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자의 기원/한국의 암각화

함안 도항리 암각화 (咸安 道項里 岩刻畵)

유위자 2025. 11. 5. 15:59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3_3 : 한국의 암각화] * 함안 도항리 암각화 (咸安 道項里 岩刻畵) 2005/05/27 13:11 https://sooam11.tistory.com/10332611 남해안 천혜(天惠)의 고항(古港) 마산(馬山)과 인접하고있는 함안 (가야; 伽倻)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해발 백여미터 이하의 나즈막한 구릉 위에 50여기의 중형, 대형의 봉토분이 줄지어 축조되어 있다. 이곳 함안(가야)은 아라가야(Ara Kaya)의 수도로서 알려지고 있는데, 1917년 이곳에서 가장 커다란 봉분인 제4호분을 발굴하여 그 내부구조를 알게되었다. "당시 조사된 내용을 보면 장방형으로 네벽을 쌓아 돌방을 만들고, 위에서 관을 내려 놓고 뚜껑을 여러 개의 판석을 잇대어 놓고, 그 위에 흙을 올려 봉토를 만든 이른바 수혈식 석실분 (竪穴式 石室墳)임이 밝혀지게 되어 이 일대의 대형고분 역시 같은 형식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 능선을 따라 봉긋봉긋 솟아있는 고분들은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없을 정도로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크게 구분하여 보면 남북으로 뻗은 주 구릉의 대형 봉분들과 이 구릉에 연결되어 서편으로 뻗은 작은 구릉 위의 중형 봉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 전체를 조감(鳥瞰)하면 마치 거대한 용(龍)이 서쪽으로 다리를 뻗고 드러누어있는 형국(形局)이고, 각 구릉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고분들은 그 용의 혈맥(血脈)을 표시한 것 같이 보인다.(2) 또한 2, 3호분의 경우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그 주변이 3단의 토단을 형성하고 있어 이곳의 머리와도 같은 매우 별다른 느낌이 주어지는 곳이다. 단순히 구릉 위에 봉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유연하고 부드러운 형태의 구릉 이곳저곳을 볼록하게 만들어서 마치 동물의 관절과도 같은 모양으로 인하여 지형에 힘이 들어있고 또한 주능선의 봉분들이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연결이 척추뼈와 같아 보인다. 이러한 양식의 무덤 배치는 봉분의 외관에서 뿐만 아니라 주봉과 연결하여 산맥의 형세를 기본으로 무덤을 조성하였기에 현재의 한반도 묘지 풍수(陰宅風水) 사상과도 상당한 관계가 있으며, 우리의 풍수사상이 결코 중국에서 비롯된 것 만이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 남부의 가야 풍습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생각되는 현장이다.(3) 이곳과 비슷한 상황은 여기보다 이전에 축조되었을 창녕 유리 고인돌 인근에서도 뚜렸하게 확인할 수 있으며, 계성고분군에서 이와 비슷한 양식의 봉토분을 볼 수 있다.(4) 이곳의 대형 봉분들은 대략 AD 5세기 이전의 아라가야의 지배계층 무덤들로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정확한 것은 밝혀지지 않았다. 아라가야 고분군의 가장 남쪽에도 4기의 중소형 고분이 줄지어 있는데, 그 서쪽 끄트머리 고분 앞에는 커다란 바위가 가로로 누어있으며, 그 표면에 동심원과 성혈이 새겨져 있다. 수많은 성혈과 동심원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히 새겨져 있어 하늘의 별들을 표현하였다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5) 함안 읍네에서 의창군으로 향하는 1035번 국도에서 파수 농공단지로 빠지는 오른쪽 길로 접어 들어 도동으로 가다보면 왼쪽 산자락 끄트머리에서 이 바위를 찾을 수 있으며 이곳의 행정지명은 경상남도 함안읍 도항리에 속한다. 바위 면은 서쪽 265도를 향하고 있는데, 건너편 멀지 않아 마주 보이는 능선은 단조로이 남북으로 뻗어있으며, 그 아래 하천이 산줄기를 따라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데, 남강(南江)을 거쳐 남지(南旨)에서 낙동강과 합류하게 된다. 이 바위의 크기는 약 1.1m x 2.5m x 50Cm의 니암(泥岩) 종류로서 인근 능선이나 주변에서 볼 수있는 풍화된 암반과는 그 질과 결이 약간 다르고 게다가 이곳 주변 능선에서는 이러한 커다란 바위 덩어리를 전혀 볼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고인돌 또한 전혀 볼 수 없으며, 이 암각화 또한 이 지역에서 유일한 것으로, 위치와 규모면으로 고인돌 개석(蓋石)이라고는 생각할 수 있으나 여러가지의 정황으로 보아 고인돌 개석으로 생각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이 바위는 산자락 끝에 위치하는데, 애초에 고인돌이 세워져 있었을 경우, 봉분 축조자들이 이 바위가 필요치 않을 경우 다른 곳으로 쉽사리 옮길 수 있으며 반대로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갖고와서 간단하게 올릴 수 있는 매우 낮은 언덕이고, 바위가 연질(軟質)인데다 판석으로 절리되는 점판암이어서 얼마든지 조각으로 깨트려 다른 용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애초의 고인돌 개석을 이 곳으로 옮겨 암각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데, 여하튼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비스듬히 기운 현재의 상황이 봉분과 바위가 동시에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되는 위치이며, 그만큼 현대의 비석과도 흡사한 기능으로서, 봉분을 위한 장식적인 석물(石物)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역활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게다가 영일 지역에서처럼 고인돌 앞에 분묘를 조성하거나 경주 상신리 경우처럼 고인돌 주변에 분묘를 조성하기는 하여도 고인돌 바로 뒤에 분묘를 조성하는 경우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6) 바위 전면에 골고루 새겨져 있는 성혈이 측면과 아랫면에서는 없고 꼭대기 윗면에서는 볼 수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현재의 상황이 성혈이 제작되는 시기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오른쪽 부분이 파괴되어 잘라지고 중간 부분의 판면이 유실되어 원래의 전체 모습을 알 수는 없으나 현재 잔존하는 바위의 형태로 보아 앞면이 길죽한 타원형의 면을 보유하고 있는 바위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표면의 풍화 정도는 탁본(拓本)을 통하여 보다 상세하게 알 수 있는데, 현재의 하부면이 상부면에 비하여 좀더 풍화되었으며, 60Cm 너비 이하로 유실된 중간부분은 다른 면에 비하여 훨씬 풍화 정도가 덜하였다. 상부에서 볼 수 있는 성혈과 상부면이 하부면에 비하여 풍화가 덜되었다는 것은 애초에 좀더 반반한 면을 위로 하여 지금처럼 가로로 설치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바위가 선돌로서 수직으로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 그리고 유실된 중간 부분에서 성혈이나 홈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절개된 면이 바위결과는 달리 방사형으로 주름져 있는 점으로 보아 자연적인 절리(節理) 현상으로 판면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공적인 힘에 의하여 중간 부분의 판석이 절개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른쪽 아래 모서리를 정점으로 하여 3단의 타원형이 반복된 것처럼 층을 이루고 있으며, 한번 쪼아서 만들어진 조그만 단일 홈들이 전면(全面)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흔적은 울산 천전리 암각화에서도 확인된다. 이 조그만 홈을 바탕으로 크고 작은 바위구멍(성혈; 性穴)들과 중심이 성혈인 겹동그라미, 그리고 날카로운 직선들이 새겨져 있다. 대부분 뽀족한 도구로 쪼아파기하였으며, 간혹 성혈 중에서 둔기(鈍器)를 사용하여 다듬은 듯이 홈 내부와 오른쪽 아래 직선이 반구형으로 파여져 있다. 성혈을 중심으로 새겨진 겹동그라미는 육안으로 모두 6개가 확인되나 탁본을 통하여 2-3개 정도의 성혈 주변에 겹동그라미가 얕게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특이한 점은 왼쪽 판면과 오른쪽 아래 판면의 아래 부분에 방사형으로 모두 5개의 직선이 새겨져 있으며 왼쪽 면에서는 난잡한 직선, 그리고 그 윗부분에서 다섯개의 수직선과 맞닿은 아래 수평선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7) 전면에 얕게 깔린 홈과 함께 수없이 산재되어 있는 바위구멍들은 개중에 다시 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것도 있으나 의도적이라기 보다는 우연성이 강한 상황이며, 마찬가지로 바위구멍들이 이루어진 것도 판 전면을 골고루 쪼으다가 그 중 두드러지게 파여진 부분을 집중적으로 쪼은 듯이 매우 불규칙적이며, 그 폭과 깊이 또한 엄지손가락을 쌀짝 담글 정도에서 약간의 편차를 보이고 있다. 여기 암각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 겹동그라미들은 그 중심이 완전한 성혈로서 반구형으로 파여져 있다. 성혈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원을 새겼는데, 우선 가운데 성혈을 파고 그 다음에 차츰 외원을 등간격으로 반복하여 새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부분 원각의 굵기와 깊이가 일정하지만 가장 크고 확실하게 보이는 중앙 부분의 여섯겹동그라미에서는 외곽으로 갈수록 차츰 굵기를 더하고 있다. 또한 새겨진 겹동그라미 내에 잔존하는 성혈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애당초 드문드문 성혈과 직선을 새겼으며, 나중에 겹동그라미를 새기고 그 후에 겹동그라미와 직선을 피하여 전면적으로 성혈들이 새겨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여하튼 겹동그라미과 직선들 대부분이 성혈과 겹치지 않게끔 약간의 간격을 두고 있다. 결국 여기에서 중요하게 취급된 것은 겹동그라미와 직선인 셈이다. 바위 오른쪽에 모여있는 4개의 겹동그라미는 겹동그라미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매우 훌륭한 사례이다. 여기 암각의 제작자가 어떤 의도로 한군데에 각기 다른 동심원을 새겼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한겹동그라미 이외에는 겹이 다른 동심원을 제작하여 각 동심원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즉 개별적으로 구별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한 화면에서 여러 사람이 같이 작업할 때, 각자의 개성 차이로 약간씩 달리 표현될 수도 있다. 또한 상징 대상이 구분될 수 있을 때, 단일 제작자에 의하여 기존 모양을 약간씩 변형시켜 각 이미지에 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각기 다른 4개의 동심원은 최소한 각자의 상징 대상이 다르며, 또한 형태의 차별로 인해 그 상징 대상 또한 신분이나 계급과 같은 차별을 염두에 두고 작업하였으며, 이 암각의 의미가 별자리이든 그 무엇이든 여기서는 차별되고 등급화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각 형태의 구별을 통하여 최고의 형태와 그 이하의 형태로서 이미지 형성의 단계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 네개의 겹동그라미들은 각기 원의 숫자는 다르나 중심은 거의 동일한 크기의 바위구멍을 보여주기에 우선 같은 크기의 바위구멍이 제작되고 그후 외원들이 새겨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A와 D의 겹동그라미가 외곽의 크기는 비슷하지만 원의 숫자가 6겹과 5겹으로 차이를 두고 있고 A에서는 외곽원의 굵기가 두꺼워져 D보다 좀더 완전한 모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한겹으로 외원을 새긴 흔적이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어 우선 한겹으로 시작하여 차츰 4겹 이상으로 계속 반복하여 쪼아새긴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고로 외곽의 원은 중간 원이 찌그러진 상태 그대로 반복되었다. 이 4개의 겹동그라미를 제작 순서대로 나열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형태의 완성도로 동심원의 제작과정을 구분하여 순서를 매겨보면, C-B-D-A의 순으로서 정해진 크기의 구멍에서 차츰 주변으로 확산되는 모양을 새겼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순서로 각기 동심원의 중요도가 다르고, 개별적으로 구별된 이미지로 인하여 각 동심원은 신분과 계급이나 나이가 다른 인간 사회의 구분을 형태로 표현하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 원점(圓點)에서 확산되는 원 또는 겹겹이 둘러싸인 동그라미,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이 자연(自然)과 생물의 습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모든 이미지의 출발점은 곧 자연이기에 여기의 겹동그라미 또한 자연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겠다. 수많은 자연 대상물 가운데 이러한 모습과 가장 유사한 것은 우선 수면(水面)에서 쉽게 확인된다. 조용한 수면 위에 돌이 떨어졌을 때 사방으로 퍼져 가는 파문(波紋)은 어떤 작용의 시원(始原)과 과정 그리고 결과까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자연적 형태이다. 또한 단단한 껍질로 둘러싼 알(卵), 그리고 여자의 자궁(子宮)등이 겹동그라미의 형태적 의미와 일치하고 있다. 북미 대륙에서 발견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암각화 가운데 구상적 형태와 함께 하는 소용돌이 무늬나 동심원은 때로는 태양으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주로 샘이나 출발지, 탄생, 변화 등의 의미로서 읽혀진다. 태평양 한가운데의 하와이 섬에도 여기와 비슷하지만 성혈이 없는 동심원의 암각화가 발견되는데, 이곳에서는 출산 후 자식의 건강을 바라는 기원 장소로서 알려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말해주는 것은 동그라미의 형태 자체가 갖고있는 방어와 보호의 성격을 차용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든 생물의 기원을 자궁이나 알로 생각하고 악마를 막아주는 신성한 장소이자 보금자리이고 생명의 탄생지로서의 동심원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나 싶다. 고대에는 원은 알 모양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에서 탄생한 새와 뱀들이 신(神)적인 존재로 여겨지고 알에서 탄생한 인간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는 우리의 고대 난생 신화(卵生神話)에서 알 수 있듯이 알은 곧 신성한 존재로서 다루어지고 그 존귀한 "알"을 얻으므로서 그 부족의 안녕(安寧)과 발전을 꾀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여기 암각에서의 바위구멍은 바로 신성한 "알"을 얻기위한 기원이었고 그것이 생산(生産)이나 다산(多産)을 바라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동심원은 이미지가 있는 그대로 보여주듯이 이 "알"의 힘이 주변으로 확산되기 바라는 의도에서 이런 형태가 출발되었으며 바위구멍(성혈)의 제작은 다산(多産)의 상징적 기원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둥그런 원추나 반구 형태의 봉토분은 바로 "알"에서 태어난 인간을 태어난 곳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회귀적 의도와 악마 퇴치의 성격이 강하게 내포된 형태라고 할 수 있으며 옹관묘의 독항아리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만큼 이곳 아라가야의 "아라"의 어원 또한 "알"과 같은 의미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타당하리라 싶다. 말산리(末山里)와 도항리에 산재하고 있는 고분들, 즉 주능선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뻗은 소능선에 둥그런 봉분을 배치한 이유는 바로 봉분의 주인공이 산과 같이 영원하게 위력을 발휘하기를 바라고 그와 더불어 부족이 번영하기를 바라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고 줄줄이 이어지는 봉분들은 곧 아라가야의 계보(系譜)로서 이를 과시하고 확인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1997년 9월 사진 촬영, 1997년 9월 작성, 10월 보충) 주석) (1)현지 아라공원내 안내판 인용 (2)풍수용어로 용(龍)은 산(山)을 가르킨다. 산의 지세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기복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용이라 일컬으며, 그 용의 신체인 산줄기를 인체나 생물학적 관념으로 파악하여, 생기(生氣)가 모일 만한 장소를 침구학(鍼灸學) 용어인 혈(穴)이나 맥(脈) 이라고 말한다. 또한 함안의 지형을 우리의 풍수(風水)에서는 봉황이 날아가는 비봉형 (飛鳳形)으로 해석하여, "16세기에 군수 정한강(鄭寒岡)이 읍자리에 봉의 알모양으로 흙을 쌓고 군 동북쪽에 벽오동 천 그루를 심어 대동숲 (大桐藪)이라 일렀다. 또 대산리(大山里)에 봉의 먹이가 될 대숲을 일구어서 봉이 영원히 떠나지 않도록 하였다. " 한다. (김광언, "풍수지리", 대원사, 1995. 67쪽) (3)최창조(崔昌祚)는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 (서해문집, 1992. 66,82쪽)에서 우리의 풍수사상이 중국과 다르며 중국의 두가지의 경향과 우리의 것이 혼합되어 형성되었다고 한다. 즉, 북쪽으로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온 좌향(坐向) 중시의 방위법(方位法)과 남으로 유입된 지형과 지세를 중시하는 형세법(形勢法)이라 칭하는 강서법(江西法)이 통일신라 이전에 한국의 자생적 풍수와 접목되었다고 한다. 풍수사상이 매장풍습과 관련이 있는 만큼 이 점에 대하여는 좀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며 단순한 전파와 흐름으로 여기기에는 아직 풀어야 할 문제가 많은 것으로 안다. 오히려 그의 다음말이 무게를 갖고있다. "중국 풍수가 산보다 물을 중시하는데 대하여 우리는 산을 더 중히 여기며, 중국이 인공 건조물의 영향력을 과대 평가하는데 비하여 우리는 오히려 자연의 형세를 더욱 무겁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형국론(形局論)의 소응적(所應的)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 등이다. " (4)고대의 대형 봉토분이 구릉이나 산에 조성된 이유는 대형 홍수등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되며, 시일이 지나면서 구릉 자체의 지형과 주변 환경에 의미를 부여하였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의 고분군 가운데 이 아라가야의 고분군이 지형과 가장 밀접한 배치를 보여준다. (5)일반적으로 동심원은 북방에서 도래한 천신족(天神族)의 작품으로 태양을 상징하며 풍요를 기원한다고 여기고 있으며, 토착민에 대한 선민의식에서 비롯된 부족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한국의 암각화", 한길사, 1996. 153쪽) (6)아일랜드의 뉴그란지(New Grange)에는 이와 비슷한 모양과 크기로 봉분 입구를 막는 형식으로 봉분 둘레에 빙둘러 세워진 암각 바위들이 있다. 여기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지만 봉분의 크기는 여기와 비교가 안되는 초대형 석실 봉분이고, 입구는 개방되어 있다. (7)여러 사람이 탄 배 형상으로서 "하늘나라(저승)로 영혼을 띄워보내는 혼선(魂船)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장명수, 한국 암각화의 편년, "한국의 암각화", 한길사, 1996. 2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