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문자의 기원/한국의 암각화

화랑세기와 천전리 암각화

유위자 2025. 11. 5. 15:33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3_3 : 한국의 암각화] * 화랑세기와 천전리 암각화 암각화 전체(가로 6m * 세로 3m)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세인들의 관심과 학자들 사이에 끊임없는 논쟁이 계속되는 역사적 사실 가운데 한단고기와 화랑세기 (花郞世紀)의 진위논쟁일 것이다. 전자는 웅장한 우리 조상들의 먼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심정적으로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많은 책이고 , 후자는 현재의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고려시대 이전에 쓰인 역사서라는 사실과 만약 사실이라면 신라史 연구에 획기적인 요소가 될 것임은 물론, 근친혼과 동성애 다부제(多夫制)와 같은 신라사회의 충격적인 性 풍속도에 관한 흥미 때문일 것이다. 공통점은 두 권이 모두 저자 死後에 비교적 근세에 (1911년과 1989년) 세상에 나타났다는 사실이고, 일본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단고기는 일본에서 출간되어 한국으로 역수입 된 것이고, 후자는 원본이 일본 왕실도서관인 궁내성에 보관되어 있는 것을 저자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가 1933~1945 동안 왕실 도서관 史書로 있으면서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하학 무늬와 여성의 자궁 등) 암각화 좌측부 화랑세기는 두 권의 필사본이 발견된 이후에 서강대 이 종옥 교수의 진본론과 서울대 노태돈 교수 등의 위작 설 등으로 대립되고 있고, 최근에 박창화의 초기 논문이 발견되어 다시금 논쟁이 재연되고 있는 사항이다. 두 권의 진위 논쟁 Point는 반대론자들은 구체적인 증거 없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측면을 강조하고, 진본론 자들은 그 창작의 의도성을 이해 할 수 없기 때문에 , 비록 내용이 필사과정에서 오류, 첨삭 ,수정은 있을지라도 골격은 사실일 것으로 주장한다. 즉 왜 저자가 무슨 의도로 그런 내용을 저술하였거나 필사하였을까 이다. 만약 위작이라면 상상을 초월한 천재적인 창작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그런 내용을 저술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고, 만약 명예 때문이라면 얼마든지 더 효과적인 방법과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문헌상으로‘화랑세기’는 8세기 신라 성덕왕 때 한산주 도독을 지낸 김대문(金大問)이 썼다고 전해지는 신라 화랑의 전기이자 역사책이다. 이 책의 허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인용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경남 울주군 소재 천전리 암각화(Petroglyph)이다. 이곳은 선사시대의 이해 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모양의 암각화와, 후대 신라시대에 새겨진 문자들 특히 화랑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명문 및 낙서(?)> 현재 우리 사회의 성문화로 보면 타락 적이고 패륜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8세기는 통일신라시대로 한창 신라가 문화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이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고, 신라에서 발견되는 토우 등에서 보이는 포르노적인 Sex 장면은 당시대의 사회상이 화랑세기가 이야기하는 것과 일치되는 모습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명문 > 지역적으로 경주와 가까워서 당 시대에 화랑들의 수련장이거나 휴양지엿을 것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화랑들의 이름이 이곳 암각화에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위작에 힘을 보탠다. 그러나 나의 私見은 보는 바와 같이 조각이 조잡하여 이곳은 화랑도의 말단 졸병들의 낙서(?)이기 때문에 소위 요즘말로 지휘관급인 소대장 이상만 기록되는 화랑세기의 인물과는 일치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것으로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은 수긍이 안 간다. 더 나아가 저자로 알려진 박창화씨는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위작을 염두에 두었다면 그도 알고 있었을 관창이나 기타의 알려진 화랑의 이름을 차용 하였을 것이다. 오히려 일치 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도적인 위작이 아닐 수도 있다. 참고로 천전리 각석은 1984년 동국 대에서 조사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한 시대의 암각화 만이 아니고 적어도 청동기 시대의 기하학적인 무늬와 동물에서 신라 시대까지 다양한 그림과 시대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풍화 작용에 의한 보존에 상당한 문제점이 예상된다. 유명한 반구대 고래 암각화와는 가까운 거리에 있고, 사진에서 보는 계곡 물이 흘러내려 雨期에는 반구대 암각화를 물에 잠기게 만든다. 사실 이곳의 최초의 발견자는 문명대교수가 아닌, 법흥왕의 친동생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었다. 때는 525년, 그는 사랑하는 애인 어사추녀랑(於史鄒女郞)과 함께 이곳으로 놀러왔다가 서석곡(書石谷)이라 이름 짓고 명문을 남겼다. 그 후 사부지갈문왕은 형 법흥왕의 딸, 그러니까 여 조카와 결혼하여 아들 심맥부지(深麥夫知: 후일 진흥왕)를 낳았다. 사부지갈문왕은 이곳에 놀러 온지 12년 후에 죽었고, 2년 후, 그의 부인은 애달프게 그리운 남편의 젊은 시절 로맨스가 서린 이곳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추모의 제식을 올린다. 7세의 어린 아들은 그 해 겨울 왕위에 올랐다. 추기) KBS역사 스페설에서 다양한 각도에서 화랑세기의 진위 여부에 대한 분석이 있었는데 최근에 발견된 유물등도 함께 조사 하였지만 그 진위에 대한 확실한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왜 일본의 국가와 왕실에게 궁내성에 보관하고 있고 공개하지 않는 자료를 확인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노력을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R1 2021.10.2 <천전리 계곡 :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유명한 반구대 암각화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