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3_3 : 한국의 암각화]* 검파형암각화의 양식변화와 기능성 변형 <이하우> 201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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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대가야학술대회 발표논문
검파형암각화의 양식변화와 기능성 변형 / 이하우(한국선사미술연구소장)
Ⅰ. 머리말
그간 한국암각화에 대한 연구는 형상분석을 통하여 성격을 밝혀 보고자하는 입장에서 진행되어 왔다.
독특한 구조적 형상으로 한반도 남부지방에 분포하는 같은 유형의 암각화에 대한 분석도
모티브를 규명하고자 하는 도상분석을 통하여 그 성격을 알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그간 연구자의 주관에 따라 분석에서 많은 차이를 야기하였다. 그 차이는 연구자의 수만큼이나
다르게 나타났으며, 또 당분간 새로운 자료의 발견과 같은 계기가 없으면 그 차이를 좁히게 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현실에서 필자는 새롭게 도상분석을 수행하여 또 다른 이견(異見)을 생산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간의 견해를 검토하는 수준에서 이를 정리하고, 도상의 발전 혹은 양식변화에 대한 수순의 기준을 제시하여
양전동형 암각화, 나아가서 같은 구조를 지닌 한국암각화가 어떤 순서로 발전해갔는가 하는 점과 함께,
암각화가 제작되지 않게 된 소멸시기에 있었을 암각화의 기능성의 변형을 밝혀 보고자 한다.
지역적 명칭에서 나온 양전동형 또는 칠포리형이라 하는
동일한 형상의 암각화에 대한 성격과 관련한 명칭은 연구자마다 다르게 호칭되고 있다.
인면신상암각화(人面神像岩刻畵), 방형기하문암각화(方形幾何文岩刻畵), 방패형암각화(防牌形岩刻畵),
검파형암각화(劍把形岩刻畵) 등이 그것이다. 각각 다른 명칭으로 하여 혼란이 있기도 하지만
이점은 성격규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조정되기는 어렵다.
필자의 생각은 이와 같은 암각화의 발생과 초기형태의 발상에 석검의 형상변화가
밀접하게 관계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이를 검파형암각화로 호칭하는 것이 가장 합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이후 같은 유형의 암각화를 검파형암각화로 부르도록 한다.
Ⅱ. 시기별 순서에 대한 제 견해
1980년대 후반까지 한국암각화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나 천전리 암각화에 비해
별종으로 취급받던 고령 양전동과 같은 유형의 암각화는 이제 한반도 남부지방 전역을 아우르는 공간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암각화의 주류가 이와 같은 암각화라는 것을 알게 하였으며,
그 연구의 첫 자리에 고령 양전동 암각화가 있다.
양전동 암각화 발견이후, 80년대 말엽부터 이어지는 암각화 조사는
이와 같은 유형의 암각화와 함께 병행되거나 별도로 동심원이나 석검과 같은 것이 주로 조사되었으며,
검파형암각화와 같은 유형의 암각화는 지금까지 한반도 이외의
그 어떤 주변지역에서도 조사된 적 없는 한반도 독자적 상징물임을 알게 하고 있다.
다음의 지도 1과 같은 검파형암각화의 분포를 봤을 때,
여기에는 한반도남부지역을 장악한 제 집단의 성격과 함께 이 문화인들의
이동과 전파, 변화와 같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인다(지도 1. 한국암각화와 청동의기의 분포).
따라서 이러한 민감할 수밖에 없는 암각화의 상징에 대한 문제는 농경과 관련된 신상이라는 부분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으나, 가까운 시기 안에 모두가 공감되는 수준으로 정리되기는 다소 어려울 것 같다.
지도 1. 한국암각화와 청동의기의 분포
검파형암각화의 조사에 따른 현황은 표 1과 같다(표 1. 검파형암각화의 발견과 현상).
표 1에 따르면 검파형암각화는 대부분 다른 형상과 동반해서 조사되고 있으며,
지도의 분포에서 보듯 전북 남원의 대곡리 암각화를 제외한 모든 그림은 경상북도에 분포하고 있다.
주로 자연암반에 제작되었으며 간혹 고인돌의 개석 위에 표현된 것으로 알려진 암각화도 있다.
발견조사 시기는 80년대 중후반에서부터 9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조사된 양상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도 이시기에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다.
70년대 초반의 울산 천전리와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연구가 한국암각화연구의 제 1기라고 할 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은 암각화연구의 제 2기로서,
제 2기의 연구중심은 아무래도 검파형암각화가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암각화자료가 이 시기에 지속적인 발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검파형암각화에 대한 제 성격과 양식변화, 혹은 제작시기별 순서에 대한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검파형암각화에 대하여
이것이 인면을 형상화한 그림이라고 한 첫 연구는 이은창(1971: 25-40)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이은창은 하바로프스크(Хабаровск) 인근의 사카치 알얀(Сакачй-Алян) 암각화와 비교하여
고령 양전동 암각화는 신상인면이라고 한 이후, 연구자들은 이를 받아들여
양전동 암각화는 신상인면이라는 성격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었다.
그러다가 제 2기 암각화연구가 시작되는 80년대 말, 새로운 암각화자료에 힘입어
일련의 연구자들(송화섭 1993; 임세권 1994; 이하우 1990, 1994; 이상길 1995; 장명수 1995)은
동일 모티브에 대한 성격규명과 함께 시기별 발전순서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송화섭(1993:135-136; 1994: 31, 45-71)은 석검의 손잡이모양, 즉 검파형 기하무늬로 보았다.
따라서 검파형 기하무늬는 여성의 생산기능을 상징한 지모신상으로서, 농경의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그림이라 하였으며,
그림양식의 진행은 포항 인비리․여수 오림동-포항 칠포리․영천 보성리-고령 양전동․고령 안화리-남원
대곡리․영주 가흥동 순으로 달라져 갔고, 그 시기는
이른 시기의 그림이 청동기시대 전기에서 늦은 시기의 그림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이르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임세권(1994:149-154)은 이에 대하여
사카치 알얀과 허란산(賀蘭山), 무리허투꺼우(黙勒赫圖溝)의 인면 암각화와 같은 맥락으로 보아,
이는 신상으로서 특히 태양신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라 했다. 제작 시기는 청동기중․후기의 것으로 비견하였다.
따라서 양식변화도 양전동을 그 전형으로 하여
양전동-대곡리B․보성리-칠포리․안화리․대곡리A-가흥동-석장동으로 변모해 간 것으로 정리한 바 있다.
특히 임세권(1999:89-93)은 나중에 그림의 각 부분에 대한
명칭을 제시하여 이것이 신상암각화로서 얼굴에서 그 모티브가 나왔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하우는 각 그림의 형상이 약간씩 변화가 있다는 것을 보고
이는 각 종족이나 부족을 상징하는 문장과 같은 표식이라고 하였으나(1990),
나중에 송화섭의 견해에 동의하는 입장에서 검파형암각화로 호칭하고 있다(1994:104-113, 125-131).
그림의 변천과정은 인비리의 그림이 칠포리에 와서 검파형으로 성립되었으며
칠포리를 조기로 하여-석장동-보성리-양전리-대곡리로 분화되어 갔으며,
다시 양전동에서 안화리로, 그리고 가흥동으로 가면서 소멸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하우(1994:127-129)는 소멸기를 맞은 검파형암각화는 세형동검문화와 조우함으로서
이형청동기(異形靑銅器)로 변모해 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따라서 편년은 청동기시대 중기에서부터 B.C. 4-3세기 세형동검문화기에 이르는 것으로 보았다.
이상길(1996:168-171; 2000:165-166)은 이러한 그림에 대하여 패형신상으로 보았다.
그는 패형신상 암각화는 농경사회의 대지모신을 나타낸다고 보고,
주변 청동기시대 유적과 연관하여 청동기시대라고 하였다.
제작순서에 대해서는 안심리-석장동․보성리-안화리․대곡리-칠포리-양전동-가흥동 순으로 정리하였다.
장명수(1995, 2001)는 구조적 형상의 일련의 암각화에 대하여 이를 방패문 암각화로 보고자 한다.
따라서 암각화는 청동기시대 후기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철기문화의 유입에 따른
사회적 갈등양상과 정치사회적 다양성이 반영된 제단화로서의 암각화이며,
시대적 변형은 석장동과 안심리 암각화를 생성기의 그림으로 보고
석장동․안심리-보성리․안화리․지산리․대곡리 B․양전동-칠포리-대곡리 A․가흥동 순으로 발전순서를 정리한 바 있다.
이외에도 여러 편의 비중 있는 관련논문(김길웅:1994; 최광식:1995; 신대곤 1998)이 있다.
그러나 편년에서 앞의 연구자와 크게 다르지 않으며 각 암각화의 시기별 변화상을 언급한 내용은 없다.
있다 하더라도 또 하나의 유사한 호칭이 첨가되어 다른 혼란을 재생산 한다거나,
시기별 제작의 순서도 그림 하나하나에 따른 지나친 세분화로 인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못한다고 생각되어 논의에서 제외하기로 한다(신대곤 1998:119-120).
따라서 다음 연구자의 성과를 중심으로 이를 간략히 하면 표 2. 검파형암각화의 발전순서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발전순서에서는 연구자간 엇갈리는 양상을 보이지만,
제작 시기는 대체적으로 청동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말기 혹은 초기철기시대로 편년되고 있다.
검파형암각화의 양식변화에 따른 시기별 순서를 말하고 있는 연구자는
송화섭, 임세권, 이하우, 이상길, 장명수 등이다.
이들의 유적별 제작순서와 여기에 대한 분류기준은 표 2와 같다.
초기에서 발전기를 거쳐 소멸기에 이르는 수순에서 연구자마다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우선 보기에
초기 혹은 발생기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에 따라서 이어지는 순서에서도 자연스럽게 차이가 있는 양상이다. 또한
각 연구자가 제시한 기준마저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제작순서에 대한 견해 차이는 쉽사리 좁혀지기 어려워 보인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장에서는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제작시기별 순서 혹은 양식변화에 대하여 필자의 견해를 밝혀 논의의 장으로 올려보고자 한다.
Ⅲ. 양식변화와 기능성 변형
1. 양식변화
연구자별 각 유적에 따른 제작순서는 앞장에서 검토한 바와 같다.
여러 연구자가 제시한 순서의 기준을 보면,
송화섭(1993)은 암각화별 양식변화에 주목하여 단순한 것에서부터 장식적 요소로 변화해 간다고 보았으며,
임세권(1994)은 내용과 기법의 특징적 요소를 비교함으로서 상대적으로 그 시기별 순서를 정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기준으로 전형적 형상에서 변이형으로 발전해 간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형적 형상이란 개념에서 양전동형 암각화를 인면으로 보는 것에 대하여
인면으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구성요소가 두 눈과 입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임세권이 제시한 타 지역의 암각화에서 이 조건은 충족되고 있으나
한반도의 검파형암각화는 이러한 기본요소조차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견해에 동의하기 어렵게 한다.
이상길(1995)의 경우, 형식 분류와 중복상태를 보고 그 순서를 정할 수 있다고 하여
각 그림별로 6개의 유형으로 나누고 있으며, 이를 다시 4개의 단계별 순으로 분류하였다.
장명수(1995) 또한 순서별 분류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는 그림제작기법을 중심으로 순서를 정하고 있으며,
이는 좁고 얕은 것에서 넓고 얕은 것으로 변화해 가며 이것은 다시 넓고 깊은 것으로 발전해 간다고 하였다.
발전에 따른 기준이라는 측면에서 필자(이하우 1994)역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필자는 규모면에서는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양식적 변화는 단순한 것에서 장식적인 것으로 변해간다고 보았으며
장식적인 것은 다시 단순화 해 가는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제시된 기준역시 연구자마다 서로 일치하는 요소는 별로 없고,
서로 간에 공감되는 측면이 없이 각각 다르게 분류된다.
또한 그와 같이 판단하게 된 근거조차 자세하고 명료하게 제시된 적이 없다.
따라서 필자는 필자 나름의 기준에 대하여 이를 재검토하고, 그 근거를 제시하며,
이와 함께 그간 새롭게 조사된 자료의 추가하여 순서별 변화과정을 재정리하고자 한다.
규범적 모델은 계속해서 모방되고 재현․반복된다고 할 때,
검파형암각화는 연속적으로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재현된 양상이다.
이것은 이 시기의 시대적 신앙상징물로서, 그 형태와 상징성은 시대정신과 직결되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계속되는 재현과정에서 맞이하게 되는 변화 속에는
항상 기본형의 속성이 유지되는 한계 내에서 다양한 변용이 있게 된다.
따라서 그 원형 혹은 기본형을 어떤 유적의 그림으로 보는가에 따라 앞의 표 2와 같이,
연구자들마다 다른 양식변화의 순서라는 결과를 빗어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 기본형을 칠포리로 보고자 한다.
칠포리가 기본형이라고 하는 이유는 우선 칠포리에는 검파형암각화의 형(形)을
정립하게 하는 여러 형상의 그림과 함께, 그것으로 발전해 가는 가장 초보단계의 그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검파형에서 가장 기본을 이루는 형의 속성은
역 사다리꼴을 이루는 외형에서 그 좌우 양변은 곡선을 이루면서 안으로 들어가 있는 형상이다.
내부는 선각으로 구획되고 그 사이에 바위구멍이 있다.
이러한 점은 같은 유형의 전 표현물에서 공통적으로 지켜지고 있는 구조적 형상이다.
이와 같은 기본형이 다양한 형상으로 변용되면서 각 유적에 묘사되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림 1과 같은 형상을 기본형의 원형으로 판단하며(그림 1. 검파형의 초기형과 기본형 작도),
이와 같은 것의 가장 고졸한 형상을 찾는 것이 초기 혹은 발생기의 그림이 된다고 본다.
이것의 가장 이른 모델은 포항 인비리에서 발견된다(그림 2).
인비리의 석검의 손잡이에는 이와 같은 형상이 그대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이와 가장 흡사한 형상은 칠포리에서도 발견된다. 칠포리 역시 3점의 석검이 조사되었으며,
인비리의 것 보다 더 발전된 형상으로서
칠포리 그림은 양 허리가 완만한 곡선으로 들어가 있고 상하 양 변에서 상변이 약간 길다.
그 상변의 중간에서 아래로 U자형의 들어간 부분이 있으며,
이러한 내부형태에서 가로로 수적으로 일정하지 않은 몇 개의 선각이 있다.
선각으로 구획된 내부에도 바위구멍이 새겨져 있다.
칠포리에서도 가장 초기형은 그림 1의 좌측 그림의 석검에서 검 날과 손잡이가 분리된 표현물로 보인다.
검파형이란 명칭은 바로 이 그림에서 나온 것으로서,
석검의 검 날과 손잡이가 분리되면서 검의 손잡이에서 형상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짐에 따른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분석이 앞서 제시된 바 있고(송화섭 1994: 31; 이하우 1994: 55-56),
그리고 보다 실증적 자료로 포항 인비리의 그림과 칠포리의 것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따라야 하지만 본 글의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 다른 기회에 이에 대한 검토내용을 밝힐 것을 약속하면서 본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칠포리에서 형태의 발견에서 나온 표현은 상변이 강조된 것 말고는 크게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수직의 바위벽에 제작되면서 상변이 약간 강조되고, 어느 정도 한정될 수밖에 없는 형상의 재현과정은
우선, 가로․세로 약 52×55cm정도에서부터 96×92cm의 큰 형상과 함께 폭이 굵고 깊은 각선으로
약 4-5cm정도의 새김 선으로 제작되었다.
이것은 구체적 대상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데서 나오는 윤곽선,
그리고 시각적으로 만져 질 것 같은 촉각성의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림 1의 왼쪽그림과 같은 표현물과 함께, 석검과 여성성기형 표현물이
형상 확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보는 입장(이하우 1994:106; 송화섭 1996:290-291)에서
석검 3점과 석검과 유기적 연관을 가지는 형상의 성기형 그림이
무려 24점 정도가 함께 있다는 것은 칠포리를 초기형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그림 2. 석검, 성기형 그림).
안심리와 석장리의 그림을 초기형식으로 보는 연구자(이상길 1996; 장명수 2001)도 있다.
이것은 필자의 입장에서 보면 장식적 요소가 제거된 가장 조야(粗野)한 형상으로 하여
늦은 시기의 그림이 오히려 가장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예이다.
다음 장에서 다시 상세히 언급하겠지만 제의와 관계되는 암각화가 우연찮은 기회에
그 질료적으로 달라지는 변형을 맞이하여 다른 의기로 바뀌어 간 후에 제작된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새롭게 부각된 재료가 암각화를 대신한 이후에 별도의 루트(route)아래에서 제작된 표현물이기 때문에
형상은 그 기본적 요소만 남은 소멸기의 그림이 안심리와 영주 가흥동의 그림으로 보는 것이 필자의 시각이다.
따라서 필자는 암각화의 발전순서의 기준으로 형상의 발견,
그리고 명료성과 촉각성이라는 측면에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그림의 새김 폭이 굵고 깊은 것에서부터 좁고 얕은 것으로 발전해간다고 보고자 한다.
또한 이것은 초기형태가 단순하고 투박스러운 데서 시작하여 점차 정형화의 과정을 겪고,
시각적인 면에서는 장식화 되어 간다고 보아 단순화-장식화로 진행하는 것이 그 순서라고 본다.
이것은 후에 다시 장식적 요소는 생략되거나 없어지게 되고,
그 기본형이 가지는 속성에 따라 다시 단순화의 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
동일형상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발전순서로 이해된다.
물론 고대의 예술품에 대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분류기준이 아닌,
고유의 뜻에 가까운 고대 분류체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두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가 그러한 분류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보다 근사치로서 이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형태에 대한 발견이 이루어진 초기형상에 인비리와 칠포리 암각화가 있다.
이것이 이동 혹은 전파되어 가면서 경주 석장동, 영천 보성리 등에서 다양하고 많은 형상변화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형상변화는 보성리에서 가장 많은 변용이 나타난다.
검파형이라는 그 기본형만 같을 뿐이지 약 15점 여의 그림은 모두 다른 양상이다.
이것은 안화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양전동에서는 그 이전 지역에서 다채롭게 나타나던 형상변화가 보다
절제되고 비교적 안정적 형상으로 일관되어, 가장 정형화되고 균제 된 표현상이 드러난다.
규모 면에서 볼 때, 칠포리가 평균치 가로․세로 52×55cm인데 비하여
석장리․보성리에서는 그림의 크기가 20×25cm로 현저하게 작아지고, 새김선의 깊이도 점차 얕아지고 있다.
양전동의 각 그림은 몇 점만을 제외하고 모두 상단과 좌우측면에 마치 빛이 나는 것과 같은 표현의 선각이 있다.
이 선각표현은 발전․정형기로 구분되는 전 유적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다양한 면모로 나타나던 것이 양전동에서는 비교적 안정적인 모습으로 상단과 좌·우측면에서 고르게 나타난다.
양 허리로 들어간 곡선은 칠포리에서 부터 석장동, 보성리로 오면서 서서히 완만해 지던 것이
양전동에서는 그 정도가 더하여 거의 직선에 가깝다.
즉 양쪽으로 곡선을 이루면서 들어간 허리표현이 초기에서 발전․정형기로 오는 동안
그 곡선의 완급정도가 점진적으로 수직선에 가깝게 보다 완만하게 변해 가는 점이 돋보인다.
그림 3과 같이 정리된 형상변화의 과정에서 소멸기의 표현물은
보다 간략하게 변한 표현적 특징이 두드러진다(그림 3. 검파형암각화의 발전순서).
그것은 앞선 단계의 그림이 지니고 있던 장식적인 요소는 모두 제거되고,
발전과정에서 내재해 있던 기본형만 잔존해 있는 조야한 모습만 남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형상의 조잡함 때문에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종종 가장 이른 시기로 분류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조야한 형상으로 남은 것은 여러 유적의 암각화가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이동하는 가운데 변화를 맞이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오히려 초기적 형상이 검파형암각화 소멸을 맞이하게 되는 시기에 자연스러운 전파루트와는 별도로
한 갈래는 가장 북쪽인 영주 가흥동으로,
또 한 갈래는 남쪽인 내남 안심리로 진출해간 결과로 이해된다. 이것은 새로운 상징형태로 바뀌어간 이후에
강한 보수성으로 남은 것으로서, 제의형태나 형식이 보수적이라는 점과 부합한다.
따라서 필자는 검파형암각화의 초기(발생기)-발전․정형기-소멸기의 과정은
기계 인비리․포항 칠포리-경주 석장동-영천 보성리-고령 안화리-고령 양전동․고령 지산동-남원 대곡리 순으로 보고자한다.
또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간 순서와는 또 다른 갈래로 영천 보성리에서 영주 가흥동으로,
경주 석장동에서는 내남 안심리로 전파되어 가면서 소멸기로 접어들었다는 순서를 정할 수 있다(그림 3).
이러한 소멸기의 과정은 새로이 진출한 청동기문화와의 조우와는 별도의 갈래로 이행되었을 것이다.
하인리히 뵐플린(H. Wölfflin 2004)은 미술의 발달과정을 5가지의 명제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필자가 기준으로 제시한 내용과 뵐플린의 미술양식발전의 과정에 대한 기준이 되는 5가지의 명제
즉 1.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촉각상에서 시각상으로),
2. 평면성에서 깊이감으로,
3. 폐쇄성에서 개방성으로,
4.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5.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와 비교할 때 많은 요소에서 일치한다는 점이 발견된다.
물론 뵐플린의 이론이 절대적 요소로서
반드시 법칙성 있게 발견되는 사항이라 할 수도 없고, 무작정 신뢰되어야 할 이유도 없다.
비록 그 자신 북유럽의 선사미술에 적용하여 일정부분 성공한 사례가 있고,
원시미술에 적용할 경우 다소간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적용되어야 할 명제에 따라 어느 정도의 교정이 있어야 하지만, 적어도 검파형이라는
단일형상의 한국암각화에 적용해보면 많은 부분에서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 명제인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촉각상에서 시각상으로)라는 부분은
검파형암각화의 발전양상과 비교에서 앞에서도 형상의 발견,
그리고 명료성과 촉각성이라는 측면으로 간략하게 언급된 바 있다.
폐쇄성과 개방성이라는 명제도 주변입지에 대한 공간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점에서 수긍되는 부분이다.
초기의 유적이 은폐되고 계곡내부와 같은 폐쇄적 위치를 선정한데 비하면
주위가 점차 열린 공간으로 개방적인 입지를 찾아가는 양상의 수순과 같다. 물론 그림이 대상이 아니라
입지조건에 한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 중요성이 점차 주목되고 있는
주변입지가 그림과 굳이 구별되어 이해해야 할 것만은 아니다.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발전해 간다는 명제로서 암각화를 보면,
우선 초기형태로 생각되는 포항 칠포리의 경우,
검파형암각화와 동반하여 석검․여성성기형․동물발자국․별자리 형 바위구멍 등 여러 형태가 발견된다.
유사한 시기적 양상의 것으로 검파형암각화와 함께
여성성기형․사람이나 동물의 발자국이 동반되는 경주 석장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검파형암각화와 동반해서 나타나는 여러 표현물은 그 다음 발전단계로 보이는
영천 보성리나 고령 안화리에서는 크게 달라져 검파형이라는 단일형상만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비록 동심원이 동반되고 있지만 고령 양전동을 비롯하여 남원 대곡리에서도 같은 현상이다.
형상변화라는 측면에서 각 유적의 표현물에서 나타나는 새김새와 함께
선각의 굵기, 깊이도 명료한 형태에서 점차 얕아지고 가늘어지면서
장식적변화가 있는 불명확한 형태로 달라져 간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뵐플린의 이론을 적용해 볼 만 하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암각화가 더 이상 제작되지 않고
소멸되어 가는 시기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암각화의 기능성의 변형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2. 기능성 변형
한국암각화에 대한 연구 성과를 비판하는 지적사항중의 하나는
각 연구자의 견해를 뒷받침 해줄 만한 고고학적 자료의 제시가 없다는 것이고,
많은 연구결과가 실증자료가 아닌 추정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있는 고고학 자료를 두고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없기 때문에,
또한 현실적으로 자료 확보를 위한 수단이 별로 없기 때문에 보다 그 본질적 문제에 접근하고자 하는
여러 과정 중에서 추정이나 유사한 형상, 성격에서 비슷한 자료에 대한 관심과 분석에서 깊고 철저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과정의 하나로 필자는 우선 용도와 형상의 유사성으로 하여 청동의기(靑銅儀器)에 주목하고 있다.
암각화가 청동의기와 일정부분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점에
관심을 둔 연구자는 장명수(1992, 2001) 이하우(1994) 이상길(1996)이 있다.
장명수(1992, 2001:120-122)는 그가 말하는 방패문 암각화를 비교 검토하는 과정에서
암각화가 방패형 동기의 형태와 성격상 공통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이상길(1996:159-164, 173-176) 역시 관련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암각화가 검파형 동기․방패형 동기․원개형 동기와 함께 북방 여러 종족의 무복과 닮은꼴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청동의기에서 나온 의기성과 무복의 신성성이 반영된 것이 패형암각이며,
암각화는 결국 샤먼의 신체를 표현한 것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주장은 우선 검파형암각화와 청동의기가 외형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각자가 분석한 방패문 암각화라든지 패형신상 암각이라고 하는 주장을 뒷받침하는데 이를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청동의기가 검파형암각화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고 본 필자는
청동의기가 나온 곳이 검파형암각화의 공간적 범위에 근접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여,
암각화가 B.C. 4-3세기경 한반도 남쪽지방으로 새롭게 도래하는 세형동검문화기를 맞이하여
바위에서 청동기로 표현재료가 바뀌면서 청동의기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물론 양자의 유사성에서 착안한 것에 불과하고,
다른 자료의 제시라던가 상세한 분석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도 이러한 생각이 달라질만한
다른 요소가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생각 아래에서,
특히 질료적인 측면에서 암각화가 어떻게 외형이나 구조성, 그리고 본질에 대한 인위적인 변경, 변환을 갖고
청동의기로 달라져왔는가 하는 점에 중점을 두고 이를 분석하고자 한다.
검파형 동기․방패형 동기․농경문 동기와 같은 청동기가 의기라는 것은 선행연구자들(한병삼 1971; 이건무 1992; 국립중앙박물관 1992)에 의해 정리된 바 있으며, 필자도 의기라는 입장에서 여기에 접근하고 있다.
검파형암각화에서 청동의기의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전 유적이 일관된다고 하겠다.
특히 검파형 동기는 암각화의 문양 두 개를 위․아래로 마주 잇대어 놓은 것처럼 외형적 친연성이 있다.
또한 아산 남성리, 대전 괴정동 방패형 동기와 농경문 동기(傳대전)의 형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청동의기에 대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자.
검파형 동기
검파형 동기는 마치 검파형암각화 두 개가 위·아래로 마주 잇대어 있는 것과 같다.
세부 형상은 중간에 마디가 있어서 상하 두 개로 나누어지며,
중간마디를 중심으로 동일한 형상과 문양이 마주보듯 대칭적으로 반복되어 있다.
상변의 길이는 하변보다 길고 그 끝은 좌우로 길고 뾰족하게 나와 있는 가운데,
내부문양은 외곽과 일정한 간격으로 돌아가며 시문되어 있다.
두 겹으로 된 문양은 집선과 점선이 한 조를 이루어 문양대를 구성한다.
상하부의 각 부 중간에 고리가 있어서, 거기에는 끈을 꼬아 만든 것 같은 둥근 환이 걸려 있다.
뒤집어 보면 내부의 위아래에도 고리가 있어서 이 부분에 끈을 매어 다른 물체에 매달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점은 검파형 동기가 어디엔가 부착되기 위한 것임을 알게 한다.
검파형 동기는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아산 남성리에서 각각 3점씩 나왔으며,
각 지역의 형태적 차이는 크지 않지만 동서리와 남성리의 동기가
괴정동에 비해 상변의 끝 부분 길이가 더 날렵하고 길어서 보다 세련된 느낌이 있다.
또한 동서리 동기에는 상단에 손 모양이 있고 남성리의 것은 두 점에서 각각 사슴모양과 역삼각형 문양이 있다.
이러한 검파형 동기는 동서리의 경우 원개형 동기나 동경․나팔형 동기․소옥․관옥과
여러 점의 동검․흑도장경호가, 남성리에서는 방패형 동기․동경․관옥․곡옥․선형동부․동착․동검이,
괴정동에서는 방패형 동기․원개형 동기․동검․곡옥․동탁․흑도와 점토대토기와 동반되었다.
방패형 동기·농경문 동기
방패형 동기와 농경문 동기는 모두 3점이 전하고 있다.
방패형 동기는 괴정동과 남성리에서 나왔으며,
농경문 동기는 대전의 한 고물상이 수집한 것이 국립박물관에 입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두 상변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어디엔가 매 달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구멍은 위치에 따라 상이하게 닳은 흔적이 있다.
특히 농경문 동기는 중간보다 좌우로 갈수록
닳은 정도가 심하여 느슨하게 묶어 놓은 끈이 좌우측에서 더 많이 흔들렸던 것 같다.
남성리 방패형 동기는 상변에 어디엔가 매 달기위한 부분이 튀어나와 있으며,
상변의 약간 아래에 좌우로 뻗은 가지가 있고 그 끝에는 방울모양의 둥근 장식이 있다.
날렵한 허리곡선을 따라 하부로 가면 양쪽으로 두 갈래의 가닥이 길게 이어져 있다.
내부에 검파형 동기와 같은 둥근 환이 한 쪽 면에는 두 개가, 그 배면에는 하나가 달려있다.
내부에는 비교적 정교한 집선과 점선이 문양대를 이루며 길게 이어져 있고 양면의 문양은 약간 차이가 있다.
괴정동의 방패형 동기는 남성리의 것에 비하면 다소 거친 형태와 문양으로 구성되었다.
성긴 격자문으로 구성되는 문양대가 외형을 따라 둘러 있으며,
상변의 중간에서 하부로 수직의 동일한 문양대가 있다. 그러나 배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장식이 없다.
농경문 동기는 괴정동에 비해 보다 정교한 형상과 문양대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중간문양대의 좌우 공간에 그림이 새겨져있다.
그 내용은 오른쪽의 것은 머리에 긴 장식을 달고 있는 사람이 따비로 밭을 가는 형상,
괭이를 치켜든 사람이 있고, 왼편에는 항아리에 무언가를 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배면의 문양은 좌우에 각각 두 갈래의 나뭇가지 끝에 앉은 새가 있고, 새 아래의 고리에는 둥근 환이 하나 달려있다.
그러나 하단부가 크게 깨어져 나가서 파손된 곳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아있는 부분의 형태로 보아 괴정동의 것과 같은 형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의기로 알려진 여러 청동기 중에서 검파형 동기와 방패형 동기, 그리고 농경문 동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러한 청동의기는 암각화의 외형과 유사성 이외에도 동일한 의기로서 역할 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검파형 동기는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암각화 두 개가 위·아래로 서로 마주보듯 연결되어 있다.
각각 떼어서 본다면 검파형암각화와 같은 형상이다. 이와 함께 남성리 방패형 동기는
암각화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 보다 중요한 자료로서, 비슷한 형태를 지닌 암각화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남성리 방패형 동기와 비교되는 암각화는 영천 보성리에서 조사되었다(그림 4. 영천 보성리 암각화).
영천 보성리에서 다양한 변화를 갖기 시작한 검파형암각화 중에서 그
림 4에 제시된 그림 a․b와 같은 표현물은 남성리 방패형 동기와 거의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림의 특징은 상단에 여러 가닥의 선각이 있으며, 양 허리부분은 완만하고 부드럽게 하단으로 내려온다.
무엇보다도 그 하단부에서 급하게 좌우로 뻗은 부분은 끝이 동그랗게 마감되어 있다.
이 부분에서 a와 b는 다소 차이가 있어서 a 그림은 이 부분이 동그랗게 마감되면서 다시 안으로 감겨진 형상이다.
두 그림 모두 가장 잘록한 허리부근에서 가로로 구획된 선이 있고, 그 상하로 각각 두 개의 바위구멍이 있다.
이 그림에서 남성리 방패형 동기와 같은 요소가 보이는 곳은 바로 하단의 좌우에서 뻗어있는 동그란 마감부분이다.
방패형 동기의 경우는 거꾸로 이 부분이 상변에서 좌우로 뻗어 있고, 그 끝에는 방울모양의 둥근 장식이 있다.
암각화의 상변의 여러 가닥의 선각은 방패형 동기에서는 하부의 두 갈래의 가닥으로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보성리에서 a 그림의 둥글게 말려있는 부분을 가지런하게 펴고,
a․b 모두 이 부분을 수평으로 놓고 상하로 뒤집어 보면 방패형 동기와 암각화는 같은 형상으로 볼 수가 있다.
물론 이러한 표현물과 같은 한두 가지의 예를 갖고 섣부른 일반화는 있어서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논의마저 포기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필자는
이와 같은 암각화의 요소가 변형되면서 청동의기로 바뀐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표 3과 같이, 경주 석장리 암각화의 일부에서도 발견되는 사항이다. 그 유사함은
농경문동기나 괴정동 방패형 동기에서 보이는 요소와도 많은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표 3. 암각화와 청동의기의 관계).
그러나 우선 보기에 영천 보성리 경주 석장리의 자료가 앞의 양식변화의 수순으로 볼 때,
남원 대곡리처럼 세형동검문화의 지리적 공간범위와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사항에 대해서는 좀 더 철저한 분석이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재현․반복과정의 변화 속에서 항상 기본형은 유지되고 있으며,
전단계의 형이 다음단계의 형상에도 유기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현상을 고려하면 보성리 하단의 마감부분과 같은
표현 역시 이러한 공간적 차이를 넘어서는 내재적 속성으로 작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제례용기는 항상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기술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항상 일상적이지 않은 희귀한 재료로 만들어졌으며, 숙련된 전문장인이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우훙(2003:186)의 말처럼 청동의기 역시 당시의 귀중한 재료인 청동기라는 소재를 사용하였으며,
가장 뛰어난 기능공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보인다. 이 정교하고 우수한 청동의기는
다름 아닌 암각화의 또 다른 표현이며, 새로운 기술과 평범하지 않은 재료로 만들어진 이것은 제의상징물로서
기능했을 것이다. 이는 바위라는 소지(素地)로부터 청동기라는 매체로 그 상징성이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검파형암각화는 원래 제의의 목적에서 바위벽에 제작된 것이다.
그것이 신 소재인 청동기의 보급에 따라 청동의기로
달라진 것으로 보는 필자는 형상의 측면에서 위아래가 뒤집혀진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보고자 한다.
위아래가 뒤집혀진 형상이라는 것은
상변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어디엔가 매 달수 있도록 한 것에서 보다 확실시 된다.
상변의 구멍은 위치에 따라 상이하게 닳은 흔적이 있으며, 여기에 대하여 한병삼(1971:12)은 제사할 때
큰 나무에 걸어놓았던 흔적으로 생각된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송화섭과의 대화에서
‘신적 존재임을 자처하는 자가 이를 그 목에 걸고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 얘기는 의미심장하다.
또한 이상길(1996:160)은 이러한 의기는 샤먼의 무복에 부착되는 것으로서,
제의행위에 거기에 달린 유환이 흔들리면서 내는 소리가 방울과 같은 효과를 가져 온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적어도 어디엔가 부착되었던 물건이라는 것은 분명하고, 부착된 곳은 사람의 복장장식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암각화와는 다르게 위아래가 뒤집혀진 채 가슴에 부착된 의기에 대하여,
그것을 바르게 볼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의기를 달고 있는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의기를 부착한 사람이 고개를 숙여 이를 보았을 때 그는 뒤집혀진 의기를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른 형상의 의기를 보게 될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이 의기를 본다는 것은
이것은 의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의기가 지닌 상징성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자신의 모습이 의기에 투영되어 있다거나 아니면 의기자체가 바로 의기를 달고 있는
주인자신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의기는 상하의 이중구조로서 실제로 뒤집혀진 것이지만
이를 보는 사람의 눈에는 암각화와 같이 똑바른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례는 그림 5의 장강 하류의 판산(反山)에서 발견된 황[璜, 패옥 목걸이]에서
우훙(2001:100-101)이 발견한 원리와 같은 현상이다(그림 5. 판산 패옥, 석가하 패옥. 양저문화(良渚文化),
중국 절강성고고연구소). 또한 석가하의 인면패옥도 끈을 맬 수 있는 구멍의 위치로 보아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각으로 봤을 때 검파형 동기는 다소 차이가 있다.
표 3. 암각화와 청동기와의 관계
검파형 동기는 그것은 두 개가 위아래로 겹쳐 있어서 양면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상변이 더 길고 하변은 짧지만 중간마디를 중심으로 서로 거울에 비친 것처럼 마주보게 구성되어 있는
검파형 동기가, 사람의 가슴에 부착된다면 상단의 것은 이 사람을 바라보는 또 다른 사람,
즉 타인의 시각을 고려한 것이 되고, 하단의 것은 부착한 사람에 맞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 따르면 예산 동서리 동기의 상단에 있는 손 모양과 아산 남성리의 사슴모양 문양은
적어도 검파형 동기의 주인이 아니라 이를 바라보게 되는 다른 사람의 시각에 맞춘 문양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가슴에 부착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각종의기는
바위라는 소지에서 청동기라는 금속매체로 그 상징성이 옮아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의기가 당대의 최고의 재료와 기술을 요구하며 탈 세속적이어야 한다는 원리와 같다.
칙칙한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라는 것이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으로 바뀐다는 것은 보는 자로 하여금 엄청난 경험이 되었다.
그것을 부착한 사람은 자신은 물론,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암각화의 현신과 같이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며,
드디어 암각화의 제의성은 가슴에 패용되는 청동의기로 바뀌면서 암각화를 대신할 상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Ⅳ. 맺음말
한국 검파형암각화의 연구는 도상 분석적 입장에서 활발히 논의 되어 왔다.
그러한 논의에서 성격이나 상징성의 문제에 대한 것은 모두가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 시대인의 신앙 관념에서 빗어진
태양신 또는 대지모신과 같은 신상을 나타낸 것이라는 것으로 대체적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나 독특한 구조적 형상으로 나타나는 검파형암각화에 대한 발전순서라든지 양식변화에 대해서는
각자의 견해만 있을 뿐 심도 있게 논의되어 본 적은 없다.
또한 암각화의 제작이 어느 시기에 중단되면서 암각화에 반영되어 있었다고 보이는
상징성이나, 혹은 기념비성(Monumentality)과 같은 것이
그 다음 단게에서는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점에 대한 연구도 아직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러한 시점에서 검파형암각화에 반영된 기능성과 같은 것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놓고,
연구자 모두가 함께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보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필자는 그간 제기되어온 동일한 형상,
즉 검파형암각화에 대한 제작의 선․후라든가 양식변화에 따른 발전순서와 관련된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아울러 여기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한 상징성이나 기념비성의 달라짐과 같은 기능적 변형이라는 측면에서는
암각화가 맞이하게 된 구조나 외형, 본질에 대한 인위적인 변환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이를 분석하였으며, 다음은 앞의 분석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여 결론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양식변화에 따른 발전순서의 기준은
형상에 대한 발견과 명료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새김선의 폭이 넓고 깊은 것에서 좁고 얕은 것으로 진행되어 갔다고 보며, 시각적인 조형문제에 있어서는
단순 투박한 형상에서 정형화․장식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는 판단에서
단순화-정형화․장식화-단순화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검파형암각화의 초기(발생기)-발전․정형기-소멸기의 수순은
인비리․칠포리-석장동-보성리-안화리-양전동-대곡리 순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고자 하며,
또한 이와는 다른 갈래로 보성리에서 가흥동으로,
그리고 석장동에서 안심리로 이동해 가면서 소멸․쇠퇴기로 접어드는 루트가 있다고 판단한다.
둘째, 기능적 변형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이행된 것으로 보인다.
암각화가 청동의기로 달라져 가는 배경에는 세형동검문화의 한반도 남쪽으로의 도래가 있었으며,
이러한 새로운 청동기술의 유입은 암각화가 바위라는 표현매체에서 금속인 청동기로 대체,
거기에 반영된 상징성이나 기념비성이 바위에서 금속으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 기능적 변형은 암각화에서 청동기로 바뀌게 된 질료적 변환만큼
기능상으로도 아래·위가 뒤바뀐 이중구조를 갖고 사람의 목에 걸리거나 가슴에 부착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착용하게 된 사람의 시각에 맞춰 뒤집혀진 형상으로 제작되었으며,
이러한 기능성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검파형암각화는 더 이상 제작되지 않게 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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