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1_10 : 한단고기_거란,여진,위구르]* 잊혀진 초원의 제국 突厥•위구르(隋•唐)1) 第1突厥帝國
1.突厥의 起源
突厥의 기원은 대다수의 중앙아시아 민족의 기원과 같이 신비와 전설로 싸여 있다. 돌궐의 전설은 중국의 사료에
기록되어 전해지는데 중국의 기록에 따르면 돌궐의 선조는 투르크계의 일족으로 匈奴의 북방에 나라를 이루고 살았
는데 어느 날 열살 된 한 소년만 발이 잘린 채 살아남고 모두 살륙되었다. 소년은 암이리에 의해 양육되었고 암이
리는 소년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그러나 다시 소년을 잡으로 오는 적들을 피해 암이리는 투르판Turfan의 어느 동굴
로 도망가 열명의 아들을 낳았고 그 소년들은 인간의 여자와 결혼하여 흩어졌는데 그 중 하나가 阿史那Ashihan라는
성을 가지고 가계를 세웠는데 몇 세대 이후 돌궐족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알타이山을 지배하였고 그
들 조상의 발생지인 동굴을 순례하였다고 기록되어진다. 돌궐의 근원에 관한 사실적인 역사를 밝혀 줄 만한 기록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고 돌궐이 처음으로 중국사료에 언급된 시기는 3세기 중이었다.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돌궐은 柔然에 예속된 부족 중의 하나였는데 그 부족은 공통의 언어를 갖는 민족집단 전체
에게 그 이름을 부여하게 되었다. 6세기초 돌궐은 알타이 지역에서 야금에 종사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6세기
중기부터 돌궐은 세력을 확장하면서 돌궐 유목국가를 건설하여 북몽골에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돌궐의 출현
은 동아시아 세계는 물론 서아시아와 유럽의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6세기 중기에 돌궐의 군주
일릭카간과 그 아들 무칸카간은 2대에 걸쳐 북아시아 세계를 제패하던 柔然을 멸하고 고대 흉노에 비할 정도의 대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당시의 중국은 남북조시대의 말기로 北周와 北齊는 유연의 붕괴에서 돌궐의 진출로 이어지는
초원의 역사에 위협을 느꼈고 隋煬帝의 고구려 원정은 고구려, 돌궐의 연합을 견제하기 위한 군사행동으로 이해되
고 있다. 그러나 돌궐제국은 건국 30년만에 동서로 분열되었고 7세기 중기 이후 隋양제•唐태종의 적극적인 침략으
로 점차 그 세력이 약화되면서 결국은 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돌궐이 문명을 이루었다고 하는 증거로 북아시아
유목민족 가운데는 처음으로 돌궐문자를 만들어 썼으며 당나라 현종때 만든 돌궐비문이 오르콘강가에서 발견되었
다. 돌궐문자는 서아시아의 소그드문자를 변형한 것으로 한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표음문자이다. 이는 중국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돌궐이 문화적으로 서아시아 문화가 훌륭하였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돌궐이 군사적으로
세력이 약한 중국문화를 배격한 것은 북방민족의 강한 민족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돌궐의 국가조직은 건국초부터 동•서돌궐로 나누어 카간과 야구브가 통치하고 있었다. 동돌궐이 宗家的 성격을 갖
고 있었기 때문에 동돌궐 카간의 형제와 자손에게도 카간의 칭호를 주었다. 카간의 세습은 先카간의 유언과 부족장
들의 찬성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는 돌궐의 汗位분쟁의 불씨가 되었다. 카간의 아래에는 7대관과 다시 그 밑에 28
등관이 직할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관직은 세습되었다. 그리고 서돌궐의 야구브은 수도를 天山山中에 두고 야구브
아래 다시 소카간을 두어 10부를 통치하게 하였다. 카간位에 대한 계승은 결국 서돌궐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돌궐은 강대 제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란으로 인한 세력 약화로 그 꽃을 크게 피우지 못했다.
2. 돌궐의 전성기
돌궐 제국의 성립은 지도자로서의 권위가 높았던 일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552년 돌궐을 건국하여 Ilig
Qaghan伊利可汗을 칭한 것은 阿史那氏의 土門Bumin이었다. 돌궐이 패권을 장악하게 된 것은 부민의 업적 때문이었
다. 유연은 카간인 阿那壞와 그의 숙부인 바라문사이의 충돌로 인해 502년 내전이 벌어져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유연은 북위의 원조를 받은 아나궤의 승리로 돌아가고 투르크계 부족들의 반항을 평정하는 일은 칸국의 유
일한 지배자가 된 아나궤의 몫이었다. 508년에 그런 부족의 하나였던 高車가 유연을 격파했으나 유연은 516년경에
고차의 왕을 죽이고 복속시켰다. 고차는 끊임없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521년 고차는 유연의 내분을
이용하여 다시 한 번 그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546년 직전 그들은 또다른 독립을
계획할 때 돌궐의 방해를 받았다. 돌궐은 고차와 같은 종족이었지만 유연의 카간 아나궤에게 그 계획을 알렸다. 대
가로 돌궐의 지도자였던 부민은 유연의 공주와의 결혼을 요구했지만 아나궤는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부민은 같은
투르크계로 장안을 수도로 하고 있었던 서위와 연합하였다. 그들은 몽골계이며 숙적인 유연에게 보복하는 데 도움
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동맹을 반가워하였고 서위는 그 대가로 551년에 부민에게 공주를 주었다. 서위와 돌궐은
유연을 포위하고 난 이후 부민은 그들을 완전히 격파하고 아나궤를 자살하게 하였다. 이때 유연의 잔여세력은 중국
의 변경으로 피난하였는데, 그곳에서 동위를 계승한 北齊가 그들을 변경의 수비병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부민은
초원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초원의 영토는 유연으로부터 돌궐로 넘어가고 부민은 카간이라는 칭호를 취하였
다. 부민은 승리 직후 사망하였고 그가 죽자 그가 건설한 제국은 나뉘어 그의 자식과 동생에게 분할하였다. 그의
아들인 무칸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카간의 칭호를 물려받았고 이로써 동돌궐 칸국이 성립되었다. 동돌궐은 제국
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범위는 만주의 변경에서 만리장성과 투르판분지의 하미 오아시스까지를 지배하였다. 부민의
동생 이스테미(室點密)은 2인자란 뜻을 지닌 '야브구yabghu'라는 칭호를 갖고 서쪽 지방을 물려받아 서돌궐 칸국을
세웠다. 서돌궐 제국은 하미에서 아랄 해와 페르시아까지 뻗쳐 있었다.
돌궐의 국가 토대가 확립된 것은 Muqan Qaghan木汗可汗이었다. 572년까지 계속된 무칸의 집권시기에 돌궐제국은 동
쪽과 서쪽으로 더 확장되었다. 무칸은 그의 제국을 중국의 접경까지 확대시켰고, 여러 부족들을 복속시켰는데, 그
중 하나가 거란이었다. 동돌궐이 560년에 거란을 격파하여 복속시켰다는 사실은 돌궐제국의 판도가 이제 거의 요동
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북주도 돌궐의 세력을 무시하지 못하고 정중하게 무한의 딸에게 청혼했다. 돌궐은 北齊를
공격하여 진양을 완전히 약탈하였다. 무한이 572년에 사망하고 他鉢Tsapar가 제위에 올랐을 때 서돌궐의 이스테미
는 원로정치인으로 카간의 칭호를 스스로 획득할 수 있었겠지만 타파르의 등극을 승인하였다. 타파르의 재위기간동
안 돌궐의 압력은 중국 북방변경지역에 계속되었고 돌궐의 번영은 영원하는 듯 보였다.
3. 돌궐의 분열
3-1) 동돌궐의 발전
돌궐은 제국을 세운 지 2대만에 동서로 갈라져 발전하면서 큰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 서돌궐은 이리하 지방에서 천
산남로와 파미르서쪽을 점령하고, 동돌궐은 몽골지방을 차지하여 동으로는 만주와 한반도에까지 세력을 확대하였
다. 그러나 돌궐의 제국들은 전성기를 오래 구가하지 못하였다. 호쇼차이담 비문에서 찬양되었던 위대한 카간의 권
위는 이후 위대한 능력이 결여된 후손들에 의해 계승하였다. 사실 돌궐의 최대의 적은 다른 돌궐이었다. 실제 돌궐
의 힘을 파괴한 것은 오르콘 강가에 있는 동돌궐과 탈라스 강과 이식쿨에 있는 서돌궐사이의 경쟁이었다. 만주로부
터 아랄해까지를 절반씩 나누어 지배한 두 돌궐제국이 만약 이스테미가 인정하였듯이 동돌궐이 우위를 보장하여 카
간이라는 최고 군주의 칭호를 갖고 서돌궐은 이인자의 뜻을 지닌 야브구라는 칭호에 만족하면서 통일을 유지했다면
그들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한의 동생이자 계승자인 돌궐의 카간 타파르는 서돌궐의 충성을 받았던
동돌궐의 마지막 존재였다. 타파르의 全제위기간 동안 돌궐은 남쪽에 위치한 중국의 위협을 받지 않았지만 내부적
으로 분열의 조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타파르가 사망한 581년은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된 해이다. 카간位를 두고
타파르의 아들인 안로Anlo와 조카 다로빈Talopin이 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안로는 즉위 즉시 다로빈의 아우 이스
파라Ishpara에게 양위하고 안로는 제2카간이라는 칭호에 만족한 채 정치에서 물러났고 새 카간인 이스파라는 다로
빈에게도 아파카간Apa Qaghan이라는 칭호를 주어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300여년만에 분열
된 중국을 통일한 수문제는 이제 시선을 북으로 돌려 돌궐과의 전쟁을 준비하였다. 583년에 수는 이스파라의 돌궐
군을 물리쳤다. 이스파라는 전쟁 도중 아파카간의 모반을 두려워하여 그의 근거지를 습격하여 파괴하였다. 아파카
간은 도주하여 서돌궐의 야구브인 타르두에게 갔다. 동•서돌궐의 관계는 그로부터 다시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악
화되었다. 이스파라가 아파카간을 공격했던 것을 계기로 동돌궐제국 시대의 전성기는 종료하게 되었다고 볼수 있
다. 동서간의 초기 전쟁에서 동돌궐은 패하여 수에 도피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는 돌궐의 내전을 최대한으
로 이용하였다. 수는 동돌궐에 원조를 하여 돌궐의 전체 세력을 약화시키고 결국 중국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인
정하였다. 수의 목표는 양쪽 돌궐을 존속시키되, 동돌궐을 수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약화된 상태로 유지시켜 수
와 강력한 서돌궐 사이의 완충적인 구실을 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스파라 사후, 동돌궐의 세력은 점차로 약화되어
동돌궐의 존속은 수의 지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夷利制夷 방법이 성공함에 따라 수는 종종 돌궐의 세
력을 견제하기 위한 방안으로 돌궐의 불만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카간 沙鉢略때는 서부의 타르두와 동부 지역
의 거란으로부터 협공을 당하였다. 수는 타두르와의 연맹을 유보하고 오히려 타르두에 대항하는 동돌궐을 지원하였
다. 내분에 휩싸인 동부는 더 이상 위협스런 존재가 아니었고 타르두에게 유리하게 돌궐이 통합하게 해서는 안되었
기 때문이다. 동돌궐의 카간 都藍은 중국의 지원을 받던 또 다른 정적 突利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도람은 599년에
돌리를 몰아내었지만 수는 오히려 돌리를 환대하고 그들은 오르도스 지역의 변병으로 삼았다. 후에 당은 돌리를 이
용하여 동돌궐을 견제하였다.
수양제가 집권하고 있던 시기의 동돌궐의 지배자는 시비Shih-pi였다. 시비는 고구려 침략의 실패로 중국내부에 일
어난 혼란을 틈타서 동돌궐은 과거의 세력을 회복하기 위한 정치적•군사적 행동을 취해 동돌궐의 찬란했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재획득하기 위한 계획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사실 양제는 고구려 원정으로 돌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었고 시비의 공격은 어느정도 성공하였으나 615년의 공격은 이세민에 의해 격퇴되었다. 수•당 교체
이후에는 당의 중국에 대한 全지배권을 확대시키는 동안 동돌궐은 침체된 세력을 확장하고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려는 노력은 계속하였으나 갑자기 시비가 사망하고 당의 적절한 외교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3-2) 동돌궐의 붕괴
당태종은 처음에 당의 건국을 도와준 돌궐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초원 유목민들은 산서의 심장부로 쇄도해 들
어왔고, 624년 태종이 즉위하던 해에 동돌궐의 새로운 카간 힐리Hsiehli는 중국의 내전으로 인한 혼란을 이용하여
부대를 이끌고 長安을 위협했다. 태종은 소수의 군사로 대담하게 행동하여 결국 힐리는 전통적인 희생양식을 치르
고 화의를 체결하였다. 당은 돌궐의 무례한 자세와 당을 함부로 여겨 침략해 온 것을 기회로 이용하여 우호관계를
접고 적극적인 공세로 동돌궐을 격퇴시켜 그 지배하에 있던 서북지방의 유목민을 복속시켰다. 그리하여 태종은 서
북방의 유목민으로부터 天可汗의 칭호를 받게 되었다. 태종은 힐리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 힐리에게 반란을 일
으킨 두 투르크 부족-철륵과 薛延陀-을 지원하였다. 전자는 타르바가타이 지역에 있었고, 후자는 홉도 근처에 있었
다. 627년에는 동부 몽골리아 본토에서 태종은 카간의 정적인 돌리를 돕자 그가 힐리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당은
이를 방관하면서 은근히 반군을 원조하였는데 이렇게 힐리를 둘러싼 포위망을 구축한후 630년 李靖과 李世勣의 지
휘하에 중국군대를 출정시켰다. 당군은 초원으로 침입하여 힐리와 충돌하여 그의 부족민은 궤산시켰고 이른 봄에는
힐리를 생포하였고 반군을 카간의 位에 앉혔다. 이 이후로 동돌궐의 세력은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제 서돌궐이 중
국과 접경하게 되었다. 동돌궐은 50년 가까이 중국에 복속하게 되었다. 태종의 승리이후 돌궐은 암흑시대가 되었
다. 근반세기 동안 돌궐은 당에 의한 직접적인 통치를 받았고 돌궐은 마지막 힘을 모아 679년에 阿史德Ashihte家의
영도하에 당을 침입하였다. 이 침략은 시기상조였고 충분히 준비되지 못하여 실패하였지만 돌궐재건의 자극을 주었
다.
3-3) 서돌궐의 발전
이스테미의 아들인 타르두Tardu가 즉위함으로써 서돌궐의 야브구가 되었다. 타르두는 야심있는 인물로써 돌궐제국
의 2인적인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서부의 경제권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고 자신의 군사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582년
과 584년 사이에 타르두는 동돌궐의 카간과 결별하고 스스로 카간을 칭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했던 한의 위업을
회복하고자 했던 강력한 隋는 타르두의 반란에서 타르두를 지원했고 돌궐제국 둘로 분열되었다. 그후 수년간 동서
의 두 돌궐간에 전쟁이 계속되었고 양측은 각각 隋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隋문제는 어느 쪽도 후원하는 태도를 취
하지 않고 그 정세를 이용하여 오히려 돌궐 내분을 더욱 조장하였다. 동•서돌궐은 결코 다시 통합되지 못하였을 뿐
만 아니라 사실상 서로가 최고의 적이었다. 도람이 죽자 타르두는 동부의 혼란을 다시 한 번 이용하여 그들을 복속
시키고 몽골리아와 투르키스탄에 대한 자신의 지배권을 확립하여 돌궐족의 재통합을 실현시키려고 하였다. 중국의
개입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그는 위협수단을 구사했다. 601년에는 隋의 수도인 長安을 위협했고, 602년에는 중
국의 보호를 받으며 오르도스에 둔영을 치고 있던 돌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603년 중국의 간교로 인하여 서부부
족의 하나인 쩉뢰스Tölös족이 갑자기 타르두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타르두도 자신의 영역안에서 세력기반을 상실했
기 때문에 타르두 사후 서돌궐은 바로 분할되었다. 타르두의 손자인 Shekuie射?는 서쪽의 타쉬켄트를 포함하는 지
역을 확보했고 處羅라는 이름의 반란 수령은 일리의 통치자가 되었다.
610년대 초에 동서돌궐의 형세는 호전되는 듯하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에 북방민족의 중원침입 이후 한민족은 북
방민족에 대해 수세적 저자세로 일관하여 왔다. 이러한 對북방관계는 양제에 의하여 적극적 공세로 전환되었다. 그
러나 양제가 제위에 올라 일련의 대침략 전쟁을 고구려에 대하여 감행하였으나 무참히 실패하였고 이 원정의 실패
와 또 양제 자신의 무절제한 지출로 隋의 기둥은 무너지게 되었다. 서돌궐은 중국의 내분이라는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의 영향을 벗어나려고 기도하였다.
3-4) 서돌궐의 붕괴
서돌궐은 사궤에 의해서 다시 재건되고 있었다. 알타이의 설연타를 복종시킨 이후 테케스 강과 율두스 상류에 거처
를 두고 있었던 사궤는 알타이로부터 카스피해와 힌쿠시에 이르는 지역을 611년부터 618년까지 지배하였다. 그의
동생이자 야구브인 統葉護는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이미 동북쪽에 있던 철륵을 정복한 그는 서남쪽의 재배권을 재
확인하고 부분적으로 타림분지에 대한 패권도 장악하였다.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여행 도중인 630년 초 토크막
Tokmak에서 통엽호를 만났을 때 그의 세력은 최고 정점에 있었다. 당시 동돌궐을 격파하기 위해서 온힘을 쏟고 있
던 태종은 통엽호를 동맹자로 대우하였다. 불교에 대하여 매우 호의적인 태도를 지닌 통엽호는 토크막에 있는 아정
에서 중국의 구법승을 환대하였다. 현장이 방문한 지 몇 달 뒤 이 강력한 서돌궐 제국은 붕괴되었다. 630년에 돌궐
의 부족중의 하나인 카르룩Qarluqs에 의하여 통엽호는 피살되었고 태종은 이를 이용하여 서돌궐의 정치적인 세력을
제거하여 漢代의 속지였던 투르환지역을 점령하였다.
서돌궐은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그 이름은 중국어 전사로만 남아 있는데, 이식쿨호의 서부와 서남부에 있는 弩失
畢과 그 호수의 동북부에 있었던 尉陸이다. 갈라진 민족이 언제나 그렇듯 이 두집단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싸움으로
서로를 약화시켰다. 카간 돌육-나라이름과 같음-은 이 두집단을 통합하기 위해서 노력하다가 651년에는 중국의 둔
전이 설치되어 있던 하미지역을 대담하게 공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장군 郭孝恪이 古城과 우룸치 사이에 있는 보
그도 울라Bogdo Ula근처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더구나 태종이 돌육에 대항하여 노실필 유목민들을 지원하자 進退維
谷에 빠진 돌육은 박트리아로 도망가 그곳에서 사라졌다. 唐고종은 서부에 있는 돌궐에 노력을 집중했다. 돌육의
카간 賀魯는 잠시였지만 노실필 부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서 서부의 汗國을 부활시켰고 곧바로 중국의 종주권에 대
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은 중국의 정책에 잘 따르던 婆閏을 카간으로 하면서 항가이 산맥
의 주변에서 유목하던 위구르계 투르크인들과 연합했다. 이런 지원에 힘입어 657년에 唐의 蘇定方은 서북으로 출정
하여 하로를 이식쿨호의 서쪽에 있는 추 강가에서 격파하였고 타쉬켄트로 도망갔지만 타쉬켄트인들은 하로를 잡아
唐으로 보냈다. 이로써 서돌궐도 중국의 지배권에 속하게 되었다.
2) 第2突厥帝國(682-743)
1. 엘테리쉬 카간Elterish Qaghan
고종의 치세 후반기에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665년부터 서돌궐의 두집단-노실필과 돌육-은
중국에서 임명한 카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독립을 회복하였다. 다음으로는 티베트인들이 타림분지로 밀려들어와
안서사진이라 불리는 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빼앗았다. 게다가 태종에 의해서 멸망된 동돌궐이 쿠틀룩 엘테리쉬
Qutlug Elterish의 지휘하에 부흥한 것이다. 동돌궐은 항가이산맥지역과 오르콘 상류의 전통적인 핵심지역에서 재
건되었다. 683년에 쿠틀룩은 토뉴쿡Tonyuquq의 협조를 받아 제국 부흥에 따른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하였다. 탁월한
정치가였던 토뉴쿡은 한때 산서성 북부근처에 있는 雲州에 변경지역에서 唐의 행정관리직을 세습했던 가문 출신으
로 태종이래 멸망된 많은 돌궐의 지배층처럼 토뉴쿡도 중국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쿠틀룩이 투르크의 독립을 이
룩했을 때 톤유쿡은 그와 합류하여 최고의 참모가 되었다. 682년이후 쿠틀룩과 토뉴쿡은 唐의 서북변지방을 해마다
약탈하였으나 685년에는 唐軍에게 패하여 결국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4년동안 전쟁을 감행한 끝에 돌궐은 唐의
종주권에서 완전히 해방되었다. 쿠틀룩의 침략은 돌궐제국 재건의 서막을 연결하게 되었다. 위대한 쿠틀룩 엘테리
쉬는 호쇼 차이담 비문에서 엘테리쉬카간이라는 이름으로 전한다. 재건된 돌궐제국을 흔히 제2돌궐제국시대라고 부
른다. 엘테리쉬와 토뉴쿡이 승리를 획득한 후에도 초원의 분위기는 약 2세기전 최초의 카간 부민이 당면했던 것들
보다 어려웠다. 그때는 초원을 제패한 세력은 오직 돌궐족이었고 반발세력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엘테리쉬는 돌궐을
계속 지배하려는 唐과 대적해야 했고, 쩉뢰스Tölös, 투르가쉬Turgash등과 같은 돌궐부족연맹들과도 전쟁을 수행하
여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91년 엘테리쉬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건된 돌궐제국은 동부초원지대에 확고한 기반
을 마련하였다.
2. 카파간 카간 Qapaghan Qaghan(691-716)
唐은 고종의 죽음으로 측천무후가 정권을 장악하였다. 무후는 산서와 하북의 변경지역을 거의 매년 약탈하는 쿠틀
룩의 동돌궐에 대하여 성공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다. 무후는 투르크족의 하나인 투르가쉬를 지원하여 그를 측면에
서 공격하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투르가쉬의 수장인 烏質勒은 엘테리쉬에게 패하여 그의 종주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
었다. 엘테리쉬는 691년에 사망하였는데 쿠틀룩 엘테리쉬의 아우이며 계승자이었던 默?에 의해 돌궐제국은 더욱 번
성하였다. 그는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온 군주로서 오르콘 비문들에서 카파간카간Qapaghan Qaghan으로 불린 인물이
다. 711년경에 카파간은 서돌궐로 하여금 자신을 카간으로 승인하게 하는 돌궐제국의 가장 중요한 소득을 성취하였
다. 그는 측천무후를 상대로 唐을 수호하는 척 하면서 唐의 영역에 대한 약탈을 계속했다. 694년에 그는 영하 근처
의 靈州를 약탈하였고 698년에는 북경 서쪽지역을 약탈하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는 唐과 일시적인 연맹을 결성해
요서와 열하에 있는 몽골계 유목민인 거란을 쳤다. 李수장은 카파간의 동맹자가 되었는데 얼마 후 그가 죽자 거란
인들은 李의 아들을 몰아내고 돌궐과의 동맹을 깼다. 카파간은 추방당한 그 사람을 다시 앉히기 위하여 唐과 연합
하여 唐의 비단, 쌀, 무기 등의 원조하에 거란은 붕괴시켰다. 무후는 카파간이 자신을 영속적으로 지지할 것으로
믿었으나 카파간은 영주에 대한 약탈을 재개하였다. 약탈이 있을 때마다 카파간은 수많은 포로와 엄청난 전리품을
갖고 몽골리아로 돌아왔다. 게다가 카파간은 동쪽으로는 케룰렌 상류의 바이르쿠Bayirqu사람들을 정복하고 북쪽으
로는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인들을 격파하였다.
카파간은 699년에 서쪽으로 일시적이나마 서돌궐의 두 집단인 돌육과 노실필을 복속시켜 가공할 만한 통합을 이루
었고 550년의 돌궐대제국이 거의 완전하게 재건되었다. 투르가쉬의 수장인 오질륵의 아들인 沙葛은 저항을 시도하
여 카파간에 대항하여 서돌궐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도 패하여 카파간에게 살해됨으로써 711년에 카파간
은 돌궐족의 유일한 카간이 되었다. 카파간의 영광도 잠시, 카파간은 늙어갔고 돌궐족은 그의 잔인함과 독재에 싫
증을 내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군소부족의 수령들이 당에 충성을 바쳤고 케룰렌 상류에서는 반란이 일어나 결국 그
들을 격파하고 귀환 도중 죽었다.
3. 퀼 테긴Kül-tegin과 벨게 카간Bilge Qaghan(716-734)
그러나 카파간이 갑작스럽게 죽고난 후, 카파칸의 죽음은 돌궐족 내부의 심각한 혼란으로 이어졌다. 생전시의 카파
간을 적대시하던 내부 세력들이 많았으니 카간位의 계승권을 두고 심각한 위기가 발생하였다. 그 위기는 엘테리쉬
의 아들인 퀼테긴Kül-tegin에 의하여 극복될 수 있었다. 카파간의 조카인 퀼테긴은 정변을 일으켜 카파칸의 아들을
죽이고 그의 가족과 참모들도 죽였다. 오직 형의 장인이며 부왕때의 현명한 참모였던 70세의 원로정치인 토뉴쿡만
이 살아남았다.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퀼테긴은 제위에 오르지 않고, 그의 형인 默棘連을 새로운 카간으로 즉위시
켰다. 그는 현명한 제왕이라 불리는 빌게 카간Bilge Qaghan으로 716년부터 734년까지 초원을 통치했다. 한편 카파
간의 죽음과 퀼테긴의 정변을 틈타 유목민들이 돌궐제국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퀼테긴과 빌게는 질서를 회복하
고 그들을 다시 복속시키기 위해서 온 힘을 다했다. 이런 끊임없는 전투속에서 동돌궐은 서돌궐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했다.
퀼테긴과 빌게의 집정 아래에서 돌궐제국 전역은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강화•구축시키려는 노력이 있었고 이러한
사실은 돌궐비문에 나타나 있다. 더욱 빌게 카간의 계획중에는 유목민족인 돌궐족의 정착화를 증가시키는 것도 있
었는데 이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구축을 명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빌게는 唐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
나 토뉴쿡은 현종의 시대에 열리던 절대전성기의 唐에 대해서 우려를 표명했고 중국을 공격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
라고 하였다. 토뉴쿡의 조언으로 빌게카간은 중국과 평화관계를 맺고자 하였으나 현종이 거절하고 거란과 연합하여
돌궐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토뉴쿡의 예상대로 거란과 중국이 공격 시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여 결국은 휴전이 이
루어졌다. 그러나 카간에 대한 잠재적인 불만과 그의 對중국정책에 대한 반대로 최후의 정치적 위기가 왔다. 731년
에 퀼테긴이 사망하고 수년 후에 빌게는 그의 신하에 의하여 독살되었다. 빌게의 죽음은 돌궐제국의 실질적인 종말
이었다. 빌게의 오르콘 비문과 돌궐문자가 입증하는 그들의 문화, 그리고 비교적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던 빌게 덕
택으로 734년 빌게가 신하에게 독살 당했을 때 동돌궐은 위대한 문명의 본류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으나 결국 카간
의 죽음으로 지속적인 분란과 붕괴가 초래되었다.
4. 돌궐의 멸망
빌게 카간이 사망하자마자 형식적으로 지속되어온 돌궐족의 통합양상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빌게의 뒤를 이어 두
카간의 즉위하였으나 별로 중요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첫 번 카간은 즉위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
였고 뒤를 이어 동생 텡리카간Tengri Qaghan이 幼兒로서 즉위하였다. 따라서 텡리의 모친이 섭정을 하게 되니 다수
의 돌궐족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텡리는 그의 관리였던 동부의 샤드Shad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돌궐의 全영토는
각종 부족들을 지배하려는 세력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샤드는 이후 오즈미쉬 카간Ozmish Qaghan이
라는 이름으로 카간임을 자청하였다. 오즈미쉬는 바로 세부족의 반란에 직면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며 동돌궐의 남은
카간 씨족들은 743년에 당으로 피난하였다. 이제 초원의 제국을 누가 차지하느냐만이 문제였다. 이 분쟁의 최후 승
리자는 위구르Uighur족이었다. 위구르가 카를룩의 도움을 받아 성공하였고 위구르의 칸은 오르콘 상류에 있는 제국
의 근거지에서 쿠틀룩 빌게Qutlugh Bilge라는 호칭으로 카간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등극은 당시에는 강력한 당으
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며 당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지배영역은 바이칼 호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즉위한 다
음 해 죽었으나 그의 제국은 100여년간 그대로 존속하였다.
3) 위구르의 오르콘帝國
1. 위구르의 성립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위구르족은 匈奴족의 먼 후예이고 직접적인 조상은 쩉뢰스 부족연맹인 구성철륵부 가운데 回
骨部에 속하던 일개 부족이었다. 쩉뢰스 부족연맹이 7세기 초에 와해됨으로써 위구르는 셀렝강가 상류지역에서 독
자적인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629년은 위구르족의 조공사신이 내조한 사실을 최초로 기록된 해이다. 위구르는
당시 제1돌궐제국시기에 내부에서 계속되던 분열을 조심스럽게 이용하며 641년경에는 이미 동부초원지대의 상당한
부분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파간카간이 활동하던 8세기초에는 다시 돌궐의 지배하에 완전히 흡수되었다.
위구르는 빌게카간이 사망한 후에 발생한 돌궐의 멸망적 조짐이 뚜렷한 혼란기에 위구르를 중심으로 베스밀Besmil
과 카를룩Qarlug 두 돌궐부족이 연맹을 결성하여 돌궐제국의 잔존세력을 분쇄할 수 있었다. 돌궐의 멸망과 당의 내
분을 틈타 위구르는 정식으로 744년에 나라를 세웠다. 돌궐에서 위구르로의 패권이동은 사실상 초원에 그다지 커다
란 변화를 주지 못했다. 그 이유는 초원의 패자가 단지 유연에서 돌궐로, 돌궐에서 위구르로 바뀐 정도였기 때문이
다.
당시 위구르의 수장이며 위구르제국의 건설자는 骨力表羅K'olipeilo이었으며 그의 위호는 쿠틀룩 빌게 퀼 카간
Qutluq Bilge Kül Qaghan으로 744년부터 747년까지 재위하였다. 그가 건설한 위구르 제국은 흔히 오르콘 제국이라
불려지며, 위구르족이 세운 수개의 국가들의 효시가 되었다. 그중 몇몇은 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다. 오르콘 제
국은 840년에 키르기즈Qirghiz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거의 1세기를 동부 및 중남부 초원을 지배하였다. 위구르는
늘 중국의 위험한 이웃으로 여겨졌던 돌궐과는 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상당히 충성스러운 추종자였고, 그 뒤에는 유
용한 동맹자가 되었다가, 마지막에는 때로 부담스럽긴 했지만 唐의 귀중한 보호자였다. 위구르가 초원을 지배하던
때는 위구르를 능가할 부족이 없었다. 게다가 唐에서는 과거 태종이나 고종 등과 같이 정복에 사활을 거는 황제도
없고 錦上添花격으로 安史의 난이 일어나 唐은 위구르에 대처할 만할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오히려 위구르의 군사
적 원조를 바랬다. 위구르는 안사의 난때 군대를 파견하여 唐왕조를 도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후 그 세
력을 중국으로 확대하였다. 위구르의 카간은 안사의 난을 진압해주는 댓가로 황실 공주를 얻게 되었다. 광할한 초
원에서 도착한 위구르 군대는 그곳에서 唐軍과 연합하여 洛陽을 반란군으로부터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
다. 唐숙종은 위구르의 카간에게 감사의 표시로 칭호를 잔뜩 주고 그들이 떠나기 전에 매년 2만 단의 비단을 주기
로 약속했다.
이후 위구르는 唐에 경제적 도움을 요구하고 조공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키워 나갔으며 정치•사회적으로 변화를 가
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唐의 내전은 가라앉지 않았고 다른 반란세력이 또다시 唐을 위협하였다. 登里牟羽라고 알려
진 새로운 위구르 카간은 반란군의 사신에 의해 처음에는 반란군과 연합작전을 벌여 궁지에 빠진 唐의 어려움을 이
용하려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를 일으켰으나 도중에 기민한 唐의 사신이 모우카간의 마음을 바꾸게 하여 그는 唐과
의 동맹으로 선회하였고 762년에 위구르는 황제를 위해서 반란군으로부터 洛陽을 수복해 주었다. 그러나 위구르는
원조의 대가로 長安과 洛陽 두 도시를 완전히 약탈하였고 그 곳에 위구르인을 거주시킬 것을 唐에 강요하였다. 당
시 唐의 조정은 위구르의 약탈을 무력으로 방지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고 위구르의 거주 문제는 모우카간에게 다량
의 선물을 증여한 후 회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쇠망의 길을 걷고 있던 唐은 계속 위구르의
군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는 중국 내에서는 唐을 원조하였지만 형식적으로 중국의 관할 아래 있던 오
아시스國의 독립운동에도 응원하기도 하였다. 모우카간은 763년이 되어서야 초원으로 되돌아갔다.
2. 위구르의 발전
위구르는 그 이전의 유목국가와는 다른 성격을 띠고 있다. 위구르의 수도는 당시 오르두 발릭Ordu Baligh라는 이름
으로 알려진 현재의 카라발가순Qara-Balghasun이 있었으며 그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정착사회의 특징들이 혼
합된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카라발가순은 오르콘 상류로 과거 흉노의 선우와 돌궐의 카간들의 거처가 있었
고, 후일 칭기스칸 일족의 카라코룸이 생기게 된 곳 근처였다. 위구르는 수도와 군사적 요충지, 그리고 무역로의
요지에 도성을 세우고 이곳을 중심으로 유목도시문화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도
시 문화는 농경민족과 농경민의 기술자 집단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만든 취락의 발전형태로 볼 수 있다. 이
것은 유목민족의 사회구조가 그들의 발전의 한계점에 도달하였음을 의미하며, 결국 위구르를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정복왕조가 출현하게 된 역사적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위구르는 도성을 건설하고 이곳에 중국인, 소그드
Sogdian人을 이주시켰기 때문에 중국과 서아시아 문화가 흘러들어 왔다.
특히 모우카간의 재위기간에 최극성에 달하였다. 그는 중국의 宰相, 平章事, 尙書, 刺史 등의 관명을 사용하기 시
작하였고 또한 군신의 차별을 엄격히 하여 국가체제를 점차로 중국풍의 군주독재적인 관료체제로 전환하였다. 당시
위구르의 판도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이칼호에 이르렀다. 위구르는 중국과 독특한 관계를 가져 중국의 對중앙아
시아 민족교섭史에서 달리 유레가 없는 관계를 수립하였다. 그러한 관계는 위구르가 당과의 교역이 절대로 필요했
고, 또 당의 군사력이 미약하였던 이유로 더욱 촉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위구르는 상업활동에 뛰어나 동서 교통로
를 이용하여 중계무역을 활발히 추진하였다. 위구르와 소그드는 교역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 때문에 쉽사리 관계가
성립될 수 있었다. 최소한 4세기부터 소그드는 漢代 장건이 개척한 비단길을 통한 중계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
하여 왔다. 소그드인들은 장안을 포함하여 아시아의 여러 중요도시에서 도매상권을 가지고 있었다. 위그르는 소그
드인들과 접촉함으로써 상당한 영향을 입었다.
위구르는 문화적으로 초원 역사상 처음으로 유목민족의 샤머니즘이 아닌 마니교를 국교로 정하였다. 위구르인들이
소그드인들의 중계로 이란의 죵교 마니교를 받아들였던 사실이다. 이 종교로 개종한 것은 모우카간이 唐의 반란군
을 진압하고 난 후에 옛 수도 洛陽에 머무르고 있던 762-763년간에 일어났던 것이 분명하며 그들의 정신적인 면에
서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모우카간은 마니교 선교사들과 접촉을 하게 되어 그의 제국으로 돌아갈 때 선교사들을
데리고 갔고 마니교로 개종하게 된 것이다. 마니교는 위구르의 국교가 되었고 모우카간은 마니교의 승려와 소그드
인, 그리고 중국인을 그들의 정치 문화의 고문으로 받아들였다.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인 慕寐가 마니교의 제사장으
로 위구르의 영토 안에 주재하게 되었다. 카간의 보호를 받는 마니교 사제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
고 그 당시 唐의 기록도 "위구르는 항상 마니교도와 나라일을 상의했다"라고 적고 있다. 고도로 조직된 종교를 신
봉하게 됨으로써 위구르민족의 정착화는 가속화되었으며, 그에 따라서 위구르 인구는 선대의 故地인 산악지대로부
터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위구르인들은 유목민족으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또한 9세
기에는 룬문자Runic script와 같은 불편한 돌궐문자를 대신하여 소그드문자를 변용하여 쓰기 시작하였다. 위구르는
페르시아에서 마니교를 들여오면서 소그드문자도 차용했는데 이 소그드 문자는 시리아문자에서 기원한 것으로 위구
르는 그것을 변형시켜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었다. 위구르제국내에서 발전된 문화와 생활양식은 초원에서는 예외적
인 것이었다.
3. 위구르의 쇠퇴
위구르는 모우카간이외에 더이상 위대한 카간을 배출하지 못하였다. 이점은 돌궐과 대비되는 것인데 모우카간시대
에 위구르는 가장 전성기가 되었고 모우카간 사망후 그들은 분열과 멸망의 길을 걸었다. 위구르는 모우카간의 사망
과 더불어 정치적인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오르콘제국의 정치적인 혼란의 첫 번째 위기는 모우카간의 사촌
이며 재상이었던 바가 타르칸Bagha Tarqan이 모우를 암살하고 스스로 카간位에 등극함으로써 발생하였다. 바가 타
르칸은 780년에 唐으로부터 정식적인 승인을 얻었다. 오르콘 제국의 혼란은 외부적인 이유들로 더욱 악화되었다.
위구르인들은 자신들의 신지인 외튀켄지방을 버리고 투르환Turfan지방의 정착민족들로 둘러싸인 지역의 도시로 이
주하여 정주하면서 그지역에 다른 부족들이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유목민족의 정주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위구르의 군사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또한 위구르의 군력 준비의 쇠퇴를 가져 온 또 다른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안
사의 난 이후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唐의 군사력이 허약하였던 것이다. 832년의 오르콘제국 내부의 혼란한 정세는
초원에 할거하며 약탈행위로써 富를 축적하는 전통적인 유목민 습성을 버리지 않은 다른 부족들이 침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840년이 되어서는 그들의 수도 카라발가순이 함락되고 카간이 살해되어 초원의 제일인자 오르콘제국은 여전히 유목
적이고 야만적인 상태로 남아있었던 예니세이 강상류에 살던 키르기즈人들에 의해 정복되었다. 키르기즈는 돌궐민
족의 일종으로 그 이전 역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들은 바로 위구르에 의하여 외튀켄지방에 정착이 허용된
부족이었다. 그러나 키르기즈는 위구르 멸망에 성공하긴 했지만 위구르를 대체하는 새로운 강력한 부족연맹이나 제
국을 건설하지 못했다. 키르키즈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위구르를 약탈한 후 카라발가순의 주변의 오르콘 강 상류에
있던 위구르를 대체하기 위해 이주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은 위구르에 의해 정주화가 이루어진 초원을 다시 유목
과 야만으로 되돌려 놓았다. 키르기즈는 920년까지 그 지방의 지배자로 남아 있다가 몽골계 거란에게 패하여 다시
북쪽의 예니세이 초원으로 밀려나 전통적인 유목생활을 계속하였다. 키르기즈의 위구르 멸망의 주된 역사적 의의는
초원을 위구르인들의 영향 즉, 정착민족 문명의 영향으로부터 차단시켜 버린 것이다. 초원은 징기스칸이 나타나 몽
골제국을 세우는 12세기 중엽까지 또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다른 위구르족은 초원의 제국을 상실하고 타림북부의 오아시스 지역에 정착했다. 오르콘 제국은 여러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몇몇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르룩과 대치하게 되었고,
몇몇은 중국으로 도피하여 甘肅지방의 최서부지역에 정착하였다. 그중에서 사릭 위구르Sarigh Uighur는 서부 甘肅
에 860년경에 정착해 1028년 탕구트에게 정복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10세기에 돈황에서 불교를 신봉하며 번영을 누
렸던 위구르는 재빨리 마니교를 포기하고 그 지역의 불교로 개종하였다. 위구르는 알타이와 오르콘의 지역의 투르
크-몽골계의 국가에게 '문명의 고사'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12세기의 나이만과 13세기의 칭기스칸의 국가에게 위구
르는 書記와 관직과 문자를 제공하였다. 9세기 중기에 이르러 위구르가 멸망한 후 북아시아세계에는 유목국가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위구르제국이 초원의 마지막 유목제국이었던 것이다.
4) 轉. 結論
홀연히 나타나 고대 서아시아의 제국을 무너뜨린 뒤 갑자기 북방으로 돌아간 스키타이(B.C 6-3C), 게르만족을 밀어
내면서 로마제국을 혼란에 빠뜨렸던 훈족(4C), 멀리 북방 바이칼호 근처에서 일어나 한세기도 지나기 전에 베이징
과 바그다드, 키예프를 함락시켜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13-14C)…. 말을 타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며 한 시대를 호
령했던 중앙아시아의 유목 기마민족들. 그러나 17세기 몽골 멸망을 끝으로 역사의 기억 뒤편으로 밀려났던 비운의
민족들, 흑룡강을 중심으로 중국의 동북이들, 이렇게 초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책을 읽고서이다. 고시베리아
족과 스키타이, 서융, 적적, 흑수말갈, 동이, 예맥, 숙신, 읍루, 에벤키, 오로촌, 흑룡강, 바크하룬, 요하, 케룰
런, 아무르, 실카, 하라무렌 등등...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하고 고전적인 냄새가 나는 민족과 지명들이 가슴속에
와 닿았다. 이미 한자식 음역으로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더 생소한 이런 단어가 하나하나 더욱 새로웠다. 그
래서 짧은 지식으로나마 조금이라도 구체적 사실인지 구명하고 싶어서 논문의 주제로 이 범위를 생각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어느 정도 고전미가 없어진 南宋 이후의 유목민들, 아니 정복왕조라 해야 더욱 어울릴 거란이나
여진, 몽골 등의 국가에는 눈길이 덜 가게 되었다.
초원의 역사를 쓰면서 참으로 글의 중립을 지키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어느 나라의 입장에서 쓰느냐에 따라 침
략이 정복이 될 수 있고, 아니면 정복이 침략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가 백
제나 고구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면 그것은 정복으로 표현하였고 반대로 백제나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 침략
행위라 표현하였다. 그것은 김부식이 慶州 金씨로서 비록 신라는 멸망하였으나 신라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는 중립
성을 잃은 사가로서 그릇된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점이 현재에 와서 삼국사기가 비판 받는 이유 중의 하나이
기도 한 것이다.
역사상 여러 유목국가들이 초원의 상당 부분을 지배하였지만 몽고 이전에는 유라시아대륙의 유목지역과 정착지역을
모두 동시에 지배할 수 있었던 국가는 없었다. 이러한 과업은 몽고의 부족연맹에게 주어졌었으니 몽고인은 칭기스
칸의 영도하에 서로는 러시아의 평야지대로부터 동으로는 중국의 해안까지 북으로는 북극에 접하는 시베리아의 끝
으로부터 남으로는 태양이 작열하는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인류역사상 가장 크고 비교적 장기간 유지 될 수 있었던
제국을 건설하였었다. 유목민족의 제국, 특히 몽고제국은 마치 우연히 건설된 혹은 신의 저주에 의하여 창조된 국
가처럼 빈번히 언급되고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칭기스칸의 몽고제국의 기원은 저멀리 140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뿌리가 바로 흉노이고 과정이 돌궐과 위구르이고 전신이 거란의 遼와 여진의 金인 것이다. 논문의 범위를
유목국가로 한정해서 잡으면서 상당히 고민이 되었다. 유목국가를 잡기에 탁발선비는 초원의 아들로 어울리지만 그
이후의 북위는 오히려 잠입왕조나 정복왕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목국가와 중국과의 관계가 남북대립체제
였다면 북위 또한 南朝의 宋•齊•梁•陳과 대립하였기 때문에 유목국가의 범주에 넣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기나긴 초원을 여행한 끝을 내야겠다. 처음 욕심으로는 우리 나라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던가 아니면 우
리민족의 기원을 중국사와 연결하여 그들 눈에 비친 한민족의 역사를 찾고 싶었다. 그러나 학계에 발표된 자료가
빈약하고 스스로 규명하기에는 역량이 너무 미약하여 어쩔 수 없이 시선을 서쪽으로 더 넓혔더니 그 동안 교과서에
서 빠져있던 유목국가들이 있었다. 이제 막연했던 그 부분을 채워 넣었으니 사가로써 한 발을 내?은 느낌이다. 논
문을 완성해 나가면서 결코 동아시아에는 중국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흉노, 탁발,
돌궐, 위구르등이 중국을 유린하고 중국의 문물을 천하게 여기며 오히려 서아시아의 문화를 더욱 흡수하였으니 우
리가 알고 있는 중국은 단지 한국인이 알고 있는 중국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제 중국사를 대하면서 보
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게 될 것 같다.
結. 參考文獻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Rene Grousset 1999 사계절
『유목민족제국사』 Luc Kwanten 1984 民音社
『중국의 역사3』 陳舜臣 1995 한길사
『동양사개론』 申採湜 1996 三英社
『중국통사•上』 傳樂成 1981 宇鍾社
『중국중세사』 宮崎市定 1996 新書院
「고대유목국가의 構适」 金浩東 1989 講座中國史2
*** 年表 ***
B.C. 221 秦始皇의 천하통일
206 漢건국(劉邦)
198 漢•匈奴 화친(60년간)
174 무특死•노상階位
129 漢•匈奴 1차 대립(~119)
108 朝鮮멸망
99 漢•匈奴 2차 대립(~90)
60 東•西 匈奴 분열
31 東匈奴의 稱臣(호한야선우)
A.D. 8 新건국(王莽)
25 後漢건국(유수)
48 南•北 匈奴 분열
88 北匈奴 붕괴
220 後漢 멸망
308 永嘉의 난(흉노선우 유연의 稱帝)
316 西晉 멸망
317 東晋 건국(史馬睿)
338 代 건국
370 代 멸망
398 魏 건국(拓跋珪)
402 柔然의 고차토벌(제국으로 발전)
都武帝의 柔然 정벌
425 太武帝의 柔然 정벌(~470)
439 北魏의 화북통일
502 柔然 내란
534 東•西魏 분열
550 北齊 건국(高洋)
557 北周 건국(宇文覺)
552 突厥건국(Bumin)
555 突厥의 柔然멸망
東•西 突厥분열
557 北周의 화북통일
581 隋 건국(楊堅)
隋文帝의 천하통일
618 唐 건국(李淵)
630 唐의 東突厥지배(~679)
657 唐의 西突厥지배(~665)
682 엘테리쉬카간 시대(~691)
691 카파간카간 시대(~716)
699 突厥의 대제국 완성(西突厥 복속)
711 카파간 突厥 유일한 카간이 됨
716 빌게카간 시대(~734)
743 突厥 멸망
744 위구르 건국(쿠틀룩 빌게 퀼 카간)
755 安史의 난
780 위구르 분열
840 위구르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