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도 지(符 都 誌)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제7장)
제7장(第七章) 제1절 백결(百結) 선생과 가문의 전설 金尺
제7장(第七章) 제2절 제상공이 눌지왕을 세우다
제7장(第七章) 제3절 제상공이 고구려 왜국에 부도의 일 거론
제7장(第七章) 제4절 백결(百結) 선생(先生)
제7장(第七章) 제5절 견우성의 화신 제상공
제7장(第七章) 제6절 백결 선생이 자비왕에게 天道를 논하다
제7장(第七章) 제7절 부도통일지론(符都統一之論)
제7장(第七章) 제8절 신라 立國의 根本은 符都 復建이라!
제7장(第七章) 제9절 태조 왕건이 符都을 일을 상세히 묻다
제7장(第七章) 제10절 강감찬 장군이 寧海를 방문, 조언을 구하다
제7장(第七章) 제11절 거무역리(居無役里)
제7장(第七章) 제12절 선류(仙流) 무학대사
제7장(第七章) 제13절 세종대왕이 영해 가문을 가까이 두다
□ 제7장(第七章) 제1절 百結 선생과 가문의 전설 金尺
제1절
‘징심록’에 덧붙인 별책도 역시 제상공(堤上公)이 쓴 것인가.
혹 뒷사람의 기록인가.
글의 뜻은 ‘징심록’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별책으로 덧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제상공(堤上公)1)이 지은 것이 아니면
반드시 백결(百結) 선생2)이 추가하여 보충한 것일 것이다.
공의 가문의 전설이 금척(金尺)과 많이 관계하고 있으며,
내가 일찍이 들은 오대산 노석자(老釋者)의 이야기가
‘사승야전(史乘野傳)’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지금 그 개요를 아래에 적는다.
第一節
澄心錄添綴之別冊金尺誌 亦堤上公之所述歟 或後人之記錄歟
징심록첨철지별책금척지 역제상공지소술여 혹후인지기록여
文義則相連於澄心錄而別冊添綴者何耶
문의칙상련어징심록이별책첨철자하야
若非堤上公之所述 必是百結先生之追補者矣
약비제상공지소술 필시백결선생지추보자의
公家傳說多有關於金尺
공가전설다유관어금척
而余夙聞五臺之老釋者 與史乘野傳 大同小異故
이여숙문오대지노석자 여사승야전 대동소이고
今記其槪要於下
금기기개요어하
주석 해설)
1) 제상공 : 박제상(朴提上) 신라 눌지왕때 충신(363~419). 삽량주 간으로 있을 때, 전에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비서(秘書)를 정리하여 징심록을 저술하여 전하였다. 최
근에는 저자가 없는 증심록(證心錄)의 존재가 소문으로 전하고 있다. 징심록의 존재를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
으나 진본이 나오면 순식간에 그 흔적들을 감출 것이다.
* 영해박씨 문중에서 제공한 박제상 영정
2) 백결선생(百結先生) : 박제상의 아들 (414 ~ ?) 영해 박씨(寧海朴氏) 족보에 이름은 박문량(朴文良)이며, 414년
(실성왕 13)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
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殉節)하자 그의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阿奇)와 아경(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
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만이 남아서 백결을 양육하였다고 한다.
그 뒤 아영이 궁중으로 출가하자 그도 함께 입궐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 478년(자비왕 21)에는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 때 그는 '낙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다고 한다. 더없이 청렴하고 결백했던 그는 궁중으로부터의 모든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
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가세가 빈곤하여 늘 누
더기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결(百結 : 백 번을 기웠다는 뜻)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영해박씨 문중에서 제공한 박제상의 子 백결 선생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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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제7장 1절 13.10.06
第七章 第一節
澄心錄添綴之別冊金尺誌 亦堤上公之所述歟 或後人之記錄歟 文義則相連於澄心錄而別冊添綴者何耶
若非堤上公之所述 必是百結先生之追補者矣 公家傳說多有關於金尺 而余夙聞五臺之老釋者
與史乘野傳 大同小異故 今記其槪要於下
제7장, 제1절
<징심록>에 첨철한 별책 <금척지> 역시 제상공이 기술한 것인가, 아니면 후인의 기록인가.
글의 뜻은 <징심록>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별책으로 따로 철해 놓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이것이 제상공이 지은 것이 아니라면, 이는 필시 백결선생이 추보한 것 일게다.
공의 집안에 전해오는 이야기의 대다수가 금척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오대산에서 도사들과 스님들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밖에서 전해져 내려온 역사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이제 아래에 그 개요를 적는다.
□ 제7장(第七章) 제2절 제상공이 눌지왕을 세우다
제2절
신라 내물왕(奈勿王)1)때
박 제상공(朴 堤上公)이 지마왕(祗摩王)2)의 고손(高孫)으로
보문전(寶文殿) 대부(大夫)를 지내고,
향리(鄕里)인 삽량주(歃良州)3)의 간(干)이 되어
징심헌(澄心軒)4)을 짓고
상세하게 이치(理致)를 변증하여 시원전래(始原傳來)의 역사를 저술한 것을
‘징심록’이라 하였다.
때에 내물왕이 죽으니, 세 왕자는 나이가 어렸다.
차가(次家)의 동생 실성왕(實聖王)5)이 위협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내물왕의 장자 눌지(訥祗)6)는 변란이 올 것을 미리 살피고,
거짓으로 말을 더듬으며 미친 짓을 하고 거리를 방랑하였다.
실성왕(實聖王)이 도외(度外)로 치고,
그 둘째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추방하고,
말사흔(末斯欣)8)은 인질로 왜국(倭國)에 보내
그들을 없애고 뒷날의 염려를 끊어버렸다.
이에 이르러 제상공(堤上公)이 선세(先世)의 전통으로써
곧 실성왕(實聖王)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이에 세론(世論)이 쏟아져 나와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
육신(六臣)이 사퇴하였다.
실성왕(實聖王)이 마침내 눌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것은 전후 십여 년간의 책모였으며 순조롭게 반정이 성공하니,
신자천공(申自天公)이
제상(堤上)은 용감하고 지략이 깊고 말 잘하고 이치(理致)에 밝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역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第二節
新羅奈勿王時朴堤上公 以祗摩王之高孫 經寶文殿大夫
신라내물왕시박제상공 이지마왕지고손 경보문전대부
爲鄕里歃良州(梁山)干 築澄心軒 辨證細理 述始原傳來之史曰澄心錄
위향리삽량주(양산)간 축징심헌 변증세리 술시원전래지사왈징심록
時 奈勿王薨 三王子年少
시 내물왕훙 삼왕자연소
次家弟實聖王 脅威自立
차가제실성왕 협위자립
奈勿王長子訥祗 豫察來變 佯爲訥言作痴 放浪市肆
내물왕장자눌지 예찰래변 양위눌언작치 방랑시사
實聖王 置之度外 其二弟卜好 質放高句麗 末斯欣 質於倭國而除之藺後慮
실성왕 치지도외 기이제복호 질방고구려 말사흔 질어왜국이제지이두후려
至是 堤上公 以先世傳統 乃立言而擧實聖之不當
지시 제상공 이선세전통 내입언이거실성지부당
於是 世論 潝然 申自天裵仲良等六臣 辭去
어시 세론 흡연 신자천배중량등육신 사거
實聖王 遂讓位於訥祗王
실성왕 수양위어눌지왕
此前後十餘年之策謀而乃順成反正
차전후십여년지책모이내순성반정
申自天公曰堤上勇而精略 能辯細理云者 亦由於斯矣
신자천공왈제상용이정략 능변세리운자 역유어사의
주석 해설)
1) 내물왕 : 신라 제17대 왕. 재위356-402년. 미추왕의 조카이며 사위
2) 지마왕 : 신라 제6대왕. 재위 112-134년
3) 삽량주 : 지금의 양산.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과 북위의 전쟁기록 등을 고려해 보면 신라는 무한 인근 양
자강 유역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4) 징심헌 : 양산 징강 언덕에 있음. 대륙 신라를 추측해 보면 무한 적벽이 있는 황학루 앞강을 추측해 본다.
5) 실성왕 : 신라 제18대 왕. 재위402-417년. 미추왕의 동생인 각간 대서지의 아들.
6) 눌지 : 신라 제19대 왕. 재위 417~458년. 내물왕의 아들
7) 말사흔 : 삼국사기에는 미사흔(未斯欣), 삼국유사에는 미해(미해)으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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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제7장 2절 13.10.06
第七章 第二節
新羅奈勿王時朴堤上公 以祗摩王之高孫 經寶文殿大夫 爲鄕里歃良州(梁山)干 築澄心軒 辨證細理
述始原傳來之史曰澄心錄 時 奈勿王薨 三王子年少 次家弟實聖王 脅威自立 奈勿王長子訥祗 豫察來變
佯爲訥言作痴 放浪市肆 實聖王 置之度外 其二弟卜好 質放高句麗 末(未)斯欣 質於倭國而除之以杜後慮
至是 堤上公 以先世傳統 乃立言而擧實聖之不當 於是 世論 潝然 申自天裵仲良等六臣 辭去 實聖王
遂讓位於訥祗王 此前後十餘年之策謀而乃順成反正 申自天公曰堤上勇而精略 能辯細理云者 亦由於斯矣
제2절
신라 내물왕 때의 박제상공은 지마왕의 고손으로,
보문전 대부를 지내고 고향인 삽량주의 수장이 되었다.
징심헌을 짓고 자세한 이치를 변증하여 시원전래의 역사를 기술하니, 이를 <징심록>이라 하였다.
때에 내물왕이 죽으니, 세 왕자는 나이가 어렸다.
이에 작은 집의 동생 실성왕이, 이들을 협박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내물왕의 장자 눌지는 장래에 변란이 올 것을 미리 살피고,
거짓으로 말을 더듬으며 미친 체하고 저자거리를 방랑하였다.
이에 실성왕이 눌지는 도외로 치고, 그 둘째 동생 복호는 고구려에 인질로 추방하며,
말사흔(미사흔)은 왜국에 인질로 보내, 이들을 제거하여 뒷날의 후환을 없애고자 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상공이 선세의 전통으로 입언하여 실성왕의 부당함을 거론하니,
이에 세론이 들끓고 신자천, 배중량 등 여섯 신하가 사퇴하면서 항의하였다.
마침내 실성왕이 눌지왕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후 10여 년간의 책모의 결과였으며, 순조롭게 반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신자천공이 말하기를, 제상은 용감하고 지략이 정밀하며
그 말이 이치에 밝다고 하였으니, 이는 역시 이치와 그 행동에서 연유한 것이다.
금척이 말해지고, 제상공과 부도지에 대한 김시습선생의 추론이 시작됩니다. myh1117 13.10.06
역사에 대한 추론과 접근,
역사학이 객관적 사실을 어느 정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엄밀한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주장하는 역사주의나, 사실주의 쪽에서는 역사는 다만 기록에 충실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마도 영웅이나 신들을 내세워 역사의 흐름을 왜곡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주장한다 해서 역사가 그대로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역사 속에 잔존하게 되는 인간의 간주관성,
즉 역사가의 취사선택과 관련된 다른 사안들, 곧 사료의 문제가 남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추적하는 작업은 항상 읿정한 한계에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여기에 헤겔은 현실과 이성과 역사의 상관관계를 알려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있지요...
곧,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 역시 현실적인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현실적인 측면을 이성적으로 추리해본다면, 당대의 사실을 어느 정도는 재구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한국 고대사, 아니 한민족사의 기본 시각을 선입견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약간만 교정해본다면,
우리의 고대사가 어떤 식으로 규정되며,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 가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한국문화는 중국의 그것과 다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주변의 여러 다른 민족들이 한자문화권과 중화라는 문명의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에도,
한민족은 독자적인 문화세계를 구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는 바로 한민족사와 문화가 중국과 비교할 때, 결코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우월할 수도 있다는 반증의 중요한 증거 내지 역사이해의 기본적 근거가 되는 사실입니다.
이를 토대로 삼고 한민족사를 이해해본다면,
사실상 호리의 차이가 장강대호만큼 벌어지게 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엄청난 이해의 차이가 나타나게 되며,
이를 토대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면 곧바로 역사의 진실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김시습 선생은 부도지의 내력을 나름대로 추리하게 됩니다.
벌써 500년 전의 일인데, 청한자께서는 이를 보도 추리하시고자 하니,
새삼 세조 때 내려졌던 <수서령의 의미>가 무엇인지 자못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서지학이나 정치학적인 또는 역사학적인 특수 문제를 넘어
역사의 진실을 보기 원하는 순수한 보편학문적 관심임을 말해두고 싶습니다.
□ 제7장(第七章) 제3절 제상공이 고구려 왜국에 부도의 일을 거론하다
제3절
눌지왕이 임금이 되어서는
언제나 두 동생의 일로 상심(傷心)하여 정사(政事)에 힘쓰기가 어려웠다.
이에 제상공(堤上公)이 개연(慨然)히 청하여
고구려에 가서 부도(符都)의 일로써 왕에게 말하기를,
"한 뿌리의 후예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이 한 마디 말로 복호(卜好)를 돌아오게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그의 집 문 안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왜국(倭國)으로 출국하였다.
부인 김씨가 듣고 쫓아가니
공이 이미 배를 타고 손을 흔들어 작별하므로
부인이 또한 그것을 권하고 장려하였다.
공(公)이 이미 왜국(倭國)에 입국하여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임금을 배반하고 귀화하였다고 하였다.
계속하여 2년 남짓 머물러 있으면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하루는 미사흔에게 몰래 귀국할 것을 권하였다.
미사흔이 공과 함께 돌아가자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귀국하시면 일은 성공한 것입니다.
어찌 두 사람이 모두 온전하기를 바라다가 일을 위태롭게 만들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울면서 작별하고 뱃놀이를 계속하여 왜인들이 의심하지 아니하게 하고,
미사흔이 멀리 갔을 때를 맞춰 혼자서 관사로 돌아가니,
왜의 임금이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노하였다.
공이 곧 부도(符都)의 일을 말하고 옛날의 정의를 수호할 것을 권하니,
왜의 임금이 완강하여 스스로 동해(東海)의 주인이라 말하고,
공을 협박하여 신하라 칭하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나는 귀화자가 아니요, 계림(鷄林)의 신하(臣下)"라 하니,
왜의 임금이 더욱 노하여 곧 음형(淫刑)을 설하고 협박하였다.
공이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계림(鷄林)의 신하(臣下)'라고 하니,
왜의 임금이 마침내 목도(木島)에서 태워 죽였다.
공이 죽음을 보기를 마치 눈이 녹는 것과 같이 하고,
재가 되어버린 몸이 정기(正氣)로 변하여 천추(千秋)에 절의(節義)를 세웠다.
第三節
訥祗王 登位 常以二弟之事傷心不能勵政
눌지왕 등위 상이이제지사상심불능려정
於是 堤上公慨然請行 出於高句麗 言王以符都之事曰
어시 제상공개연청행 출어고구려 언왕이부도지사왈
一根之裔 何有是事 一言而還卜好及歸
일근지예 하유시사 일언이환복호급귀
不入其門而直出於倭國 夫人金氏聞而追至
불입기문이직출어왜국 부인김씨문이추지
公 已乘船搖手作別 夫人亦勵之
공 이승선요수작별 부인역려지
公 已入倭國 知其言之不容 假稱反者歸化
공 이입왜국 지기언지불용 가칭반자귀화
留連歲餘好行船遊 一日 囑未斯欣潛歸
유연세여호행선유 일일 촉미사흔잠귀
斯欣言與公同歸
사흔언여공동귀
公曰公子歸則事成 何期雙全而危其成事乎
공왈공자귀칙사성 하기쌍전이위기성사호
遂泣別 優遊船中 使倭人勿疑 俟斯欣遠去 乃獨歸舘舍 倭主始知見欺而怒
수읍별 우유선중 사왜인물의 사사흔원거 내독귀관사 왜주시지견기이노
公 乃言符都之事 勸修舊誼
공 내언부도지사 권수구의
倭主頑强 自言東海之主 迫公稱臣
왜주완강 자언동해지주 박공칭신
公 笑曰吾非歸化者 卽鷄林之臣 倭主尤怒 乃設淫刑而脅迫
공 소왈오비귀화자 즉계림지신 왜주우노 내설음형이협박
公 終不屈 言必曰鷄林之臣 倭主遂燒殺於木島
공 종불굴 언필왈계림지신 왜주수소살어목도
公 視死如融雪 灰身化正氣 立節義於千秋
공 시사여융설 회신화정기 입절의어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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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7장 3절 13.10.09
第三節
訥祗王 登位 常以二弟之事傷心不能勵政 於是 堤上公慨然請行 出於高句麗 言王以符都之事曰 一根之裔
何有是事 一言而還卜好及歸 不入其門而直出於倭國 夫人金氏聞而追至 公 已乘船搖手作別 夫人亦勵之
公 已入倭國 知其言之不容 假稱反者歸化 留連歲餘好行船遊 一日 囑末斯欣潛歸 斯欣言與公同歸
公曰公子歸則事成 何期雙全而危其成事乎 遂泣別 優遊船中 使倭人勿疑 俟斯欣遠去 乃獨歸舘舍
倭主始知見欺而怒 公 乃言符都之事 勸修舊誼 倭主頑强 自言東海之主 迫公稱臣 公 笑曰吾非歸化者
卽鷄林之臣 倭主尤怒 乃設淫刑而脅迫 公 終不屈 言必曰鷄林之臣 倭主遂燒殺於木島 公 視死如融雪
灰身化正氣 立節義於千秋
제3절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항상 두 동생의 일로 상심하여 정사에 힘쓰기가 어려웠다.
이에 제상공이 개연히 청하고 고구려에 출행하여 부도의 일을 들어, 왕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이르기를, “한 뿌리의 후예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하니,
이 한 마디 말로 복호공이 환국하게 되었다.
돌아와서는 자신의 집 문 안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왜국으로 향하였다.
부인 김씨가 이를 듣고 쫓아갔으나, 공은 이미 배 위에 올라 손을 들어 작별을 고하니,
이에 부인 역시 다만 공의 앞일을 권려할 뿐이었다.
공이 왜국에 들어간 후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미리 알고,
거짓으로 말하기를 임금을 배반하고 귀화한다 하였다.
그리고는 해를 이어 2년 남짓 머무르면서 뱃놀이로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 말사흔을 만나 몰래 귀국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사흔이 공과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귀국하게 되면 일은 모두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찌 두 사람이 다 온전하기를 바라다가 일을 위태롭게 만들겠습니까?”하였다.
마침내 울면서 작별하고, 뱃놀이를 계속하면서 왜인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못하게 하며,
사흔이 멀리 나아가는 것을 기다려 홀로 관사로 돌아갔다.
왜주가 이에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대노하였다.
마침내 공이 부도의 일을 말하고 옛 정과 그 의리를 회복할 것을 권하였으나,
왜주는 완강히 거부하면서 도리어 스스로를 동해의 주인이라 칭하고
오히려 공을 압박하여 신하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공이 웃으면서,
“나는 귀화자가 아니요, 오직 계림의 신하일 뿐이다”라고 하니,
왜주가 더욱 노하여 음형을 설치하고 더욱 협박하였다.
공이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계림의 신하라고 답하니,
드디어 왜주가 공을 목도에서 태워 죽였다.
공께서는 죽음을 보기를 마치 눈이 녹는 것과 같이 하였으며,
마침내 재가 되어버린 육신이 오히려 정기가 되어, 천추에 그 절의를 세운 것이다.
유명한 망부석의 고사가 나오고 있습니다. myh1117 13.10.09
제상공의 이야기가 회자됨은 계림의 신하와 망부석으로 요약할 수 있겠지요...
뒤이어 백결선생의 이야기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고사가 되겠구요...
오늘은 드디어 일본으로 건너가 말사흔(또는 미사흔)이라고도 하는데요,
한자로 쓰여진 고대의 기록이라 어느쪽인지는 불분명합니다만, 부도지에는 분명히 말사흔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양반을 탈출시키는 고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전에 고구려로 가서 한 동포 한 민족임을 설파하는 대목에서는 또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실상 민족 통일을 말하면서,
우리 민족 진영에서 생각하는 한철학 또는 한사상적인 요소는 대단히 의미가 깊다고 하겠습니다.
때로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전혀 다른 생각을 지닌 많은 분들이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실로 부도복본과 한단의 유래를 생각하면, 삼한과 삼조선이 서고,
삼국의 형세가 맞서 비록 싸우고 다투는 역사의 한 과정을 지나오기는 하였습니다만,
우리가 한 백성임을 잊지 않는 한, 통일의 당위성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다만 일본으로 건너가 왜국의 형세와 제상공의 사연은 또 다른 해석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과거 고대적 사건으로 그 강성하던 민족의 공동체와 기개가 어떤 식으로 변질되고, 무너졌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 또한 느끼고 있습니다.
민족이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곧바로 미래를 향한 동력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정신의 역사, 문화의 과거를 말해보려고 하는 것인데,
이를 학문적으로 시비를 걸어대는 형국이니
사실상 현대 학문의 학문성이라는 문제부터 새롭게 풀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계속 뭔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하루가 되어버렸네요....
또 다른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으니, 다음에 또 역사와 철학의 문제를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 제7장(第七章) 제4절 백결(百結) 선생(先生)
제4절
눌지왕 형제가 공(公)의 죽음을 듣고 슬픔이 지극(至極)하여
공(公)을 영해군(寧海君)1)에 봉(封)하였다.
공(公)의 부인 김씨는 공(公)의 죽음을 듣고 세 딸을 거느리고 치술령에 올라,
스스로 치술령가를 짓고 동해(東海)를 바라보며 울다가 자진하였다.
장녀(長女) 아기와 삼녀(三女) 아경 역시 부모(父母)를 따라 죽으니,
모녀(母女)의 몸이 변하여 삼체신모석상(三體身母石像)이 되었다.
차녀(次女) 아영은 가문의 일을 위하여 굳세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가 백결(百結) 선생(先生) 문량공(文良公)이다.
눌지왕이 듣고 심히 슬퍼하여 미사흔에게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여 위로하였다.
백결(百結) 선생(先生)이 장성하여 잠시 자비왕(慈悲王)2) 조(朝)에 벼슬하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가 세상일을 버리고,
거문고를 타서 수증(修證)하며 스스로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다가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第四節
訥祗王兄弟 聞公之死 悲痛至極 封公寧海君
눌지왕형제 문공지사 비통지극 봉공녕해군
公之夫人金氏聞公死 率三娘 登鵄述嶺
공지부인김씨문공사 솔삼낭 등치술령
自製鵄述歌 望哭東海自盡而死
자제치술가 망곡동해자진이사
長女阿奇三女阿慶 亦殉父母而死
장녀아기삼녀아경 역순부모이사
母女之身化爲三體神母石像
모녀지신화위삼체신모석상
次女阿榮 爲家事强生 養育五歲男弟
차녀아영 위가사강생 양육오세남제
是爲百結先生文良公也
시위백결선생문량공야
訥祗王聞而甚悲 使未斯欣 娶阿榮而慰之
눌지왕문이심비 사미사흔 취아영이위지
百結先生 長而大成 暫立於慈悲王朝 仍卽辭歸 不事世業
백결선생 장이대성 잠립어자비왕조 잉즉사귀 불사세업
彈琴修證 自行先世之道 遂晦跡不現云
탄금수증 자행선세지도 수회적불현운
주석 해설)
1) 영해 : 중국 고지도 주경도를 보면 임해현에 신라산이 있고 동북에 영해라는 지명이 있다.
2) 자비왕 : 신라 제 20대왕. 재위 458-478년. 눌지왕의 장남
* 중국고지도 "주경도" 상 "신라산"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圖)"상의 절강성 임해현의 "신라산"이다. 임해현 주
위에 - 천태현 - 영해현 - 황암현 - 선거현 등이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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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제7장 4절 13.10.10
第四節
訥祗王兄弟 聞公之死 悲痛至極 封公寧海君 公之夫人金氏聞公死 率三娘 登鵄述嶺 自製鵄述歌
望哭東海自盡而死 長女阿奇三女阿慶 亦殉父母而死 母女之身化爲三體神母石像 次女阿榮 爲家事强生
養育五歲男弟 是爲百結先生文良公也 訥祗王聞而甚悲 使末斯欣 娶阿榮而慰之 百結先生 長而大成
暫立於慈悲王朝 仍卽辭歸 不事世業 彈琴修證 自行先世之道 遂晦跡不現云
제4절
눌지왕의 형제가 공의 죽음을 전해 듣고, 지극히 비통해 하면서 공을 영해군에 봉하였다.
공의 부인 김씨는 공의 죽음을 전해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랐다.
스스로 치술가를 짓고 동해를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그 진기가 다하여 죽고 말았다.
장녀 아기와 삼녀 아경 역시 부모를 따라 죽으니, 모녀의 몸이 화하여 삼체신모(三體身母)석상이 되었다.
차녀 아영은 집 안 일을 위하여 굳세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양육하였으니,
이가 바로 백결선생 문량공이시다.
눌지왕이 이를 전해 듣고 심히 비통해 하고, 말사흔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며, 위로하였다.
후에 백결선생이 장성하여, 잠시 자비왕조에서 벼슬하다가 곧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선생은 이후 세상의 일을 버리고, 거문고를 타면서 수증(修證)하며,
스스로 선세의 도를 행하다, 홀연히 종적을 감추고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치술령과 백결선생의 수증 myh1117 13.10.10
눌지왕 때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영해군 관설당 박제상공의 부인 김씨와 두 여식이 치술령에 올라 삼체신모 석상이 되니,
망부석과 망부가가 이로부터 아득한 옛날에서 지금 옆에 벌어진 듯한 가슴아픈 사연으로 다가옵니다.
계림의 신하가 되고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인 것이니, 죽음이 이를 어찌 조용히 없던 일로 하겠습니까?
참으로 죽을 자리에서 죽을 수만 있다면, 그리 못할 일도 아니겠지만,
그 어느 곳이 죽을 자리인 줄 또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로 백결선생의 탄금과 음향 수증의 뜻이
바로 아버지 제상공으로부터 유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떡방아 찧는 소리로 유명한 백결선생은 평생을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는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결국 아버지 제상공의 가르침과 망부석 김씨부인의 키움
그리고 누님이신 아영의 돌봄으로 이룩된 일이라고 청한자 김시습 선생께서는 여기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음과 수증의 문제가 나오니,
금척과 만파식적의 옛 고사 또한 이로부터 크게 멀지 않은 지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신라를 구했다는 그 만파식적의 연결이
음과 향을 수정하여, 율려를 다스림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나라의 풍습 곧, 국풍이 용기와 평화와 즐거움에 있었다는 것이기도 하니,
신바람의 근원이 되고 총화단결의 제 모습이 되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의 자본주의와 정치가 백성을 가르고 나누어 권세 쥔 자들이 농단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데 반해,
부도 복본, 수증 율려는 음양의 이치를 균평으로 돌리는 거대한 우주의 작업에 동참하는 것이라 하겠지요....
이로써 천지에 참예하고, 천지의 작업에 힘을 더하는 것이
성통공완 즉 참됨으로 천지를 바로세우는 작업이 된다 하겠습니다.
이는 또한 모든 사람의 일이 아니요,
오직 천지에 합한 한 사람의 공덕으로 일체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전설과 신화가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서서히 한국인, 아니 한민족의 일원으로 평생을 살아온 뜻과 이유를 알 것 같고
또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보람을 말해야 할 때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제7장(第七章) 제5절 견우성의 화신 제상공
제5절
제상공(堤上公)이 어렸을 때, 한 도인(道人)이 공(公)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견우성(牽牛星)의 화신(化身)이니 반드시 제도(濟渡)하는 공(功)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제상(堤上)'이라고 하였다.
자라자 도인이 또 알리기를,
"동촌(東村) 김공(金公)의 집에 17살 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織女星)의 화신(化身)이므로 공(公)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다.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별의 정기로 이루어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그러므로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
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奇異)한 일이다.
第五節
堤上公幼時 一道人見公曰
제상공유시 일도인견공왈
此人牽牛星之化身 必有濟渡之功 因名之曰堤上
차인견우성지화신 필유제도지공 인명지왈제상
及長 道人又告曰東村金公家 有十七娘
급장 도인우고왈동촌김공가 유십칠낭
卽織女星之化身 與公好緣 因之以成婚已矣
즉직녀성지화신 여공호연 인지이성혼이의
道人嘆曰 此兩人星精之天緣故 光不滅於久遠
도인탄왈 차양인성정지천연고 광불멸어구원
雖隔江相望何恨之有云 此眞奇異之事也
수격강상망하한지유운 차진기이지사야
* 그림 : 고구려 국소대형 진의 무덤 천정에 그려진 '견우직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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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제7장 5절 13.10.13
第五節
堤上公幼時 一道人見公曰 此人牽牛星之化身 必有濟渡之功 因名之曰堤上 及長 道人又告曰東村金公家
有十七娘 卽織女星之化身 與公好綠(緣) 因之以成婚已矣 道人嘆曰 此兩人星精之天緣故 光不滅於久遠
雖隔江相望何恨之有云 此眞奇異之事也
제5절
제상공이 어렸을 때 한 도인이 공을 보고,
“이 사람은 견우성의 화신이니 반드시 세상을 제도하는 공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이로부터 그 이름을 제상이라 하였다. 공이 장성하자 도인이 또 고하기를,
“동촌 김공의 집에 십칠 세 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의 화신이라,
공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하니, 이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별의 정기에 따라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진실로 그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바라보고만 있으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라고 하였으니, 이야말로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 제7장(第七章) 제6절 백결 선생이 자비왕에게 天道를 논하다
제6절
백결(百結) 선생(先生)이 일찍이 자비왕(慈悲王)을 위하여
식재(息災), 치원(治源), 여인(與人), 지인(知人), 양인(養人) 등의 설(說)1) 약간을 진술하였다.
평생의 품은 회포를 반드시 거문고를 펴서 태허(太虛)에 울리니,
세상(世上)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중 악천악(樂天樂)과 악(樂)이 전해졌다.
집이 가난하므로 옷이 해어져 수없이 꿰매 입으니,
세상사람들이 백결(百結)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이 그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백결(百結)이라 하고,
또 개명하여 '루랑(婁琅)'이라 하였다.
선생이 이미 시골마을로 물러나 여러 번 불러도 나기지 아니하므로,
왕이 그 마을에는 모든 법과 규제가 없애니,
곧 충효곡(忠孝谷)2)이요, 세칭 물금리(勿禁里)다.
고려말에 신운월재(申雲月齋)3) 선생과 문헌공 최충(崔冲)4) 선생 등이
그 원고를 수집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크도다!
백결(百結) 선생(先生)의 도(道)는 마땅히 해야 할 인군(人君) 만세의 사법(師法)이요,
그 출처가 정명무애(正明無碍)하니 가히 지인(至人)이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第六節
百結先生 曾爲慈悲王 陳息災․治源․與人․知人․養人說等苦干
백결선생 증위자비왕 진식재․치원․여인․지인․양인설등고간
平生所懷 必宣於琴而嗚之於太虛
평생소회 필선어금이오지어태허
世人莫知其意 其中樂天樂 碓樂傳於世而已
세인막지기의 기중락천락 대락전어세이이
家貧衣弊 補綴無數 世人 通稱曰百結先生故
가빈의폐 보철무수 세인 통칭왈백결선생고
先生因之而自號曰百潔又改名曰婁琅
선생인지이자호왈백결우개명왈루랑
先生已退去鄕里 累徵不就 王除一切法禁於其鄕 卽忠孝谷而世稱勿禁里也
선생이퇴거향리 누징불취 왕제일체법금어기향 즉충효곡이세칭물금리야
麗末文貞公申雲月齋先生 文憲公崔冲先生等 收其稿而顯揚於世
려말문정공신운월재선생 문헌공최충선생등 수기고이현양어세
曰大哉 百結先生之道 當爲人君萬世之師法 其出處 正明無碍 可謂至人云
왈대재 백결선생지도 당위인군만세지사법 기출처 정명무애 가위지인운
주석 해설)
1) 영해박씨 세감 및 화해사전에 나오는 글
죽송오(竹松烏) 서견(徐甄)이 말하기를 “신라의 인물로서 속세를 피해 숨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곤궁
한 처지에서도 참된 즐거움을 가졌던 사람은 누구일까?"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말하기를, “눌지왕때 왜국
에 들어가 사절(使節)했던 삽량주 사람 박제상의 아들 문량이 자비왕을 섬기면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상소하였는
데, 그의 말에, '천도(天道)란 말이없는 가운데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마치 스승이 착한 일을 열어주고, 허물을
막기 위하여 회초리와 꾸짖음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임금이 만일 하늘의 재앙에 경각심을 가져
정도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행히 천재를 봄으로써 복된 길로 개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자기 도리를 자기
가 잃어버리면 천재마저도 나타나지 않게되는데, 그것은 천재중에서도 제일 큰 천재로서 재앙이 없는 것이 재앙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보이는 것이지 재앙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닙
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하늘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
린 것입니다.'“ 하였고, 그 후로도 계속 진언하여 태평성대를 만드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알았다. 그가 말하기
를.... (중략) 너무 길어 여기서 줄인다.
2) 충효곡 : 효충동은 경남 양산에 있다.
3) 신운월재 : 1298~1377, 고려때의 학자
4) 최충 : 948~1068, 고려의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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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제7장 6절 13.10.13
第六節
百結先生 曾爲慈悲王 陳息災․治源․與人․知人․養人說等苦(若)干 平生所懷 必宣於琴而嗚(鳴)之於太虛
世人莫知其意 其中樂天樂 碓樂傳於世而已 家貧衣弊 補綴無數 世人 通稱曰百結先生故
先生因之而自號曰百潔又改名曰婁琅 先生已退去鄕里 累徵不就 王除一切法禁於其鄕
卽忠孝谷而世稱勿禁里也 麗末文貞公申雲月齋先生 文憲公崔冲先生等 收其稿而顯揚於世
曰大哉 百結先生之道 當爲人君萬世之師法 其出處 正明無碍 可謂至人云
제6절
백결선생이 일찍이 자비왕을 위하여, ‘재앙을 멈추는 법’,
‘근원을 다스림’, ‘사람과 더불어 살고, 알며, 기르는 법’ 등의 제설을 진상하였다.
이와 더불어 평생의 소회를 반드시 거문고에 실어 태허에 울리고자 한다 하였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가운데 낙천악과 대악이 세상에 전하여졌다고 한다.
또한 집이 가난하여 의복이 헤어지니 무수히 고치고 꿰매 입게 되었다.
이에 세인들이 통칭하여 백결선생이라 한 것이다.
선생 역시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백결(百潔)이라 하고, 또 개명하여 누랑(婁琅)이라 하였다.
선생이 이미 향리에 물러 앉아 여러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왕이 그 향리에는 일체의 법금(法禁)을 없애주었다.
곧, 충효곡이요, 세상에서 말하는 물금리가 그 곳이다.
여말의 문정공 신씨 운월재선생과 문헌공 최충선생 등이
그 원고를 수집하여 세상에 드러내면서 말하기를,
“크도다! 백결선생의 도는 마땅히 백성과 임금이 행해야 할 만세의 사법(師法)이다.
그 출처가 바르고 명확하며, 또한 거리낄 것이 없으니 가히 지인(至人)이시다”라고 하였다.
오늘은 물금리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myh1117 13.10.13
제상공 집안의 내력이 이어지고, 백결선생의 물금리가 또 말해집니다.
내력없는 사물이 어디 있으며, 원인없는 결과가 어디 존재하겠습니까?
나라의 내력을 묻는 것은 다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겠지요...
물유본말 사유종시라,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다 그만한 까닭이 있고, 연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제가 단군할배를 공부한 것도 다 연유가 있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또 부도지가 신라를 말하게 하는 것, 역시 다 그 연유가 따로 있는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이러다보니 저는 맨날 생각만 하다 인생을 마감해야 될 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기도 하구요....ㅎㅎㅎ
저도 생활하는 사람이다보니, 강의가 있고 친구들 만나고, 술이라도 한 잔 하게 되면,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을 그냥 모른 척 하고 넘어가게 되고, 그러면 또 괜히 죄스럽게 되고....
오늘은 일요일인데, 대낮부터 친구놈이 맥주 사들고 쳐들어 왔네요...
그러다 이야기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통일이지 않겠냐구요...
그러다보니 이 놈이 또 입에 게거품을 뭅니다....
나이 오십에 게거품 물 이야기가 남아 있으니 다행스러운 것 같기도 하구요....
결국 통일은 의지의 문제라고 저는 또 떠듭니다.... 언론들이 씨부리고, 정치권은 쇼를 합니다.
그러나 민중은 오 갈데가 없습니다. 지금 먹고 살기도 바빠죽겠는데, 무슨 뜬 구름이 왔다갔다 하는 구만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제가 이거라도 말해두지 않으면, 뒤에 훗날 애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갈테니 말입니다.
천부경과 한단고기 그리고 부도지가 중요한 것은
이 험악한 세상에서 목숨을 걸고 말해야만 할 가치가 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해통화, 부도복본은 한민족의 자손이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큰 이야기가 되는 지도 모릅니다.
□ 제7장(第七章) 제7절 부도통일지론(符都統一之論)
제7절
신라 무열왕(武烈王)1)이 미천하였을 때,
김유신2) 등과 함께
선도산(仙桃山)3) 아래 백결(百結) 선생(先生)의 증손 마령간(麻靈干)4) 선생에게 취업하니,
선생이 언제나 백결 선생의 도로 그들을 가르치고,
항상 부도통일론(符都統一之論)을 설하며 외래의 법을 극력 배척하였다.
후에 무열왕이 등위하여 유신 및 선생의 아들 용문5) 등과 함께 모의하여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일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후세에 최치원6), 곽여7) 등 여러 현인이 이 집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第七節
新羅武烈王微時 與金庾信等 就業於仙桃山下 百結先生之曾孫麻靈干先生
신라무열왕미시 여김유신등 취업어선도산하 백결선생지증손마령간선생
先生常以百結先生之道 授之 恒說符都統一之論 極斥外來之法
선생상이백결선생지도 수지 항설부도통일지론 극척외래지법
後 武烈王 登位 與庾信及先生之子龍文等
후 무열왕 등위 여유신급선생지자용문등
謀而成三國統一之業云
모이성삼국통일지업운
後世崔致遠郭輿諸賢出於是家云
후세최치원곽여제현출어시가운
주석 해설)
1) 무열왕 : 신라 제 29대왕 김춘추. 제위 604-661년
2) 김유신 : 595~673. 신라 명장
3) 선도산(仙桃山) : 중국에는 仙都山이 있다.
4) 마령간 : 백결 선생의 증손. 이름은 담. 일명 담새. 자는 여랑. 호는 마령간. 신라 소지왕 기묘년에 출생했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이차돈과 불교를 행하고 신라에 전도하자 왕이 이를 쫒는지라, 마령간이 아뢰어 이차돈의 목
을 베고 불교도의 무리를 해산시켰다.
* 영해박씨 세감 상 162쪽 기록 : 흥무왕 김유신의 실기에 신라 무열왕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선도산으로 백결
선생을 찾아가 적을 쳐부술 계책을 물었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내가 듣기에는 기계 사람 김
유신이 관중 숙하에 못지 않다고 하는데, 그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하여 그를 천거해 씀으로써 대업
을 성공시켰다고 하였다.
5) 용문 : 백결 선생의 6세손(584~670). 시호는 무열.
6) 최치원 : 857~ 신라의 학자. 경주최씨의 시조. 중국 양주에는 최치원 박물관이 있다.
7) 곽여 : 1058~1130. 고려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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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심록추기 제7장 7절 13.10.14
第七節
新羅武烈王微時 與金庾信等 就業於仙桃山下 百結先生之曾孫麻靈干先生 先生常以百結先生之道
授之 恒說符都統一之論 極斥外來之法 後 武烈王 登位 與庾信及先生之子龍文等 謀而成三國統一之業云
後世崔致遠郭輿諸賢出於是家云
제7절
신라 무열왕이 아직 어렸을 때, 김유신 등과 더불어 선도산 아래
백결선생의 증손이신 마령간 선생에게 취업하였다.
선생이 항상 백결선생의 도로 그들을 가르치고,
또 항상 부도 통일의 이론을 설하시며, 외래의 법을 극력 물리치셨다.
후에 무열왕이 왕위에 오른 뒤, 김유신과 선생의 6세손인 용문 등이 더불어
도모하여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다 한다.
후세의 최치원과 곽여 등 여러 현인들이 또한 이 가문에서 나왔다고 전한다.
□ 제7장(第七章) 제8절 신라 立國의 根本은 符都 復建이라!
제8절
신라말경에 국사가 다난하므로 제상공(堤上公) 집안의 증손(曾孫) 문현(文鉉)1) 선생이
선세립언(先世立言)2)의 전통을 계승하여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야인으로 있으면서 강직하여 시사(時事)를 통론(痛論)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때에 효공왕(孝恭王)3)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으므로,
선생이 백 세의 고령으로 국중(國中)에 발연하여 세론(世論)을 환기하여 말하기를,
“신라 입국(立國)의 근본(根本)은 부도(符都)를 복건(復建)하는 데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일에 힘쓸 것이요,
감히 사사로이 영화를 도모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는 입국 당시의 약속이기 때문에 천 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어제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본의를 잊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조선은
곧 사해(四海)의 공도(公都)요
한 지역의 봉국(封國)이 아니며,
단씨(檀氏)의 후예(後裔)는 즉 모든 종족들의 심부름꾼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동해로 피난 와서
방비를 설하고 나라를 세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요,
결코 본의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이 다른 나라와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이에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태워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
이 때에 국론이 크게 바로잡히고 조정(朝廷)이 숙연(肅然)하여,
왕위(王位)를 신라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제 1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하니,
이가 신덕왕(神德王)4)이었다.
3세 경애왕(景哀王)5)이 마침내 근본을 잃고 방자하게 놀다가
몸은 망하고 나라는 패하여 다시 김씨에게 전하고
신라가 마침내 망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6)이었다.
第八節
新羅末傾 國事多難 堤上公家宗嗣文鉉先生
신라말경 국사다난 제상공가종사문현선생
繼承先生立言之傳統 累徵不就
계승선생입언지전통 루징불취
在野剛直 痛論時事 國人畏之
재야강직 통론시사 국인외지
時有孝恭王繼位之爭 先生以百歲高齡 發言於國中 喚起世論曰
시유효공왕계위지쟁 선생이백세고령 발언어국중 환기세론왈
新羅立國之本 在於符都之復建故 爲上者必勵於斯 不敢私謀榮華
신라입국지본 재어부도지복건고 위상자필여어사 불감사모영화
此 立國當時之約而雖隔千年 如在昨日 何忍忘其本義乎
차 입국당시지약이수격천년 여재작일 하인망기본의호
昔世朝鮮卽四海之公都 非一域之封國
석세조선즉사해지공도 비일역지봉국
檀氏之遺裔卽諸族之公僕 非一君之私民
단씨지유예즉제족지공복 비일군지사민
不幸避居東海 設防稱國者 出於不得已 決非本意故
불행피거동해 설방칭국자 출어불득이 결비본의고
國本與他國 懸殊 吾等 當覺醒於斯
국본여타국 현수 오등 당각성어사
一切紛爭 付於火消 回心反省可也云
일체분쟁 부어화소 회심반성가야운
於是 國論大正 朝廷肅然
어시 국론대정 조정숙연
王位返還於新羅始祖赫居世王 第一曾孫之後裔 是爲神德王
왕위반환어신라시조혁거세왕 제일증손지후예 시위신덕왕
三世景哀王 遂忘本肆逸
삼세경애왕 수망본사일
身亡國敗 復傳於金氏而新羅遂亡 是爲敬順王
신망국패 복전어김씨이신라수망 시위경순왕
주석 해설)
1) 문현 : 박제상 선생의 14세손. 신라 제52대 효공왕때 사람이다.
2) 입언 : 의견을 세움
3) 효공왕 : 신라 제52대왕. 재위897-912년. 현강왕의 서자로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 받았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펴 각축전을 벌이던 때로, 907년 견훤에게 일서군 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으나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4) 신덕왕 : 신라 제 53대왕. 재위912-917년 대아찬 예겸의 아들이며, 아달나왕의 원손이자 헌강왕의 사위이다.
5) 경애왕 : 신라 제 55대왕. 재위924-927년 경명왕의 동생이며, 아버지는 신덕왕이다. 영토를 견훤에게 거의 다
빼앗기고, 포석정에서 놀이하다 견훤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견훤의 강요로 자살했다.
6) 경순왕 : 신라 제 56대왕. 재위927-935년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견훤의 힘으로 왕이 되었
으나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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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8절 13.10.22
第八節
新羅末傾 國事多難 堤上公家宗嗣文鉉先生 繼承先生立言之傳統 累徵不就 在野剛直 痛論時事 國人畏之
時有孝恭王繼位之爭 先生以百歲高齡 發言於國中 喚起世論曰 新羅立國之本 在於符都之復建故
爲上者必勵於斯 不敢私謀榮華 此 立國當時之約而雖隔千年 如在昨日 何忍忘其本義乎
昔世朝鮮卽四海之公都 非一域之封國 檀氏之遺裔卽諸族之公僕 非一君之私民 不幸避居東海
設防稱國者 出於不得已 決非本意故 國本與他國 懸殊 吾等 當覺醒於斯 一切紛爭 付於火消
回心反省可也云 於是 國論大正 朝廷肅然 王位返還於新羅始祖赫居世王 第一曾孫之後裔 是爲神德王
三世景哀王 遂忘本肆逸 身亡國敗 復傳於金氏而新羅遂亡 是爲敬順王
제8절
신라 말 국사가 다사다난하였다. 제상공 가문의 종사인 문현선생이
선세 입언의 전통을 계승하여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야인으로 있으면서도
강직하여 당시의 시사를 통렬히 논파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 경외하였다.
그 때에 효공왕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었다.
선생이 백세의 고령 임에도 불구하고, 나라 안에 발언하여 세론을 환기시켰다.
말하기를, “신라가 나라를 세운 근본은 오직 부도의 복건에 있을 뿐이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에 힘쓸 따름이요, 감히 사사로운 영화를 도모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는 나라를 세울 당시의 맹약이니, 비록 천 년이 지났다 하더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이다.
어찌 홀연히 그 본의와 참 뜻을 잊어버린다 말인가.
옛 조선은 곧 사해의 공도(公都)요, 단지 한 지역의 봉함 받은 나라가 아니며,
단씨의 유예는 모든 족속의 공복이요, 단지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불행히 동해로 피난 와서 방책을 짓고 나라를 칭하게 된 것은 부득이 그리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요,
결단코 본의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이 다른 나라와는 현저히 다른 것이니,
우리는 이에 마땅히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 살라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오직 반성하는 것만이 옳을 것이다.”라 하였다.
이에 국론이 크게 바로 잡히고, 조정은 숙연하여
왕위를 신라 시조 혁거세왕 제일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하니, 이가 신덕왕이다.
그 3세 경애왕이 마침내 근본을 잃고 방자하게 놀다가 몸을 망치고 나라는 패하여
다시금 김씨에게 왕위를 전하였다. 하지만 결국 신라는 망하였으니, 이때의 왕이 경순왕이다.
옛날 조선은 사해의 공도요! myh1117 13.10.22
오늘은 이 기록을 남기면서 새삼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 어린 시절, 영문학과를 나와 취직을 하고 밥벌이를 해야할 때 쯤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저는 드디어 오늘 나오는 이 구절을 보게 됩니다. 벌써 한 25년 이나 된 것 같은데요...
그런데 그 날의 충격과 감동은 오늘에도 선하기만 합니다.
한 마디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전율을 느낀 겁니다.
<석세조선은 사해지공도요 비일역지 봉국이며, 단씨지유예는 제족지공복이요 비일군지사민야>라.....
곧, 옛날 조선은 온 세상 사해 공통의 도읍이요 중심이라, 단지 한 지역에 봉함 받은 나라가 아니며,
또 단씨의 남은 후예는 세상 모든 족속의 공적인 일꾼이요, 단지 한 군왕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아! 이 얼마나 간단하고 통쾌하며 웅혼한 기상의 선언입니까?
당시 아직도 제 5공과 6공이 서로를 분명히 구별하지 못하면서, 온 나라가 민주화의 열풍에 휩싸여 있던 그 때!
바깥으로는 20세기 사회주의의 실험이 최종적인 종언을 고하면서도,
새로운 자본주의의 미래를 말하지 못하던 그 때!
세계의 변방에서, 아직 <코리아>란 이름조차 낯설어 하던 그 시절
홀로 공부하면서 보게 된 이 글귀는 한 청년의 가슴을 말할 수 없는 벅참으로 차오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잘하던 영문학 공부를 때려치우고,
아버지한테 가서는 공부를 좀 더 해야 되겠다고 말씀 드렸지요...
아마 그 때 아버지는 제가 영문과나 MBA 쪽으로 진학하려는 줄 아셨던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최근에 경영상 문제되고 있는 효성그룹에 입사가 확정되었었는데,
이것도 동시에 때려치우고는 결국 철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한국철학을 전공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이 글귀가 청춘의 젊은날 가져다 준 흥분은 지금도 다만 생생하기만 합니다.
대한민국의 앞 길과 미래는 이 글귀 하나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라고, 저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류를 말하고, 경제가 어떻고, 나라 살림이나 한국적 특수성 등등이 무엇을 말한다 하더라도
대한민국과 한민족은 이미 선세 이래로 부도복본과 사해공도 그리고 제족공복의 운명을 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통일과 민족 합일 그리고 사해통화의 길과 그 이념
이는 천년이 흘러도 변해서는 안 될 불변의 진리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제7장(第七章) 제9절 고려 태조 왕건이 符都 일을 상세히 묻다
제9절
때에 왕자 궁예1)가 처음으로 입국의 근본을 듣고 원통해 하고 슬퍼하였다.
강토회복의 뜻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삭북(朔北)2)으로 곧장 향하다가
철원에 이르러 주둔하고, 부장 왕건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들을 설득하게 하니,
저들이 고국의 재건을 원하므로 궁예가 그를 허락하고 곧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였다.
10년 사이에 궁예가 마침내 교만하여져서 태봉국이라 개칭하고 본뜻을 잃었다.
인심이 왕건에게 돌아가므로,
왕건이 마침내 왕이 되어 고려라 칭하고,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겨 강토를 회복하는 일을 선포하였다.(開封)
이 때에 신라는 이미 쇠하고 또 강토 회복의 대의를 막을 수가 없으므로,
경순왕(敬順王)이 마침내 나라를 내놓았다.
왕건 태조가 제상공(堤上公) 종가(宗家)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도(符都)의 일을 상세하게 묻고
그 차가(次家)의 후예 수헌3) 선생 부자를 불렀으나
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第九節
時 王子弓裔 始聞立國之本 慷慨懷復疆之志 率軍直向朔北
시 왕자궁예 시문입국지본 강개회복강지지 솔군직향삭북
至於鐵圓而屯 使副將王建 說高句麗遺民 彼等 願再建故國 故 弓裔許之 乃稱後高句麗
지어철원이둔 사부장왕건 세고구려유민 피등 원재건고국 고 궁예허지 내칭후고구려
十年之間 弓裔遂驕 改稱泰封國 忘失本志
십년지간 궁예수교 개칭태봉국 망실본지
人心 歸於王建故 王建遂爲王 稱高麗移都於松嶽 宣布復疆之業
인심 귀어왕건고 왕건수위왕 칭고려이도어송악 선포복강지업
於是 新羅已衰 又不能拒復疆之大義 敬順王遂讓國
어시 신라이쇠 우불능거복강지대의 경순왕수양국
王建太祖遣使於堤上公宗嗣之家 詳審符都之事
왕건태조견사어제상공종사지가 상심부도지사
徵其次家之裔睡軒先生父子 皆辭而不就云
징기차가지예수헌선생부자 개사이불취운
주석 해설)
1) 궁예 : ?~918. 태봉궁의 임금. 승려로서 이름은 선종(善宗)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궁예의 선조는 평양사람(石門)으로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며, 그의 아버지는 강직
하게 술가(術家)의 말을 따랐는데 어머니의 성을 따서 궁씨라고 했다고 한다.
2) 삭북 : 북방
3) 수헌 : 904~?. 이름은 빈(濱)이며 좌복사술홍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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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9절 13.10.24
第九節
時 王子弓裔 始聞立國之本 慷慨懷復疆之志 率軍直向朔北 至於鐵圓而屯 使副將王建 說高句麗遺民
彼等 願再建故國 故 弓裔許之 乃稱後高句麗 十年之間 弓裔遂驕 改稱泰封國 忘失本志 人心
歸於王建故 王建遂爲王 稱高麗移都於松嶽 宣布復疆之業 於是 新羅已衰 又不能拒復疆之大義
敬順王遂讓國 王建太祖遣使於堤上公宗嗣之家 詳審符都之事 徵其次家之裔睡軒先生父子 皆辭而不就云
제9절
이러한 시대에 왕자 궁예가 처음으로 입국의 근본을 전해 듣고,
비분강개하여 강역을 회복하겠다는 뜻을 품어,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삭북으로 향하였다.
철원에 이르러 주둔하면서, 부장인 왕건으로 하여금 고구려의 유민들을 설득케 하였는데,
저들이 고국 즉 예전의 나라를 재건하기를 원하므로, 이에 궁예가 허락하여 곧 후고구려라 칭하였다.
십년이 흐르는 동안 궁예가 마침내 교만해져서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개칭하고, 그 본뜻을 잃어버렸다.
이에 인심이 왕건에게 귀의하게 되고, 마침내 왕건이 왕이 되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 칭하며 수도를 송악으로 옮기고, 강역 회복의 사업을 세상에 선포하였다.
이때에 신라는 이미 쇠락하였으며, 또 강역 회복의 대의에 대하여 더 이상 항거할 수가 없었으니,
마침내 경순왕이 나라를 선양하게 되었다.
왕건태조는 제상공의 종가 집에 사신을 보내어 부도의 일을 상세하게 묻고 들었으며,
그 차가의 후예인 수헌선생 부자를 불러 초빙코자 하였으나, 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전한다.
□ 제7장(第七章) 제10절 강감찬 장군이 寧海를 방문, 조언을 구하다
제10절
고려 현종(顯宗)1)때에 거란의 화가 계속하여 일어나니,
왕이 강감찬2)에게 여러 차례 영해(寧海)를 방문하게 하여
매우 부지런히 조언을 구하고 문중을 두루 구제하며,
차가(次家)의 후예(後裔) 청허(淸虛)3) 선생을 불러
은혜로 돌보아주기(恩顧)를 심중하게 하였다.
또
혁거세(赫居世) 왕릉(王陵)을 다시 고치고
탑을 세워 공양하니,
그 탑문(搭文)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영원한 태평과 온 국민의 평안을 위하여 받들어
이 탑을 건조하고 영원토록 고양할 것입니다.“
운운하였다.
강감찬공이
자신의 딸에게 종사의 수건과 빗(巾櫛)을 받들게 하여
차가 후예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第十節
麗朝顯宗時契丹之禍繼作
려조현종시계단지화계작
王使姜邯瓚 累訪寧海求言甚勤 周恤一門
왕사강감찬 누방녕해구언심근 주휼일문
徵次家裔淸虛先生 恩顧甚重
징차가예청허선생 은고심중
又修赫居世王陵 建塔供養 其搭文曰
우수혁거세왕릉 건탑공양 기탑문왈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云
봉위방가영태 하이상안 경조차탑 영충공양 운
姜邯瓚公 以其女欲奉宗嗣之巾櫛 妻之於次家之裔云
강감찬공 이기녀욕봉종사지건즐 처지어차가지예운
주석 해설)
1) 현종 : 991~1031. 고려 제8대왕.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 욱의 아들이다. 강조의 옹립에 의하여 즉위하자 목
종의 살역(殺逆)을 구실로 거란 성왕이 쳐들어 왔다.
2) 강감찬 : 948~1031. 고려의 명장. 1048년 거란의 소배압의 군사를 귀주에서 크게 이겨, 살아돌아간 적군이 불과
수천이었다.
3) 영해 : 한반도 경북 영덕을 말하는가? 중국 고지도에 나오는 임해현 영해를 말하는가? 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
다. 구삼국사가 등장할때가 멀지 않았으니...
4) 청허 : 고려 광종 3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광염이다.
5) 건즐 : 수건과 빗. 머리를 빗고 낯을 씻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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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10절 13.10.24
第十節
麗朝顯宗時契丹之禍繼作 王使姜邯瓚 累訪寧海求言甚勤 周恤一門 徵次家裔淸虛先生 恩顧甚重
又修赫居世王陵 建塔供養 其搭文曰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云 姜邯瓚公
以其女欲奉宗嗣之巾櫛 妻之於次家之裔云
제10절
고려 현종의 시절에 거란의 화가 계속되어 일어났다.
이에 왕이 강감찬으로 하여금 여러 차례 영해를 방문하게 하여 가르침을 구하기를 열심히 하였다.
또한 그 가문을 두루 구제하고 차가의 후예인 청허선생을 초빙하여,
그 은혜를 돌아보는 데 심중하게 하였다. 더하여 혁거세의 왕릉을 보수하고 탑을 세워 공양하였다.
그 탑문에 이르기를, “나라와 집안의 영원한 태평과 멀고 가까운 만백성이
언제나 안녕하기를 기원하면서, 공경을 다하여 이 탑을 건조하고 영원토록 공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강감찬공이 그 딸로 하여금, 종사의 집을 받들고 아내의 도리를 다하기를 원하여,
차가의 후예에게 시집 가 아내가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박씨세가의 과거가 역사와 함께 나오네요.... myh1117 13.10.24
오늘 이 부분들은 이미 역사 속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건과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크게 새로울 것은 없고, 다만 제상공 박씨 문중의 일이 나라의 역사와 더불어 논의되고 있습니다.
대개 나라와 집안과 개인과 국가의 여러 관계들을 말할 때,
어느 것을 더 중시하느냐 하는 문제는 개인에게 있어서도 상당히 어려운 선택의 문제가 됩니다.
곧 연기법적으로 말하여, "내가 중하냐, 나라가 중하냐?" 아니면,
"나와 천지 가운데 무엇이 더...?"와 같은 문제지요..
이걸 젊은 사람들과 말하게 된다면, 쉽게 더 큰 천지나 국가를 말하게 될 수도 있고,
또 성향에 따라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결론 내릴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어렵고 오랜 사유를 거친다 하더라도 쉽게 결정 내리기는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젊은 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하던 시절이 있었고,
또 천지가 나를 부른다면 하던 기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지금은 .... 글쎄요....아예 이런 질문을 안 받는 것이 나을 것 같네요....
어쨌든 옛날 조선조 에서는 집안을 위해 나라를 버린 여러 사건들이 기록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를 일러 "화가위국"이라 하던가요...
그러나 대아와 소아의 문제는 여전히 인생 전체를 걸쳐 늘 우리에게 질문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속에서 답해본다고 몸부림치다, 이 생을 떠나게 되겠지요...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도를 들을 수 있어야 할텐데...
민족이 만나고, 진리가 중요한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 제7장(第七章) 제11절 거무역리(居無役里)
제11절
고려 정종(靖宗)1)때,
왕이 공(公)의 가문의 부흥을 위하여
후예(後裔) 명천공(命天公)2)을 다시 영해군(寧海君)에 봉(封)하고,
그 후손을 불러 수대 사이에 군(君)을 봉(封)하여 격려하였다.
충렬왕(忠烈王)3)때에 몽고의 난이 일어나니,
왕이 영해로 사신을 보내 자연의 이치를 상세하게 묻고,
공의 문중을 두루 구제하며
또 그 마을의 부역을 면하여 주니, 거무역리(居無役里)라 하였다.
차가(次家)의 후손 세통공(世通公)4)의 조손(祖孫) 3대(代)를 불러
계속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나라의 편안(便安)하고 태평(太平)함을 도모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第十一節
麗朝靖宗時 王爲公家復興 以此家裔 命天公再封寧海君
려조정종시 왕위공가복흥 이차가예 명천공재봉녕해군
徵其裔孫 數代之間連次封君以勵之
징기예손 수대지간연차봉군이려지
忠烈王時 有蒙古之亂 王 遣使寧海 詳審理勢
충열왕시 유몽고지란 왕 견사녕해 상심리세
周恤公家一門而且免役其鄕 謂之居無役里
주휼공가일문이차면역기향 위지거무역리
徵次家裔孫世通公祖孫三代
징차가예손세통공조손삼대
繼任侍中而謀邦家之安泰云
계임시중이모방가지안태운
주석 해설)
1) 정종 : 1018~1046. 고려 제10대왕. 1037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이후 북방 경비에 전력을 기울여 1044년 천리장
성을 완성하였다. 10416년 장자상속법과 직서의 구별을 정했다.
2) 명천공 : 박제상의 25대손. 고려조에 전법관서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예원군에 봉해졌다.
3) 충렬왕 : 1236~1308. 고려 25대왕. 일명 일수왕. 비는 원나라의 세조 흘필열의 딸 장목왕후다. 1274년 여원연합
군을 편성하여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을 파견했으나 태풍으로 패퇴했다.
4) 세통공 : 박제상의 후손. 충렬왕 3년 1277년에 문하시중평장사가 되었으며, 거주하던 마을에 부역을 없애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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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11절 13.10.28
第十一節
麗朝靖宗時 王爲公家復興 以此家裔 命天公再封寧海君 徵其裔孫 數代之間連次封君以勵之 忠烈王時
有蒙古之亂 王 遣使寧海 詳審理勢 周恤公家一門而且免役其鄕 謂之居無役里
徵次家裔孫世通公祖孫三代 繼任侍中而謀邦家之安泰云
제11절
고려 정종 때, 왕이 공의 집안을 부흥시키고자 이 집안의 후예인 명천공을 다시금 영해군에 봉하였다.
또 그 후예와 후손들을 차례로 불러 수대 동안 군(君)으로 봉하여 격려하였다.
충렬왕 때 몽고의 변란이 있었다. 왕이 영해에 사신을 파견하여
이세(理勢)를 자세히 묻고 공의 집안과 문중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그 고을의 부역을 면제시키니, 이르기를 거무역(居無役)리라 하였다.
또 차가의 예손인 세통공의 조손 삼대를 초빙하여,
시중(侍中)의 일을 계속 맡게 하면서 나라와 집안의 안태를 도모하였다고 전한다.
□ 제7장(第七章) 제12절 선류(仙流) 무학대사
12절
고려말에 유(儒), 불(佛), 무(武) 세파가 권력을 쟁탈하므로
국세가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나
거의 입국(立國)의 근본(根本)을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이 영해(寧海)를 보니 복서선술(卜筮仙術)1)의 집이었다.
때에 이태조(李太祖)2)가 명을 받들어 장마를 무릅쓰고 이미 대군을 동원하였으므로
선비 김생3)이 심히 걱정하고 곧 영해(寧海)에 조언을 구하였다.
김생이 조언을 얻어 태조의 진중으로 곧바로 달려가서 회군할 것을 몰래 의논하니,
태조(太祖)가 전날 밤 꿈에 금척(金尺)을 얻었다4)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일설에는 중이 동해에서 달려와서 회군할 것을 아뢰었다고도 하니,
이 중이 혹 무학(無學)의 무리가 아닐까.
동해에서 달려왔다면 영해(寧海)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무학(無學)5)이 본래 불도(佛道)가 아니요, 즉 선류(仙流)며
언제나 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다고도 하였다.
김생(金生)의 일은 사록(史錄)6)에 보이니
태조(太祖) 회군의 일은 두 사람이 여쭌 것인가?
第十二節
麗末 儒佛武三派爭權 國勢將危 殆忘立國之本
려말 유불무삼파쟁권 국세장위 태망입국지본
世人目寧海爲卜筮仙述之家
세인목녕해위복서선술지가
時 李太祖奉命 犯潦已發大軍 儒者金生甚憂乃求言於寧海
시 이태조봉명 범료이발대군 유자김생심우내구언어녕해
金生得言直走太祖陣中 密禀回軍之事
김생득언직주태조진중 밀품회군지사
太祖前夜夢得金尺云 一說則有僧自東海走來
태조전야몽득김척운 일설칙유승자동해주래
稟回軍事云 此僧或非無學之徒耶
품회군사운 차승혹비무학지도야
自東海走來則如有關於寧海 而無學者本非佛徒卽仙流 而常伴一人云
자동해주래칙여유관어녕해 이무학자본비불도즉선류 이상반일인운
金生之事則見於史錄之上 太祖回軍事 有二人之稟達歟
김생지사칙견어사록지상 태조회군사 유이인지품달여
주석 해설)
* 무학대사 : 고려말 행촌 이암 선생도 1335년 양주 천보산 태소암에서 소전도인(素佺道人)에게 비결을 얻어 단군
세기와 태백진훈을 전하였고 무학대사도 양주 천보산 자락 회암사에 기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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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12절 13.10.28
第十二節
麗末 儒佛武三派爭權 國勢將危 殆忘立國之本 世人目寧海爲卜筮仙述(術)之家 時 李太祖奉命
犯潦已發大軍 儒者金生甚憂乃求言於寧海 金生得言直走太祖陣中 密禀回軍之事 太祖前夜夢得金尺云
一說則有僧自東海走來 稟回軍事云 此僧或非無學之徒耶 自東海走來則如有關於寧海
而無學者本非佛徒卽仙流 而常伴一人云 金生之事則見於史錄之上 太祖回軍事 有二人之稟達歟
제12절
고려 말, 유교와 불교 그리고 무(武)의 세 파가 권력을 다툼으로 인하여
국세가 장차 위태로워지고, 나라를 세운 근본 또한 잊혀져갔다. 세상 사람들이 영해를 바라보니,
이는 어느새 점을 치는 복서와 선도를 닦는 선술의 집이 되어 있었다.
이 때, 이태조가 명을 받들어 장마를 무시한 채 대군을 이미 일으키고 있었다.
유학자인 김생이 심히 우려하며 영해에 조언을 구하였는데,
김생은 조언을 얻은 후 곧바로 태조의 진중으로 달려갔다. 드디어 회군의 일을 은밀히 품의하니,
태조는 지난 밤 꿈에 금척을 얻은 일을 말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한 스님이 있어 동해로부터 달려와 회군의 일을 품의하였다고도 한다.
이 스님이 혹 무학대사의 도배는 아닐까 한다.
동해로부터 달려왔다고 한 즉, 혹 영해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무학대사는 본래 불도가 아니요 선가의 부류이며, 항상 한 사람을 동반하여 다녔다고 전한다.
김생의 일은 곧 역사기록 상에 보이는 것이니,
태조 회군의 일이 두 사람에 의해 품의되고 이루어진 것이란 말인가.
고려와 조선, 그 시대적 변화와 함께... myh1117 13.10.28
고려 몽고의 변란이 있었다 하네요...그리고 이어지는 고려말의 아픔이 간략하게 서술되고...
드디어 태조 이성계의 거병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성계가 금척의 꿈을 꾸었다는 것은 여기에 처음 기록되고 있지요...
금척과 만파식적, 도량형이기도 하고, 일종의 세상살이의 기준이나 준칙 정도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꿈에 이성계가 불타는 집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인데...
어쨌든 이 부분을 기술하는 청한자 선생의 글 수준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에 김생이란 사람은 <금오신화>에서도 비슷한 이름으로 거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마치 한바탕 꿈과 같은 인생을 김시습 선생은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무학대사가 원래 선가의 사람이었다는 증언도 새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원래가 유불선이 한가족이라!
이 땅, 한민족의 사상세계에서는 원래가 삼교회통의 오래된 역사와 사상적 특징이 있어 왔지요....
그런데 오늘 이 대목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어느덧 나라를 세운 근본은 잊혀지고,
영해 문중의 세가 또한 점복과 선술의 집이 되어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결국 이치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재세이화의 뜻이 변질되었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또 한님과 한웅, 단군의 사상을 공부해 오면서 늘 가슴 아팠던 대목이 이것이기도 합니다.
천하의 올바름으로 나라 세움의 근본을 삼았던 한민족의 활달성과 그 진리에의 정당성이
어느 날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인데요,
이 이후 조선 왕조의 유교적 사상세계가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는지는 이미 다 알고 계실 터이고....
결국은 권력과 재물 등등의 현실적 수단이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표보다
더 절실한 시대로 넘어오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우리 사는 인생, 이 자본주의의 잔인함과 참혹함도 어느새 일상이 되어 버렸고,
올바름과 정당함 그리고 하늘의 뜻과 사람의 길, 어머니 대지의 너그러움 등등
이런 많은 가치들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부도복본이 꿈꾸는 인간의 세상은 또 다시 저 먼 유토피아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족이 하나되고,
한민족의 아름다운 마음이 세상 모든 족속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그 날을 꿈꾸어 보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작업만은 아닐 것입니다.
□ 제7장(第七章) 제13절 세종대왕이 영해 가문을 가까이 두다
제13절
본조(本朝, 조선조),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서는
은근히 영해(寧海)를 생각하여 공(公)의 문중(門中)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혁거세왕(赫居世王) 능묘를 세우고,
곧 공(公)의 종가(宗家)와 차가(次家) 두 집에 명하여
서울 성균관 옆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로로 편전에 들어 왕에게 알현하도록 명하여
은혜로 보살펴 주기를 심중(甚重)하게 하였다.
차가(次家)의 후예(後裔) 창령공(昌齡公)1) 부자를 불러 등용(登用)하였다.
때에 나는 이웃에 있어 종가(宗家)의 후손의 가문에서 수업하였다.
第十三節
本朝世宗大王登位 甚慇懃於寧海 周恤公家一門
본조세종대왕등위 심은근어녕해 주휼공가일문
又建赫居世王陵廟 乃命公之宗次二家 移居於京師泮宮之隣
우건혁거세왕릉묘 내명공지종차이가 이거어경사반궁지린
命長老入侍便殿恩顧甚重
명장로입시편전은고심중
徵次家裔昌齡公父子而登用
징차가예창령공부자이등용
時余在隣受業于宗嗣之門
시여재린수업우종사지문
주석 해설)
1) 창령공 : 1377~1449. 벼슬이 평양서윤(平壤庶尹) 이었다.
* 세종 :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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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13절 13.10.29
第十三節
本朝世宗大王登位 甚慇懃於寧海 周恤公家一門 又建赫居世王陵廟 乃命公之宗次二家 移居於京師泮宮之隣
命長老入侍便殿恩顧甚重 徵次家裔昌齡公父子而登用 時余在隣受業于宗嗣之門
제13절
본 조, 세종대왕께서 왕위에 오른 뒤로,
왕은 영해를 매우 은근히 생각하여, 공의 집안과 그 문중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혁거세왕의 능묘를 세우고 공의 집 종가와 차가 두 집에 명하여,
서울로 이주하여 반궁, 즉 국학대학인 오늘의 성균관 옆으로 와 살게 하였다.
그리고 장로로서 편전에 입시하도록 명하여
그 은고를 심중하게 하였으며, 차가의 후예인 창령공 부자를 불러 등용하였다.
때에 나는 그 이웃에 있어서 종사의 가문에서 수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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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지 별책, 징심록추기 제7장 14절 13.10.29
第十四節
當魯山朝乙亥遜位之日 朴氏大小家遂離京四散 次家諸人入於金化 是時 雲窩孝孫公 受澄心錄於宗家
倉皇之中奉持入隱於金化 時余同蹤故始得奉讀 後再傳於次家逋臣公家 公之子薰氏奉持入隱於文川雲林山中
제14절
노산조(단종) 을해년 손위의 날을 당하여,
박씨의 큰 집 작은 집 등, 대소가가 마침내 서울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차가의 여러 사람들은 김화로 들어갔다.
이 때 운와 효손공은 종가에서 <징심록>을 받아,
창황한 가운데 이를 받들어 휴대하고 김화로 숨어들었다.
이때에 나도 같이 따라가게 되어 처음으로 이를 읽어보게 되었다.
후에 이는 다시금 차가 포신공의 집으로 전해지니,
공의 아들 박훈씨가 이를 가지고 문천 운림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세종대왕과 세조, 계유정난과 노산조의 을해손위 myh1117 13.10.29
김시습 선생이 살았던 조선초, 정국의 흐름과 철학을 더불어 말하기에는 상당히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영해 박씨 문중의 철학과 학문 및 그 가풍을 매우 높이 받들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왕들의 허망함과 패륜 그리고 풍비박산 하는 민족의 과거 역사가 함께 오버랩되고 있습니다.
세조로 말하자면 계유정난의 주역이요, 조카인 단종을 영월에서 결국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뒤이어 세조는 후대의 역사가들과 한국문화를 공부하고자 하는 후학들에게 말 할 수 없는 짐을 떠 넘기게 됩니다.
바로 금서와 수서령이며, 여기에 포함된 100여 종의 서적 목록이
바로 한국문화와 역사와 철학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할 그런 사서들이 됩니다.
조대기나 일통지, 대변설 같은 것이며, 삼성기와 고조선비사 같은 책들이 이 때의 금서로 수서목록 속에 포함되어,
이들은 더 이상 사처에 수장하여서는 안 된다라는 유시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때가 세조 2년 5월 조에 해당하는데,
최근 <관상>이란 영화에서 나온 당시적 상황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이후로 성종 때의 경국대전과 연이은 연산군, 중종반정,
그리고 여기에 개입하는 사림세력들의 권력다툼 등등
이제 시대는 더 이상 절의와 충정을 중시하지 않는 시대로 접어듭니다.
자신들의 권력과 야욕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암흑의 시대,
패악의 붕당정치로 치닫는 것이지요...
오늘의 한국사회 여야가 연출하는 정쟁을 바라보면서 새삼 이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은 또 무슨 일일까요?
아마도 그리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김화와 문천 쪽으로 뿔뿔이 지사와 인물들은 흩어져 갑니다.
두문동 72현이니, 생육신과 사륙신이니 하는 것들은 다만 역사에 기록된 이야기일 뿐
그 시대를 살아간 지식인들의 삶이야 그 고단함과 울분을 어찌 필설로 다 말할 것이겠습니까?
이 모두가 결국 부도복본의 근본 뜻이 훼손되고,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바른 정치가 사라진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