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1_10 : 한단고기_거란,여진,위구르]* 위구르 역사 (번역자료) <김용은> 2001. 8
위구르 역사 (번역자료) ◎번역 및 편집 : 김용은(ad313@softhome.net)
http://myhome.hananet.net/~ad313)
1. 들어가는 말
신장에 첫발을 내 딛은지 어느덧 5년(199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 문서는 5년 전 마음의 부담감을 안고서 신장을 방문하고서 다녀와서야 그곳에 관해서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인터넷의 자료들을 검색하던 중 오스트리아 대학의 아시아 연구실에서 정리한
위구르의 역사를 번역한 것을 지금(2001년 8월)에 와서야 정리해서 자료를 공개하는 것이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앙 아시아의 역사에 관해서 서적이나 관련 글들을 한국에서 발견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위구르 종족(투르크 종족 중 위구르 종족)에 관한 것은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곳을 향한 끊임없는 발길들이 그곳의 역사, 정치, 경제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게 하고
그러한 관심들이 위구르에 관한 소식들을 정보화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위구르 역사에 관한 한글 문서들이 여러 개 있지만
이 자료가 비교적 간결하고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기에 편집하여 공개한다.
역사나 위구르 종족에 대해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어상의 문제나 각주에서 미숙한 부분이 있으리라 본다.
또 특별히 위구르 종족에 관한, 투르크인들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이 빈약하고 사람마다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기에 여기의 역사기술 내용과 다른 곳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돌궐, 훈, 흉노로 대표되는 광범위한 종족의 명칭도 사용하지만
구체적으로 위구르 종족의 명칭을 가급적 모든 역사의 사건에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위구르 종족에 초점을 맞춘 역사 요약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자료가 다른 자료들과 구별되는 장점을 가질 순 있겠다.
하지만 위구르 종족을 부각시키는 인용과 관점을 가지고 다루었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중국 역사와 관련이 많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중국의 역사의 자료들을 삽입하여 편집하였다.
미흡하지만 아무쪼록 위구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위구르 역사를 읽기 전에
1) 중국이 불렀던 흉노(匈奴)와 훈족의 관계
훈족이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地帶)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系)의 유목 기마민족이다.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異論)이 있다.
역사적으로 훈족을 흉노의 후예로 보는 까닭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등에 기인하며, 흉노의 이름에서
'흉'이라고 불리는 종족을 중국에서 멸시의 의미에서 '노'(奴)를 붙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흉노족이란 대체 어떤 민족인가? 잠시나마 흉노족에 대해 알아보고 훈족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흉노족의 기원에 대해서 한단고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서기전 2177(-.-;;) 난하, 황하 북쪽 땅의 욕살(지방관리) 색정이란 사람을 약수로 유배했는데
이 사람이 흉노족의 조상이 됐다.” (-.-;), 믿거나 말거나,
어쨋든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몽골계(系)․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특히 투르크계설(系說)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이것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1)
흉노족은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국가의 명칭.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훈육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 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2)라 칭하였다.
묵돌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邀擊)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술․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東)은 러허[熱河]에서부터 서는 동(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은 오르도스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內)몽골․오르도스에 있었으며,
전자(前者)로부터는 그 물산(物産)과 교통․통상보호세(保護稅)를 거두었고,
후자에서는 스키트․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를 제작하였다.
이리하여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는 자주 흉노에게 원정군을 보냄과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
이와 같은 무제의 정책으로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또 정령․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隸屬諸族)이 독립하였다.
더욱이 흉노는 내분이 일어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선우와 그 아우인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東匈奴)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BC 54).
호한야는 한나라에 항복, 그 원조하에 들었으므로
질지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으나,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王昭君: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제2대 호한야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함으로써
호한야가 이끄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
남흉노는 간쑤[甘肅]․산시[陝西]․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며, 중국 북변․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前趙)․북량(北凉)․하(夏)를 세위, 점차 중국화(中國化)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고,
그 결과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국가는 와해되었다.
흉노 제국이 AD155년 멸망된 후,
남은 세력들은 천산 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넘어 서진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카자흐스탄과 남 시베리아에 이르러 이 지역의 원주민을 장악하고 새롭게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후에 흉노족은 서진을 게속하여 우랄 산맥에 도달하게 되고,
이곳에서 게르만계 고트족과 만나게 된다. 이들과의 접촉은 흉노족의 우랄화를 낳게 된다.
훈족은 4세기 중엽 알란국 정복을 시작으로 374년 볼가지역에 등장했다.
훈 제국은 기마를 이용한 기동력과 전술로 동 고트를 공격 374년에 붕괴시켰고,
375년 서 고트의 왕을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이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 이동이 시작된다.
훈족에 밀린 서고트는 395년 로마에 유입, 로마제국은 동서로마로 급격히 분리되었고,
고트족 이외에 많은 동유럽의 부족들이 로마 제국내로 유입되어 로마의 큰 위협세력이 되었다.
이후 훈족의 울드즈는 400년경 투나강 유역을 공격함으로써 서고트는 다시 이탈리아 변경으로 쫓겨났다.
바로 이때 훈족의 명성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훈족에 밀린 동고트와 반달족등의 게르만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
훈족은 로마와 연합으로 이들을 제압하게 된다.
이때, 훈 제국의 영토는 아랄 해 동부지역에서 동유럽, 발칸반도에 이르렀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틸라는 5세기 전반의 민족 대 이동기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本據)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 부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지역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갈리아에 침입하여 오를레앙을 공격하였다(451).
이에 대하여 서로마는 서고트 및 프랑크와 동맹군을 편성하여 맞아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아틸라는 철군을 개시, 돌아오는 도중 마우리아쿠스(샬롱쉬르마른의 남쪽)의 벌판에서
연합동맹군에게 패하여(카탈라우눔 전투), 서유럽의 정복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북 이탈리아에 침입, 로마에 육박하였으나, 로마교황 레오 l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그후 아틸라의 뒤를 이은 이르네크는 훈족을 이끌고 남부러시아로 이주하였다.
후에 이들 훈족들에 의해 헝가리와 불가리아 탄생하게 된다.
2) 타브가츠(북위)
타브가츠, 곧 위진 남북조 시대3)의 북위(北魏)는 화북지방의 16국 중
선비족(鮮卑族)4)이 중국 화북지역을 통일.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 후위(後魏)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쪽 변방
을 지키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 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도읍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도읍을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服), 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법(均田法)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운 북방 민족의 무장(武將) 세력인 우문태(宇文泰)와 고환의 대립이 격심해졌으며,
따라서 양자는 각각 북위의 종실을 천자로 옹립하여 534년 북위는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었는데,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3) 돌궐제국
돌궐제국은 스텝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기록을 남긴 민족으로 평가된다. 몽골리아 북부 오르혼강 유역에서
발견된 튀르크어 비문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돌궐족 자신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라는 말은
6세기말 비잔틴 역사가 아가티아스의 비잔틴문서와 아랍시인 나비가트 알 주브야니의 아랍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돌궐이라는 명칭은 중국인이 튀르크족을 북방 오랑캐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만든 조어이다.
돌궐제국은 흉노의 일파로 여겨지고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족은 원래 직업은 철공업이었고 처음에는 연연5)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이 바로 스텦 민족사상 처음으로 도시를 건설한 부족이다.
돌궐제국은 부민 혹은 투멘이라고도 하는 고대 튀르크6)의 지도자에 의해 545년 경에 건설되었다.
그는 552년 서위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써 스텦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의 사망후 그의 두 아들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583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동서돌궐이 이용당하기 시작했다. 612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실패로 멸망하자
잠시 부흥하는 듯 했지만 곧이어 등장한 당나라에 의해 반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의돌궐제국인 후돌궐을 세웠다.
일테리쉬는 10년간 스텦통치를 지속하다 각종 유목민족의 내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742년 바스밀부족이 위구르를 카를룰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위구르 사이의 세력다툼에서
위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써 위구르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4) 탈라스 전투
탈라스 전투는 대규모의 전쟁은 아니었다.
고선지가 거느린 군대는 3만명 가량이었고 사라센 군대나 돌궐족 군대도 큰 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사람들이 그 싸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선지는 그 패전으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는 뒤에 안록산의 군대와 싸우다가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먼저 그 싸움에서의 패배는 중국의 서역 경영에 치명적이었고
곧 일어난「안사지란」으로 당(唐)이 전성기에서 곧바로 쇠퇴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명(明)이 신강성 동부에 잠시 진출했던 것을 빼놓으면
18세기 중엽에 청(靑)이 진출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서역이 사라센의 세력 안에 들어감으로써 서역은 이슬람교 권역이 되었다.
서역은 원래 불교가 성하던 곳이었는데, 이슬람 세력의 모진 박해를 받아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센제국은 동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래 아라비아에서 나온터라 사라센제국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지중해지역으로 끌렸다.
그러나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실패했고,
732년에 투르 싸움에서 사르르 마르텔에게 패배해서 사라센제국은 유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서역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사라센제국의 무게 중심이 상당히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수도가 지중해에 가까운 다마스커스에서 동쪽의 바그다드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문화적 영향이 더 크다. 사라센에게 붙잡힌 당의 주민들과 병사들 가운데는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슬람세계에 중국의 문명이 많이 전파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지기술이었으니 막 피어나던 이슬람 문화는 그 기술에서 큰 도움을 얻게된다.
제지기술은 유럽에 전해지면서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탈라스 계곡의 싸움은 소규모 전투였지만 큰 사건이었다.
그것의 영향은 1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신강성의 너른 땅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