, 앞의 책 p.133 에서 재인용 8) ________,앞의 책 p.168 9) 山田孝雄,「所謂神代文字論」下卷 35頁,『藝林』 4卷 3號. 김문길, 『일본고대문자 연구-신대문자는 우리 한글이다』 p.218 에서 재인용함. 10) 통신사란 명칭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1375년 고려 우왕이 일본의 무로마치 바쿠후(室町幕府)에 나흥유를 파견 하여 왜구금지를 요청한 것이며, 조선시대 들어와서 세종대에 3차례 있었고 임란 바로 직전인 선조23년(1590 년)과 임란중인 선조29년(1596년)에도 있었다. 11) 근세 조선통신사행 규모 미야케 히데토시(三宅英利)저, 조학윤역,『근세일본과 조선통신사』 p.235, 경인문화사, 1994 12) 조선 주자학이란 퇴계학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江戶學問이라 일컬었다.(李進熙, 『李朝さ通信使』 150頁, 昭和 54(1979) :김문길, 앞의 책 p.222 에서 재인용함) 13) 김문길, 앞의 책 p.223 14) 日本文獻에 나타나는 記述은 다음 論文에 의한다. 福島邦道, 國書の諺文いろは, 弘治五年朝鮮板 伊路波, 1965, 附錄解說 李元植, 朝鮮通信使に隨行た倭學譯官について, 朝鮮學報 111(1984). 안병희, 「훈민정음 사용에 관한 역사적 연구-창제로부터 19세기까지」,『동방학지』(46,47,48호),1985. 에서 재인용함. 15) 김문길, 앞의 책, p.201 16) ______, 앞의 책 p.175 17) 世界の文字硏究會編, 앞의 책 p.520. 18) Paul Andreas Eckardt, Der Koreanischen Schrift, 1928, Tokyo 최현배, 『한글갈(正音學)』, 경성 정음사, 昭和15(1940)(영인본) p.698 에서 재인용함. 19) 조철수,「훈민정음은 히브리문자를 모방했다」『신동아』, 1997. 5월호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20) 세계문자연구회 엮음(김승일 옮김),앞의 책 pp.521-522. 21) 李進熙, 『廣開土王陵碑の硏究』, 吉川弘文館, 昭和47(1972년) 참조 22)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최근의 학술연구에 대해서는 대한매일 2000. 6. 12일자 17면 국제 학술대회기사 참조. 23) 山田孝雄, 「所謂神代文字さ論」 下卷 35 -36頁, 『藝林』 4卷.(김문길, 앞의 책 p.228에서 재인용함) 24) 김문길, 앞의 책 p.229 25) ______, 앞의 책 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