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3_4 : 남해 양아리 각석]
우리의 고대의 암각화
* 남해도(南海島) 각석(刻石) - 전(傳)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 <수암11> 2006.11.16
2005/05/27 13:11 https://sooam11.tistory.com/10332611
경남(慶南) 남해군(南海郡) 상주면(尙州面) 상주리(尙州里)
즉, 남해도(南海島) 상주해수욕장(尙州海水浴場)이 내려다 보이는 금산(錦山, 701m) 기슭에는
옛부터 전해지는 고문자(古文字) 금석문(金石文)이 있다.
이곳 금산에는 쌍홍문(雙虹門)이라는 기암괴석(奇巖怪石)으로 이루어진 석문(石門)을 앞에 두고
남해(南海)를 바라보면서 지금으로 부터 2200년 전(前)의 서불(徐市 또는 徐福)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금산사(錦山寺)가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산사 옆 부소암 아래에는 7m x 4m의 평평한 바위가 놓여져있고,
그 바위 위에 1m x 50Cm의 넓이로 글자와도 비슷한 모양들이 새겨져있다.
일반적으로 암각화(岩刻畵)는 절벽이거나 세워진 바위 면에 있는데, 이것은 얼핏보아서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산비탈에 박혀있는 나즈막하고 아주 평범한 바위 상부(上部)에 있는 점이 특이하다.
마치 종이에 글을 쓴 것처럼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상형문자(象形文字)가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현재에는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암각화(岩刻畵)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이곳 남해도 인근에는 서불(徐市)에 대한 전설(傳說)이 이곳저곳에 전해져 오기도 하는데,
진시황(秦始皇) 정(政)이 보낸 사신(使臣) 서불(徐市)이 이 곳에서 불노초(不老草)를 찾으면서
새기어 논 글자라 하여, 과거에는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
또는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意味)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이라 불리어 왔다. (1)
이 암각(岩刻)에 대한 기록(記錄)은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의 암벽(岩壁)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다."
"남해현(南海縣) 낭하리(郎河里) 계곡에 있는 바위 위에 신시고각(神市古刻)이 있는데,
그 글은 환웅(桓雄)이 사냥을 나가서 삼신(三神)에게 제사(祭祀)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신지(神誌)가 새겨진 옛비석을 찾아 . . .
즉 낭하리(郎河里)의 암각(岩刻)이 그것(神誌)의 실제 흔적(痕迹)인 것이다."(2) 등으로,
과거부터 여러 문헌(文獻)에서 보이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이맥(李陌)이 1520년경에 편찬(編纂)한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의하면,
"소문을 듣건데, 남해도(南海島) 낭하리(郎河里)의 계곡과
경박호(鏡珀湖) 선춘령(先春嶺)과 오소리(烏蘇里) 바깥의 돌 사이에서 언젠가 조각(彫刻)을 발견하였는데,
범자(梵字)도 아니고 전자(篆字)도 아니어서 사람들이 쉽사리 해독(解讀)하지 못한다."(3)
또한 "일본(日本)의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다고 한다. . .
서복(徐福)은 일명 서불(徐市)로서, 불(市)과 복(福)의 음(音)을 같이 혼용(混用)하고 있다."(4)
서불(徐市) 또는 서복(徐福)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때, 낭야(琅邪) 사람으로
연단술(煉丹術)로 불로장생(不老長生)하겠다는 뜻을 굳힌 방사(方士)의 한 사람이다.
진시황(秦始皇) 정(政, cheng)이 B.C. 221년(始皇 26年)에 6국을 정복(征服)하여 대륙(大陸)을 통일(統一)한 뒤,
천하(天下)의 부호(富豪) 120000호(戶)를 함양(咸陽, xianyang, 현재의 西安, xian)으로 이주(移住)시켰으며,
죄수(罪囚, 刑徒) 700000명을 동원하여 함양(咸陽) 북판산(北阪山)에 아방궁(阿房宮)을 짓게 하였다.
3년후 B.C. 218년에 천하(天下)의 명산(名山)마다 자신의 송덕비(頌德碑)를 세우러 다니던 진시황(秦始皇)이
낭야(琅邪)에 왔을 때,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린다.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神仙)이 사시는데,
어린 소년(少年), 소녀(少女)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려 합니다." 시황(始皇)은 크게 기뻐하며
총각 처녀 3000명을 가려 뽑아 그에게 주고 바다로 나아가서 신선(神仙)을 찾아오게 하였다 한다.(5)
그러나 태백일사(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에서는 약간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서복(徐福)에 이르러 한(韓)나라가 망하게 되자, 그도 역시 회사(淮泗)지방 출신이라
평소에 진(秦)나라를 거역(拒逆)할 뜻을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바다로 들어가 신선(神仙)을 구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도주(逃走)를 계속(繼續)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6)
여하튼 이때 서불(徐市)은 동야현(東冶縣)의 해상(海上)에서 곧 나패(那覇)에 도착하고,
다네시마(種島)를 거쳐, 세도나이까이(瀨戶內海)를 따라 처음으로 기이(紀伊)에 이르렀다. 이곳 기이(紀伊)에는
서불(徐市)이 도착기념(到着紀念)으로 남겨논 조각(彫刻)이 있으며,
이국(伊國, 伊勢)의 신궁(神宮)에는 서불(徐市)의 무덤(墓)과 사당(祠堂)이 있었다고 한다.(7)
즉 이러한 기록(記錄)에서는 서불(徐市)이 지금의 남해도(南海島)에 도착했었다고 명시(明示)되지 않았으나,
남해도(南海島) 내의 여러 곳에 서불(徐市)의 전설(傳說)이 남아있어, 서불이 분명 이곳을 거쳐 갔으리라 생각된다.
오히려 기록으로 보기에는 여기의 암각(岩刻)을 주로 신시시대(神市時代)의 전각(篆刻)으로 여기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서불(徐市)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지 않나 생각된다.
조선(朝鮮)시대의 모든 비석(碑石)의 글을 종합(綜合)하여 놓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攬, 朝鮮總督府 發刊)에도 이 암각(岩刻)은 고문자(古文字)의 하나로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서시과차(徐市過此)'라는 뜻을 지닌 고대문자(古代文字)로 생각하였다.
19세기 학자(學者) 오경석은 이것을 초기(初期) 한자(漢字)인 상형문자(象形文字)로 보아
'서시기배(徐市起拜)' 즉 서시(徐市)가 일어나서
솟아 오르는 태양(太陽)에 예(禮)를 드렸다는 말을 새긴 것으로 보았고,
그후 정인보는 그의 저서(著書)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에서 이 암각(岩刻)을
'임금(王) 혹은 장상대인(長上大人)이 수렵(狩獵)을 나와서 산짐승과 날짐승을 잡으며 건너와
이곳에 기(旗)를 꽂았다'는 내용의 고문(古文)으로 해석하였다.(8)
기록(記錄)으로 알 수 있는 고대(古代) 글자로서는
신시(神市)시대에는 산목(算木) 또는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만든 녹서(鹿書), 자부(紫府)의 우서(雨書),
치우(蚩尤)의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 등이 상고시대(上古時代) 신지(神誌)들의 업적(業績)이었으며,
복희(伏羲)의 용서(龍書)와 단군(檀君)시대에 삼랑을(三郞乙) 보륵(普勒)이 만든
가림토(加臨土 또는 加臨多)의 신전(神篆)들이 백산(白山), 흑수(黑水), 청구(靑邱), 구려(九黎)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부여(夫餘)에서는 서산(書算)이나 부여인(夫餘人 또는 漢水人이라고도 함) 왕문(王文)이
전문(篆文)을 축약(縮約)한 부예(符隸 또는 吏讀文)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발해(渤海)에서는 현재 러시아어(russian)와 비슷하게 타지역(他地域) 글자를 뒤집어 사용하는
독특(獨特)한 반자(反字)를 고집(固執)하였다. 그리고 왜(倭)와 진(辰) 그리고 나머지 국가들은
횡서(橫書), 결승(結繩), 계목('金+契'木)을 혼용(混用)하였으며,
고려(高麗 즉 高句麗)는 영법(潁法)을 모사(模寫)하였다고 한다.
진(秦, chhin, B.C. 221~B.C. 207)나라 때의 정막(程邈)은 숙신(肅愼)에게 사신(使臣)으로 가서 얻은
왕문(王文)의 예법(隸法)과 한수(漢水)에 가서 얻은 것을 약간 고쳐 팔분(八分, 八分體)을 만들었다.
그리고 진(晋, chin, A.D. 265~420)나라 때의 왕문(王文)의 후손(後孫)인 왕차중(王次仲)은 해서(楷書)를 만들었다.(9)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진(秦)나라 이후에 만들어진
지금의 한자(漢字, chinese)가 원래 동이족(東夷族)이 사용한 글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한글(korean)을 비롯한 일본어(japanese) 또한 이렇게
과거부터 계승(繼承)된 언어(言語)를 각자 개발(開發)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열거(列擧)한 글자들 가운데, 사슴 발자국을 보고 만들었다는 녹서(鹿書)는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문자(古代文字) 가운데 마야(maya)의 상형문자(象形文字)와 매우 비슷하여
이 녹서(鹿書)의 흔적(痕迹)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야에서도 상형문자를 읽어 나갈 때,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읽어 나가며,
숫자를 계산하는 방법도 초기(初期) 마야에서는 작대기(_)와 점(.)으로 이루어진 상형문자(象形文字)로
가림토정음(加臨土正音)에서 보이는 형태와 마찬가지이다.
또한 숫자를 계산할 때,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 올리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비록 후기에는 그림이 보다 화려해지고 작대기와 점이 옆으로 세워지지만, 그 원래의 기본적인 방법에는 변함이 없다.(10)
그리고 우서(雨書)는 작대기만으로 이루어진 'ㄱ'자형(字形)으로 여겨지는데,
태백일사(太白逸史)에 소개된 유기(留記)에서는
이 자형(字形)을 태백산(太白山)의 푸른 바위 절벽(絶壁)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한다.(11)
화서(花書) 또는 투전목(鬪佃目)은 지금의 초서(草書)와 비슷한 형태로 종이로 만든 쪽의 일종이라고 하며,
용서(龍書)는 복희(伏羲)의 64괘(卦)에서 볼 수 있는 역문자(易文字)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12)
여기서도 효(爻)를 구성할 때, 아래에서부터 쌓아올린다.
그리고 가림토(加臨土) 신전(神篆)은
지금까지의 여러 글자의 모양과 방법을 추려서 만들었으며, 한글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왕문(王文)이 만든 부예(符隸)는 이두문(吏讀文)으로서,
진(秦) 나라에서부터 정립(定立)되기 시작한 지금의 한자(漢字)에 상당한 역할(役割)을 하였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일본열도(日本列島)에서 발견된 20여가지의 고대문자(古代文字)들이
이와 비슷하거나 해당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중 대마문자(對馬文字)와 도목문자(桃木文字)는
여기 남해도(南海島)에서 발견된 모양과 상당히 유사(類似)하다. 주로 나뭇가지나 뿌리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해안(南海岸) 일대의 해양족(海洋族)이 사용하였던 글자로 알려져 있다.(13)
대부분의 고문자(古文字)들도 대부분 가로나 세로로 나열(羅列)되거나, 줄칸을 그어서
그 안에 채워 넣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남해도(南海島)에서 볼 수 있는 형식과는 구별(區別)이 된다.
특히 기념(記念)으로 새겨놓는 암각(岩刻)은 주로 암벽(岩壁)이나 비석(碑石)일 경우가 많다.
암각(岩刻) 비석(碑石)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암(李'品/山', A.D. 1296~1364)이 편찬(編纂)한 단군세기(檀君世紀)에 나온다.
B.C. 1833년 여름 4월, "황제(皇帝)께서 나라를 순시(巡視)하시다가 요하(遼河)의 왼쪽 강가에 이르러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를 세워 역대 제왕(帝王)의 이름과 호(號)를 새기어 이를 전하게 하셨다.
이것이야 말로 가장 뛰어난 금석문(金石文)이다." (14)
B.C. 1634년, "황제께서 태백산(太白山)에 올라가서, 비석(碑石)을 세우고
여러 성인(聖人)들과 임금들의 공덕(功德)을 새겼다." (15) 이 기록에서도 기념비(記念碑)는
비석(碑石)을 만들어 세우는 것이며, 다른 기록에서도 최소한 절벽(絶壁)에 암각(岩刻)하여 남기고 있다.
이 암각(岩刻)이 새겨진 위치(位置)가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는 절벽(絶壁)이 아니고,
금산(錦山)에서 내리뻗은 능선(稜線)에서 돌출(突出)되어 드러난 바위 위라는 점에서
오히려 풍수(風水)에서 말하는 기혈(氣穴)과 관계있는 장소(場所)이자,
하늘을 지향(志向)하여 만들어진 유적(遺蹟)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상황은 제천(祭天)이나 제의(祭儀)의 성격을 갖고있는 경북(慶北) 안동시(安東市) 임동면(臨東面)
수곡동(水谷洞) 한들바위(또는 신선바위)의 암각화(岩刻畵)들과 성격상 상통(相通)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을 종합(綜合)하여 보면, 여기 남해도(南海島)에 있는 암각(岩刻)은 형태(形態)가 섞여져 있으며,
그렇지만 각각의 형태들이 모두 균일(均一)한 선(線)으로 이루어져 적당한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기에,
최소한 상형(象形)의 전문(篆文)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본에서 발견되는
대마문자(對馬文字)나 도목문자(桃木文字)와 같은 계열(系列)의 전문(篆文)이면서, 암각의 위치와 상태로 보아,
기도(祈禱)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부적(符籍)과 비슷한 성격(性格)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암각(岩刻)은 아직까지 어떠한 의미로 된 내용(內容)인지 분명하게 해독(解讀)되지 않는 상황이며,
왼쪽 아래에 보이는 '천(天)' 자(字)는 후대(後代)에 새긴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산 건너편에도 있었다고 주민(住民)이 전하나 직접 찾아보지는 못하였으며,
이와 비슷한 암각(岩刻)이 남해도(南海島)의 서리곶, 거제도(巨濟島)의 갈곶절벽,
제주도(濟州道)의 정방폭포 밑에도 있다고 전해지나 아직 확실한 것은 모른다.
남해도(南海島) 곳곳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바위의 거북등 모양들은 태양(太陽)의 상징(象徵)을 새긴 것이라고는
하나 필자가 보기에는 암석(岩石)의 자연적(自然的)인 균열(龜裂)이 아닌가 생각된다.
(邊光賢작성, 1988년 7월 촬영, 1997년 1월 작성, 1998년 3월 수정, 보완)
주석)
(1) 과거부터 전해지는 여러 기록에서의 서불(徐市)을 '서시'로 읽어왔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생활속의 한자' 433호에 보면,
서시에 대한 김언종(金彦鍾) 씨의 매우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이글에서 김언종은 서복(徐福)도 아니며,
徐市로서 '앞치마 불'인 '서불'이라 읽어야 올바른 발음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호칭이야 어찌되었든 앞으로는 제대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모두 '서불'로 하였다.
(2) "南海縣郎河里岩壁 有神市古刻" (太白逸史/ 神誌秘詞),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崔致遠嘗得神誌古碑 . . . 卽郎河里 岩刻的是皆實跡也" (太白逸史/ 三聖記 註).
(3) "聞 南海島 郎河里之溪谷 及 鏡珀湖 先春嶺與 夫烏蘇里 以外岩石之間 時或有發見 彫刻非梵非篆 人莫能曉"
(太白逸史/ 神市本紀).
그리고 남해도 낭하리(郎河里)는 이 암각 소재 지역의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며,
경박호(鏡珀湖)는 현재 만주(滿洲) 연변(延邊, yanben) 북쪽, 흑룡강성(黑龍江省, heilongjiang)의
모란강(牧丹江) 상류(上流)에 위치하고 있다.
(4) "日本紀伊 有徐市題名之刻 伊國神宮 有徐市墓祠 云徐福一稱徐市 市福音混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기이(紀伊)는 지금의 일본(日本) 혼슈(本州, honshu)의 와가야마(和歌山, wakayama)縣이다.
(5)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146쪽 및
사기(史記)를 인용(引用)한 金彦鍾의 '생활속의 한자'(朝鮮日報 連載) 433호 참조.
(6) "至於徐福韓終 亦以淮泗之産 素有叛秦之志 至是入海求仙 爲言仍逃不歸"
회사(淮泗) 지방은 현재 중국 하남성(河南省, henan) 신양(信陽, xinyang) 지역으로 추정(推定)된다.
(7) "秦時徐市自 東冶海上直 至那覇經種島 而沿瀨戶內海 始到紀伊 伊勢舊有 徐福墓祠 或曰亶州 徐福所居云"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그리고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참조.
나패(那覇)는 일본 규우슈(九州) 남쪽 난세이 제도에 딸린 오끼나와 섬 남단에 있다고 함.
(임승국 번역, '桓檀古記', 정신세계사, 1987. 268쪽 참조)
(8) 황용훈, '동북아시아의 岩刻畵', 민음사, 1987. 91~92쪽 참조.
그리고 정인보의 해석은 태백일사(太白逸史)의 다음 구절(句節)을 참고(參考)한 듯이 보인다.
"南海縣郎河里之溪谷 岩上有神市古刻 其文曰 桓雄出獵 致祭三神" (太白逸史/ 大辯說 註)
(9) 檀君世紀/ 蘇塗經典本訓에 소개된 三聖記 註釋 參考
그리고 숙신(肅愼)의 원음(原音)은 조선(朝鮮)이라 하며, 진(秦) 이전에는 동이족(東夷族)이
중국 대륙을 대부분 점유(占有)하였으나, 같은 동이족(東夷族) 출신(出身)인 진시황(秦始皇) 정(政)에게 패한 후,
여러 나라 왕족(王族)과 귀족(貴族) 대부분이 한반도(韓半島)와 일본(日本)으로 이주(移住)하여
피신(避身)하였다는 주장(主張)이 있다.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한뿌리, 1993. 참조)
또한 진(秦) 시대부터 부르기 시작하였던 흉노족(匈奴族, Hun)는 발해만(渤海灣)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동이(東夷), 북융(北戎), 동호(東胡), 예맥조선(濊貊朝鮮)과 부여(夫餘)와 숙신씨(肅愼氏)를 포함(包含)하여
통칭(統稱)하는 말로서, 대륙(大陸)에 퍼져있던 기존(旣存)의 여러 환족(桓族, Hwan)을 비하(卑下)하여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원동중(元董仲)이 편찬(編纂)한 삼성기(三聖記全/ 下篇)에 보면
구약성경(舊約聖經)과 비슷한 내용으로서 인류의 조상(祖上)인 나반(那般)과 아만(阿曼)이 아이사타(阿耳斯타)에서
처음 만나 천신(天神)의 가르침으로 결혼(結婚)하였으며, 그 후손(後孫)이 구환족(九桓族)이 되었다고 한다.
"人類之祖 曰 那般初與阿曼 相遇之處 曰 阿耳斯(駝-馬) 夢得天神之敎 而自成昏禮 則 九桓之族 皆其後也"
(10) 클로드 보데(Claude Baudez)/ 시드네이 피카소(Sidney Picasso), 김미선 옮김, '마야-잃어버린 도시들', 시공사, 1996. 참조
(11) "留記云 神劃曾在 太白山靑岩之壁 其形如ㄱ 世稱神誌仙人所傳也" (太白逸史/ 蘇塗經典本訓/ 留記)
(12) 金東春, '天符經과 檀君史話', 가나출판사, 1987. 259~289쪽 참조
(13) 神代文字總覽 參考, 웹페이지 http://www.sannet.ne.jp/userpage/tsuzuki/sinmoji.htm (97-10-26)
(14) "帝巡國中 至遼河之左 立巡狩管境碑 刻歷代帝王 名號而傳 之是金石之最也" (檀君世紀/ 12世檀君 阿漢 在位52年)
(15) "帝登太白山 立碑刻列聖群汗之功" (檀君世紀/ 15世檀君 代音 在位51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