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1_10 : 한단고기_거란,여진,위구르]* 중앙아시아 역사개관
1. 서론
2. 중앙아시아의 역사의 흐름
가. 흉노제국
라. 연연
다. 돌궐제국
라. 과도기의 제국들
마. 우이구르제국(오르콘제국)
바. 거란제국(遼나라)과 여진제국(金나라)
사. 셀축제국
아. 튀르크족의 이슬람화
자. 몽골제국
차. 몽골 세력의 종말과 그 이후
1. 서 론
지금까지 중앙아시아는 국제정치 혹은 지역학 연구에서 그리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소외된 혹은 잊혀진 지역
으로 남아 있었다. 또한 일반적으로 중앙아시아에 대해서 여러가지 부정확한 개념들이 우리 가운데 인식되어 온 것
이 사실이다. 자세한 중앙아시아 연구를 시도함에 있어서 어려움 중의 하나는 8세기 초 이전까지 이 지역의 거주민
들에 의한 기록문서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후 돌궐제국에서 문자가 발명되어 쓰여진 이후로 유
목 민족들은 비로소 역사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언어로 기록된 오르콘 비문의 사료들은 극히 제한적
이지만 8세기 이후의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과 중국 관계 등 당시 지역 상황에 대해 비교적 광범위한 자료를 우리에
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8세기 이전의 중앙아시아 상황에 대해서는 이 지역 주민이었던 유목 민족들이 자체 기록
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유목 민족 제국과의 분쟁 혹은 교류가 비교적 빈번했던 인접 국가들, 특히 중국이나
비잔틴제국의 기록을 통해 그들의 모습을 단편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심각한 문제점을 제기시키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정착 국가들에 의해 기록된 사료가 이들 유
목민족 국가들에 대한 극심한 편견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목민족에 의해 항상 위협을 당해왔던 정착국가들
이 그러한 편파적인 기록을 남겼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이 곳에 대한 정보 내
지는 연구가 건실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의 중앙아시아는 오늘날 이란 북방과 외즈벡키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즈스탄, 카작키스탄, 타직키스
탄, 튀르크메니스탄, 몽골, 중국 서부 중심도시 신강성등을 포함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스텝)지대를 중심으로
동부 유럽으로부터 만주에 이르는 과거 유목민족들이 활동하며 주거하던 광활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의 영토
는 대단히 넓으며 유사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는데, 한냉 건조하며 심한 일교차를 나타내는 기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대단위의 주거지 발달이나 많은 인구 증가가 어려웠다.
이들의 인구밀도는 낮았고, 주로 수렵과 목축을 하며 말을 사용하고 궁술과 기마술에 능했으며, 기마술을 이용한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과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군사적인 이점을 가지고 유목민족들은 정착국가들과의
전쟁을 수행했었으므로 스텝 유목민족 세력이 강성할 때, 정착국가들은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
나 속수무책이었다. 한편, 유목 민족들의 군사력은 군대의 규모에 의해 그 싸움 능력이 좌우되지 않았다. 비록 이
들은 수적으로 적을지라도 뛰어난 기마전술과 이에 따른 민첩한 기동력으로 상대를 무력하게 만들곤 했다. 중국은
진(秦)나라 이전부터 북방 알타이계 유목민족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아왔지만 스텝 세력의 공격을 효
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했고 번번히 실패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인종은 대체로 몽골로이드 인종이며, 언어적으로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알타이어족은 튀르크족(突厥
族)을 중심으로 몽골족, 만주족, 퉁구스족, 한(韓)족을 포함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거주민들의 대부분은 튀르크족
을 비롯하여 알타이어를사용하는 종족들이며, 간혹 우랄어, 인도-유럽어 등을 사용하는 부족들도 살고 있었다.
스텝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각기 자기들의 인종적인 특성을 유지하며, 군집(群集)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 각
각은 독립적인 정치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중 한 부족이 여러 부족의 공동체적인 이익이나 혹은 정치적 이유
로 다른 부족 국가들을 정복 통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유목민족 제국을 이루곤 했다. 그리고 보통 각 제국의 명칭은
우세한 한 지배층의 부족명을 따라 불렀는데, 이러한 패턴은 여러 시대를 거쳐 공통된 역사 현상으로 반복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 제국사는 거의 모두 비슷한 양상을 나타내며 반복되어 왔다. 즉 어느 한 부족에서 지도력과
군사전략적인 지휘력을 가진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와 다른 부족장들의 인준을 받고 부족 연합체 제국 전체를
지휘하게 된다.
이러한 부족 연합은 군사적인 힘이 강한 한 부족이 다른 부족들을 반강제적으로 통합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반적
으로 다른 제 3의 세력에 대항하여 거대한 세력을 이루기 위해서 카리스마적인 한 리더를 중심으로 해 자율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러한 부족 연합은 대개는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즉, 연합된 부족 연합은 다른 제 3의 국가를- 대개
는 정착민족 국가를- 경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침략하며, 이러한 목적의 전쟁에서 획득한 탈취물을 나누어 갖는 것
이다. 이러한 까닭에 대개의 유목민족 제국들은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이루기보다는 카리스마적인 리더를 중심으
로 부족장들의 협의체 형식으로 통치되었다. 중국은 유목민족 제국의 이러한 약점, 즉 경제적 이해관계를 통한 연
합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물질로 지도자들을 회유하고 이간질하는 정책을 폈는데 이러한 북방정책은 대체로 좋은 결
실을 맺곤 하였다.
한편, 유목민족 제국에서 부족장들의 추대를 받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사망할 경우, 제국은 급속도로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유목민족 제국들이 대개 2세대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유는 유목민족의 부족장들은 계
승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 전체를 통괄할 영향력있는 지도자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제국내의 부족간
에 갈등이 발생하여 내분이 일어나거나 공동체로서의 기능이 마비될 때 제국은 분열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정치적
공백기는 다른 제국이 발흥할 때까지, 즉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가 출현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시 영향
력 있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나타나면 그는 주변의 다른 부족장들의 인준을 받아 새로운 제국을 탄생시키곤 했
던 것이다.
2. 중앙아시아의 역사의 흐름
가. 흉노제국(匈奴帝國)
흉노제국의 창립자는 투멘(頭曼; Tume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러 유목 부족 집단들을 통합한 후에 선우(單宇 :
Shan-yu)라는 공식적인 관직명을 가짐으로써 흉노제국을 출범시켰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항해 쿠테타를 일으킴으로
써 정권을 탈취한 투멘의 아들 묵돌(冒頓: Motun)은 당시의 유목부족 국가들 중에 최강 세력인 동호국(東湖國)과
월지국(月氏國)을 제압하고 명실공히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그 후에 묵돌은 중국을 위협하
여 중국과 불평등 화친조약을 맺고 수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스텝 국가의 형성기는 중국 역사상 제 1차 전성기였던 한조(漢朝 206BC - 220AD)와 한조가 멸망한 후의 혼란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며, 이 때에 스텝 지대를 다스린 세력은 흉노제국이었다. 흉노제국은 스텝 지대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가조직은 아니었으나, 흉노제국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학자들은 근래에 흉노를 실질적인 최초의 스텝
제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흉노는 기원전 3세기경에 출현하여 오늘날의 중국 북방에 거주하면서 부족 국가를
이루어 한나라 이전에도 연(燕)나라와 진(秦)나라를 크게 위협하곤 했었다. 이로 인해서 이 시기에 만리장성이 건
설되었던 것이다.
흉노는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족(韓族) 등 소위 알타이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 연합체로서 지도층은
알타이어의 하나인 튀르크어의 한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이미 중국에 한조(漢朝)가 건설되기 이
전에 스텝을 석권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제국의 통치 영역은 오르콘, 셀렝가 강 유역과 외튀켄(Ötüken) 평원과 오르도스 지방이었다. 이 당시 스텝의
서쪽, 즉 아무다르야 강과 시르다르야 강 유역과 카스피해 지역에는 스키타이민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들의 적대국
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흉노는 연, 진, 한나라가 계속되는 동안 이들 중국
왕조들에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중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
다. 마침내 중국은 가능하면 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유화정책을 쓰면서 분열과 분리정책을 함께 써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정책은 이 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북방정책의 기본이 되어왔다.
기원전 1세기에 흉노족 지도층 내부에서 형과 아우의 세력 다툼이 벌어졌는데, 한조(漢朝)가 이에 개입하여 이들을
이간질시키면서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흉노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후한(後漢)의 광무제는 중앙아시아의 교
역로를 회복할 목적으로 흉노를 대대적으로 정벌했는데, 이로 인해 흉노는 급속히 쇠퇴하였고, 155년 다른 중앙아
시아의 민족이며 몽골계로 추정되는 선비(鮮卑)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스텝 지역에는 혼란과 정치적인 불안정 시기가 시작되어 5세기 초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역사 기록에 의해 분열시
대 - AD 2세기부터 6세기말 - 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남흉노의 후세들로 추측되는 부족들이 수 개의 왕조를 세웠
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는 거의 없다.
흉노제국이 붕괴된 후 약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온 훈족(Huns)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
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개연성이 많다. 학자들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 등에 기인한다. 흉노(匈奴)라는 이름은 우
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원시 알타이어(Proto Altaic) 흉(hyung)과 중국어 노(奴)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훈
(Hun) 혹은 흉(Hyung)족을 경멸시하여 부르는 것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다. 즉, 흉노인들은
자신들을 흉(hyung) 혹은 훈(hun)이라 불렀으나, 중국인들이 경멸조로 이 말에 '노예'를 의미하는 노(奴)를 첨가시
킨 것이다1).
한편, 흉노의 쇠망으로 인해 생긴 정치적 공백은 어떠한 스텝 세력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했는데, 당시 구체적인
흉노제국의 영향력과 정도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흉노사람들은 유
목 국가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수 세기후에 등장한 튀르크족(돌궐족)이 세운 돌궐제국은 흉노제국의 군사와 국가 조
직 형태를 답습하여 세워졌다.
나. 연연
북흉노 제국(155 A.D)을 멸망시키는데 있어 중국과 함께 일조를 담당했던 몽골계 선비족(鮮卑族)은 몽골리아 지역
에서 흉노의 대체 세력의 역할을 하지 못하였으며, 흉노 이후에 몽골리아는 약 2세기 반 동안 권력의 진공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A.D.400년경이 되어서야 강력한 새로운 유목 민족 제국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연
(柔然)이라고도 불리우는 연연(Juan-juan)이다. 그들의 역사는 비교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
것은 자료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중국 사료들에서 나타난 연연에 관련된 내용들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없었기 때
문이라 하겠다.
연연은 타브카치(Tabgach) 즉, 북위(386-534)2)의 창립자인 탁발규(拓跋珪 386-409)의 치세 기간 동안 역사 무대
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그 무렵에 사륜(社崙)이라는 지휘관이 나타나 한북(漢北 Karashar) 지방에서
소왕국을 건설하고 있던 고차(高車)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여 동쪽으로 우리나라에까지 세력을 떨쳤다고 전해
진다. 오늘날, 중국에 이웃한 이 새 강력한 제국의 기원에 대한 고찰은 활발히 진행 중이긴 하지만, 그들에 관한
진부한 계통학은 서로 일치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연연은 흉노족과 연관이 있다고
하며, 반면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동쪽 미개인들인 동호(東湖)의 후손들이라고도 한다.
위(魏)왕조의 연대기에 의하면, 연연은 277년에 위왕조 자신들의상에 의해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라고 하는데, 여기
에는 아마도 정치적 목적의 허풍과 과장이 다분히 첨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연연이라는 이름은 다소 경멸적인 별
명인 것같다. 최소한 철자법만 보더라도 그 글자들의 특성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을 알 수 있다.
연연의 생활 양식은 다른 유목민족들의 양식과 흡사했다. "그들은 물과 목초지를 찾아 이동하며," "텐트에서 거주
한다"는 것 등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며, 연연이 변발을 했었다는 것도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연연과 당
시 북중국의 통치 국가 북위(北魏)와의 관계는, 중국의 변방에 자리잡은 유목 민족들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이, 공격과 이에 대한 보복 공격,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과 침략 관계로 일관해 왔다. 여러 차례 북위는 공격의 주
도권을 쥐고 연연의 영토 깊숙히 침입했었다. 북위의 천자 세조(世祖) 태무(太武 423-452)의 통치 기간 때인 438년
과 443년에, 북위 즉, 타브가치 군대는 연연의 군대와 싸우려고 고비 사막을 가로 질러 갔으나 전투를 시작하지 못
했다. 왜냐하면 연연의 군대는 도주했으며, 많은 북위 군사들이 황량한 사막의 불모지에서 사멸했기 때문이다.
북위는 429년 이후에 오손(烏孫), 고차(高車) 등 소왕국들과 동맹 관계를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悅般)과
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가했다. 북위와 열반 동맹군의 공격으로 연연의 통치자 달단(Ta-tan 414-429)이
사망하게 되나 멸망시키지는 못했다. 결국 연연을 패배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북위 왕조는 수
동적으로 연연의 공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큰 성벽을 건설하게 되었다. 북위는 연연을 굴복시키지 못하고
534년, 연연에 앞서 패망하고 말았다.
한편, 연연에 복속되어 철공업에 종사하던 돌궐족들이 6세기 초에 연연으로부터 독립을 기도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초기에는 북위의 간접적인 지원을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돌궐의 세력이 점증되자, 돌궐
의 부족장이었던 토문(土門)이라고도 불리는 부민(Bumin)은 연연에게 공주와 혼인하기를 요청했는데 '대장장이' 출
신이라는 이유로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것을 핑계 삼아 552년 부민은 북위의 계승자 서위(西魏 535-554)의 도움을
받아 연연에 공격을 감행해서 그들을 퇴패시켰다. 연연의 통치자 아아궈이는 자살하게 되고, 곧이어 연연은 내부분
열로 패망하게 되었다. 555년 돌궐은 연연의 군대를 대패시키고 3000명을 참수형에 처했다. 이로서 연연이라는 나
라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다3).
다. 돌궐제국(突厥帝國)
돌궐족은 스텝의 여러 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 기록을 남긴 민족이다4). 몽골의 오르콘(Orkhon)강 유역
에서 발견된 튀르크어 비문(碑文)은 돌궐제국과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여 준다. 이 비문
에는 돌궐제국을 쾩튀르크(Köktürk) 제국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 비문을 통해 우리는 돌궐(튀르크)족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 민족으로서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해서 당시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한 중국의 사료들이 얼마나 왜곡되
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돌궐이 스텝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 독립된 2개의 돌궐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을 해석하여 볼 때, 돌궐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지속하였음
을 알 수 있다.
돌궐족 자신들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Türk)라는 말의 뜻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1072년 중세
튀르크 학자 카쉬가르 마흐무드가 그의 사전에 '강력하다'라고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후로 많은 역사 학자들이
마흐무드(Mahmud)의 이 근거없는 민간어원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말에 A. Vambery는 이 말의 동사
türe-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튀르크 언어학자들은 Vambery의 이론
을 따르고 있다. 한편,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은 튀르크족을 돌궐(突厥)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
인이 소위 북방 오랑캐인 튀르크족을 경멸하는 뜻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로서 튀르크(Türk)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Kül)부족"이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돌궐족의 초기 부족명이 궐(厥), 즉 큘
(kül)임을 암시하고 있다.
돌궐제국을 이룬 튀르크족은 흉노의 일파로 보여지며,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Ötken) 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튀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산이 투구처럼 생
겨 그와 같은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이것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근거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이
부족의 원래 직업은 철공이었으며, 처음에는 연연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같은 알타이계 족속인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스텝민족 사상 처음으로 취락을 건설함으로써 초원지대의 도시 건설 단계에 들어가게 되
었다.
(가) 돌궐제국의 성립(成立)
돌궐제국의 성립 역시 스텝제국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지도력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돌궐제국은
부민(Bumin) 혹은 투멘(Tumen) 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튀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AD 545년경 건설되었는데, 그는 552
년 서위(西魏)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 스텝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
(Muqan)과 동생 이스테미(Istemi)가 동부 스텝과 서부 스텝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동돌궐의 지배자는 전체 돌
궐제국을 대표하는데 그의 왕호는 카간(Kagan)이며,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서돌궐의 통치자
관직명은 제 2의 통치자의 뜻으로 야부그(Yabgu)였다.
한편, 돌궐은 초기에 중국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우며 침략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
나 583년 통일된 수(髓)나라와의 충돌에서 패배하게 되고, 이미 내부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돌궐은 수
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 시기를 이용하여 돌궐이 잠깐 부흥하였으나, 곧이어 등장한 당(唐)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
다.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Kutlug Ilterish)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 즉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카간, 큘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집권자들이다. 일
테리쉬는 독립 후 10년만에 동부 스텝을 장악하고 제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스텝 지역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돌궐의 통치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유목민족 부족들의 세력 쟁탈전의 전장으로 변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42년에 바스밀(Basmil)부족이 우이구르, 카를룩 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Tengri)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그 후 바스
밀과 카를룩, 그리고 우이구르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우이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
포함으로 우이구르(Uygur)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나) 돌궐제국의 구조(構造)
돌궐제국은 체계적인 정치기구를 갖추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조직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왕에 해
당하는 카간(Kagan)은 세습제였지만, 임명제도가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부족들간의 싸움이 잦았고, 카
간은 절대군주이긴 하였지만 중요한 결정은 혼자서 내릴 수 없었다. 군사조직은 다른 스텝 제국과 유사했으며, 그
들의 전술은 급습이었다. 그들의 군사력은 카간의 지도력에 의해 그 세기가 좌우되었다. 유목민족 사회는 모계사회
와 부계사회가 교체하며 존재했는데, 이는 유목집단이 흥왕할 때는 부계가 세력을 잡았고 쇠퇴기에는 모계가 세력
을 잡았던데 기인한다. 이 사회의 가장 작은 공동체단위는 장(帳)이었고, 장이 모여 성(姓)을 형성했으며 성이 모
여 한 부족을 이루었다. 부족을 이루는 데는 그 부족이 소유하는 토지와 군사력이 필수였다. 한 공동체 혹은 국가
가 형성되려면 이러한 여러 부족이 연합해야 했었다.
(다) 돌궐제국의 대외관계(對外關係)
돌궐의 대외 관계는 과거의 스텝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충돌과 전쟁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들
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비단길에 대한 지배 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앙 아시아를 지배하
는 민족은 중국과 비쟌틴제국과의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이때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이 페르시아계 소그드
인(Sogdia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소그드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 스텝을 장악한 제국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아왔었다.
557년에 돌궐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공하여 그 동안 페르시아에 위협적이었던 아프카니스탄 지방의 에프탈리
테(Hephtalites)를 붕괴시키고 그 영토을 동부 킨강산맥에서 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제국은 페르시아와의 무역 협정을 추진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곧 이어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maniakh)를 단장으로 비잔틴제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냄으로 이 때 돌궐과 비잔틴이 외
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가 이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돌궐제국이 등장하여 소그드 상인들을지
배하게 되자 페르시아와 돌궐제국은 불편한 적대관계가 계속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산 비단을 페
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잔틴에게 파는 형식이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
궐은 비잔틴과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직접 무역은 돌궐제국과 비잔틴제국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했는데, 돌궐과 비쟌틴의 우호관계는 특
히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쟌틴으로서는 동서에서 페르시아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으로
도 중요했던 것이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 문제로 비잔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잔
틴의 관계는 무난히 계속되었다.
돌궐과 비잔틴의 호의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제국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과 비쟌틴과의 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로 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흑해 북부와 루마니아 지
방에 있던 아바르(Avar)를 중간에 두고 돌궐과 비잔틴이 장기적으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은 기독
교화하기 시작한 아바르를 자신들의 복속국으로 취급했으나, 돌궐은 전통적으로 아바르인들이 돌궐의 속민(屬民)임
을 주장하며 나왔다. 학자들은 월지국, 연연, 에프탈리테, 아바르가 인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이 대부분 인도-유럽계통의 토하르족(Tocharian)이라 추정되고 있는
데, 그러나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알타이계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돌궐제국의 중국과의 무역은 중국에게 말을 주고 비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무역에서
중국은 그렇게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돌궐이 그들의 물건을 가져다가 강제로 떠맡기듯이 하는 억
지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돌궐과의 충돌을 원치 않은 중국은 대부분 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은
자신이 대국이라는 의식 속에서 돌궐이 가져온 물건을 조공으로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비단길을 장악한
돌궐과 생산국인 중국과의 이러한 불균등한 무역 관계와 무역에 대한 양국의 개념 차이는 결국 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다. 즉, 물량이 많은 중국은 돌궐이 무역품으로 가져오는 것이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조공으로 생
각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행했었는데, 돌궐은 순수한 무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러한 개념의 차이는 돌궐이 더욱 더 불균등한 무역을 강요하자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라) 이슬람교의 침투(浸透)와 탈라스 국제전(國際戰)
돌궐제국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애니미즘적인 샤마니즘이 신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
엽 사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초에는 서돌궐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동돌궐도 비록 원로였던
톤유쿡(Tonyukuk)이 불교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즉 스텝의 기질에 맞지 않다는 이유
로 불교를 반대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비교적 성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경우 네스토리안 교도들에 의
해 경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아랍인들은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이슬람
화시킨 후5), 중앙아시아 스텝의 서쪽과 경계를 같이 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
작했다. 아랍 이슬람인들은 처음부터 전쟁을 통한 중앙아시아 지배나 혹은 포교를 목적으로 직접 포교자를 파송하
지는 않았으며, 이슬람화된 페르시아계 무역 상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
지 타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전파는 한 지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이었
다.
8세기 중엽에 가서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랍 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어 기존세력인 돌궐, 티베트, 당나라
등과 함께 아랍 이슬람 움마야드왕조도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움마야드왕조의 페르시아 지역 통치자 쿠타
이바 이븐 무슬림(Qutaiba ibn-Muslim)은 서돌궐의 여러 부족을 점령하며 박트리아, 부하라, 사마르칸드지역을지
배하게 되었다. 이 때 돌궐은 제국 내부의 분열로 아랍의 침입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스텝의 서쪽 트란속시아나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아랍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시도되고 있을 때, 당나라에서는 713년 현종이 즉위하여 팽창주의정책을 추
진하고 있었고, 티베트제국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정책을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돌궐제국이 쇠
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세 제국이 팽창하려는 야욕을 품게된 것이다. 곧이어 734년 스텝제국 돌궐은 붕괴되고 그
뒤를 이어 튀르크계인 우이구르인이 스텝의 동쪽에 세력을 장악하여 우이구르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747년 당나라는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장군의 지휘하에 파미르고원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여기에서 티베트를 크
게 물리쳤다. 750년 중국의 타쉬켄트 원정때의 잔인한 약탈행위는 그 지역 서부 튀르크인들로 하여금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원조 요청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랍 이슬람 압바스 군대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않은 티베트, 돌궐
계 카를룩(Karluk)과 연합하게 되었고,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좋은 튀르크계 우이구르제국과 연합하
여 751년 여름 7월에 이들 동맹군과 중국-우이구르 연합군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Tashkent) 부근 탈라스(Talas)
강 유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랍-티베트-카를룩 동맹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심장부인 튀르키스탄
(Türkistan)은 1세기 동안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텝 서부 트란속시아나는 압바스 왕조의 지배에 들어가
게 되었다. 탈라스강의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때부
터 트란속시아나에서의 중국의 영향이 그치게 된 것이다. 또 이슬람교가 튀르크족의 군소국가들과 부족들에게 전해
져 중앙아시아에 튀르크계 이슬람세계가 형성되고 역사 속에서 팽창하여 오늘날 거대한 이슬람세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그 후 튀르크 민족은 두 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각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서튀르크
족은 이슬람의 영농정착국가로 변화하였고 후에 셀추크(Selchuk)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
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동튀르크와 중부튀르크는 스텝 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이 등장하여 세계
를 정복할 때 그 근거지가 되었다.
라. 과도기(過渡期)의 제국들
돌궐제국(突厥帝國)의 멸망은 갑작스럽게 도래하였다. 돌궐의 마지막 카간이 사망하고 수 년후에 튀르크 부족인 우
이구르(Uugur)족이 같은 튀르크계인 카를룩과 키르기즈와 함께 연합하여 745년 돌궐의 지배층을 물리치고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튀르크 부족들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
되었다. 그 후 대규모의 부족연합체들은 자체의 독립제국을 수립하여 중동지방과 러시아의 스텝지대로 진출하였고,
우이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지역에 남게 되었다. 돌궐제국의 종말 후, 중앙아시아의 스텝은 장기간 여러 튀르
크 부족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혼란기를 가지게 되었고, 그 과도기의 끝에 몽골제국이 등장하여 스텝지대는 몽골족
의 지배하에 다시 통일되게 된다.
이러한 과도기(800-1200 AD)에 중앙아시아에 수립된 주요한 튀르크계 국가들은 우이구르와 셀축(Selchuk), 페르시
아계 국가로는 콰레즘샤(Kwarezm-shah)를 들 수 있다. 이들 국가들 이외에도 카라카니드(Karakanids)라 불리우는
카라한조, 가즈나비드(Ghaznavids)라고 불리우는 가즈나조, 카를룩(Karluk) 등과 같은 튀르크계 제국들이 있었고,
이들 제국들은 이 시기 중앙아시아에 이슬람을 완전히 정착시킨 국가들이었다. 과거 돌궐제국까지는 모든 스텝 민
족들이 유목민족이었으나, 스텝의 중부에서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이룬 우이구르가 최초로 정착민족화되었으며, 이
후에 스텝서부지역에서 세워진 이슬람제국 셀축과 콰레즘샤도 모두 정착민족으로 변모하였다.
한편, 이 시기에 중국 북방에 세워진 대표적인 비튀르크계 국가들로서 만주-퉁구스계 여진과 몽골계 거란 등이 있
다. 여기서는 이 시기에 일어난 국가들 중에서 우이구르(오르콘제국), 거란(요), 여진(금), 셀축제국만을 살펴보기
로 한다
마. 우이구르제국(오르콘제국)
우이구르(Uygur)족은 당나라 때에 회골이라 불리웠으며, 송, 원나라 때에는 오외아(畏吾兒)라 불리웠다. 돌궐제국
시대에 우이구르 부족은 독립된 독자적인 부족 집단을 이루고 셀렝가 강 유역에서 거주해 왔다. 원래 유목민족이었
던 이들은 튀르크계 부족으로서, 중국과 우호적이며 돌궐제국과는 적대적이었던 퇼뢰스(Tölös) 부족 연맹에 속해
있었다.
돌궐의 마지막 카간이 사망하고 수 년후에 튀르크의 일종인 우이구르(Uygur)족이 745년 돌궐의 지배층을 물리치고
경쟁 부족 세력을 제압하여 새로운 제국을 수립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건설자는 쿠틀루그 빌게 카간(Kutlug Bilge
Kagan: 骨力裵羅)으로 알려져있고, 오르콘(Orkhon)강 유역의 중앙스텝을 지배하였다. 쿠틀루그 빌게가 건설한 제국
은 흔히 오르콘제국이라 불리우며, 우이구르민족이 세운 수 개의 제국들의 효시가 되었다. 돌궐이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 감에 따라 당나라는 628년에 우이구르 집단을 독립국으로 인정하여 친근관계를 강화하였다. 우이구르는 당시
부족장을 에르킨(Erkin)이라 칭했다.
우이구르족은 도쿠즈오우즈라 불리는 9개의 부족 집단을 형성하여 제국을 설립하였기 때문에 중국 등 주변 국가들
에게 10개 부족을 의미하는 말로 온오구르(Onogur)라 불리기도 하였다. 친중국계 우이구르 부족의 집권으로 당시
상징적이나마 존재해 있던 튀르크 부족들간의 통일 형태는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 후 민족 의식과 전통이 강한 대
부분의 돌궐계 부족 연합체들은 각각 집단을 구성하여 서부스텝과 러시아의 스텝지대로 진출하였고, 우이구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 남게 되었다.
한편, 우이구르제국이 중국과 선린관계를 가졌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
이구르제국과 중국의 관계는 대체로 평등관계에 있었으며, 도리어 중국 조정이 어려울 때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우
이구르제국이 도와주는 입장에 있었다. 당나라 천보(天寶)시대 때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발하여 당조가 위기
를 맞이하게 되었을때, 757년, 우이구르군이 수도 장안까지 진군하여 당조를 구해주기도 하였다. 745년부터 840년
까지 백년가까이 존속한 우이구르제국은 실질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중심 지역에서 동서의 교역을 통제하는 제국이었
다. 오르콘제국은 840년 키르기즈(Kyrgyz)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거의 1세기동안 동부 및 중남부 스텝지대를 지배
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수도는 카라발가순(Kara Balgasun)이었으며 사회구조는 유목사회와 영농 정착사회의 특징을 혼합한
형태였다. 이 제국은 759년부터 779년까지 최극성기를 가졌는데, 이 때의 우이구르 판도는 알타이산맥으로부터 바
이칼호에까지 이르렀다.
우이구르는 중국의 對중앙아시아 민족교섭사에 있어서 독특한 관계를 수립하였다. 즉 유목민족의 배경을 가진 우이
구르와 중국이 우호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두 제국이 이같이 우호관계를 가지게된 근본적인 이
유는 우이구르는 경제적인 필요를 중국에 의존해야 했고, 중국으로서는 우이구르의 군사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
다. 그 당시 중국은 당나라 말기였으며, 군사력이 미비한 관계로 북방 스텝부족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우이구르로
하여금 중앙스텝을 지배하도록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중국과 선린관계를 유지한 우이구르가 한 군사적 행동은 주로 티베트에 대한 것이었다. 우이구르는 감수
협곡을 침입하여 중국과의 교역을 단절시키려는 티베트제국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해 822년 이후에는 이 지역을 완
전히 장악하였다. 즉, 원주민과 소수 인도유럽계 부족들을 압도하여 튀르크계 부족들이 실크로드 요충지에 침투 정
착하게 되어, 튀르크계 언어와 문화가 그 지역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스텝의 서부 사마르칸드와 부하라지역에는 AD 4세기때부터 페르시아계의 소그드인(Sogdian)들이 살면서 비단
길의 중계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과 통하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우이구르와 교역상의 이유로 좋은 관
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점차로 우이구르에 흡수되어 튀르크족화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
정에서 소그드인들은 우이구르인들에게 마니교(Manicheism)를 전해 주었다6). 762년 우이구르 카간 뵈귀(Bögü)는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마니교는 우이구르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
로 정착민 종교를 갖게되면서 우이구르인들의 정착화는 가속되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우이구르인들은 선대의 고지
(故地)인 산악지대로부터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앙아시아 유목 민족
으로서는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우이구르인들의 관개농법을 이용한 영농기술이나 뛰어난 프레스코벽화의
기법은 소그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이다.
우이구르인들은 정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스텝 민족의 특성을 많이 잃게 되었고 결국 군사력도 약해지게 되었다. 우
이구르인들은 마니교 이외에도 불교도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는데, 이러한 정착민 종교들이 육식을 금하게 하고 사랑
과 평화를 강조하는 등 우이구르인들의 세계관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약화된 우이구르는 840년, 알타이산맥 북부 스텝에 할거하던 전통적 유목민족이었던 키르기즈족에 의해 멸망당했
다. 키르기즈는 우이구르 침략에 성공할 정도로 강력한 부족 연맹이었으나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 대부분의 유목민족 집단이 그러했듯이, 전통적인 유목민족으로서 도시건설과 정착화를 통한 국가 건설
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키르기즈 승리의 특기할만한 역사적 의의는 중앙스텝지대를 정착화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으로부터 차단했다는 데 있다. 패망한 우이구르족은 유목민족으로 되돌아가지 않았고, 키르기즈에 흡수되지도
않았다. 우이구르족의 오르콘 제국은 여러 개의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각각 상이한 방향으로 분산되었다.
몇몇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카를룩과 대치했고, 몇몇은 중국으로 대피해 감주지방의 최서부 지역에 정착하여, 9세기
중엽에는 감주국, 사주국, 고주국 등 소왕국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국은 당시 당의 쇠퇴기였고, 티베트 역시
붕괴되어 이들 우이구르 공국들의 존속에 위협을 주지는 않았다. 중국은 당에서 송으로 왕조가 교체되었으나, 우이
구르 부족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는 않았으며 교역 관계도 지속되었다.
한편, 이 교역을 방해하는 부족이 있었으니, 바로 티베트계 탕구트였다. 중국과 우이구르 부족들간의 교역에 대한
탕구트의 방해는 초기에는 약탈 행위로 시작하여 10세기말엽에는 전면적인 침략으로 발전되었다. 이 당시 중앙아시
아의 교역로는 탕구트(Tangut)와 거란(Khitan: 契丹) 등이 지배권을 놓고 다투고 있었는데, 11세기초에 탕구트는
지배권을 확보하고 몽골에 의해 정복당하기까지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우이구르제국의 문화는 정착문화와 유목문화의 혼합(synthesis)으로서 다이나믹하면서 적응성이 강했다. 이러한 우
이구르 문화는 후에 그 지역에 형성되었던 튀르크-몽골 사회에 심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우이구르문명의 발전 과정
에서 마니교는 우이구르족의 도시화와 정착화를 이루게 하였을 뿐만아니라, 문자도 제공하였다. 그리하여 우이구르
인들은 스텝 민족사상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 마니문자는 후에 몽골제국의 초기 문헌기록을 담당하
였다. 우이구르 문명의 최극성기는 오르콘제국 멸망 이후 우이구르인들이 불교를 신봉했을 때였다. 이들은 이 때에
불교의 영향아래서 프레스코벽화를 발전시켰다. 우이구르 왕국들이 중국과 이란 문화권의 교차점에 위치했던 까닭
에 우이구르의 미술과 건축은 두 문화의 성격이 혼합된 독특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우이구르에 관한 당시의 경제, 사회 생활의 기록을 보면 스텝 제국의 여성들이 영농 정착 국가의 여성들보다 월등
한 권리와 자유를 누렸음이 나타난다. 또한 우이구르의 제도는 각 직책과 임무가 선대 돌궐보다 잘 규정되고 발전
된 형태를 가졌었다. 우이구르 문명은 확실히 스텝 지역에서 이례적이었으며, 뒤에 오는 튀르크-몽골 사회에 상당
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정치적 야망과 스텝 유목민족의 전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착화가 이루어질 수
있고 문자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바. 거란제국(遼나라)과 여진제국(金나라)
알타이계 부족 거란족(契丹族)과 여진족(女眞族)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두 부족은 만주에서 시작했으며,
수목(樹木) 문화를 대표했고, 둘 다 중국을 정복했는데, 바로 이 중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은 스텝 유목민들 중에서
유일하게 몽골인들이 자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진족과 거란족의 문화가 서로 놀라울 정도로 유사함에도 불구하
고, 이들의 언어가 서로 다른 언어군(言語群)에 속한다는 사실은 흥미있는 일이다. 거란어는 현존하는 문서들을 통
해서 보는 바로는 몽골어이거나 아니면 몽골어에 아주 가까운 방언일 가능성이 높다. 반면에 여진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퉁구스계 언어에 속한다.
거란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에는 거란인들이 만주 지방에 정착한 시대이다. 제 2
기는 그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요(遼) 나라를 세워 947년 부터 1125년 까지 중국을 통치한 시기이다. 요나라가 멸망
한 후에 잔존한 거란인들의 일부가 서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카라키타이(Karakitay)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몽
골 제국이 발흥하기 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제 2기인 거란족의 중국 통치 시대에 대해 자세히 다룰 필요
가 없다고 본다.
거란이란 이름은 AD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북위 왕조는 오늘날 열하(熱河) 지방인 당시의 제홀(Jehol) 지방, 즉
시라무렌 강과 흥안(興安 Khinghan)嶺 산맥에 군집해 있던 거란족들과 정규적인 접촉을 갖고 있었다. 5세기 말엽에
거란족들은 중국의 북방 변경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되어 돌궐제국과 충돌하게 되었
다. 697년에 돌궐 카간 모초(Mo-ch'o)는 거란인들을 격퇴했다. 거란족의 이름은 오르콘 비문에서 돌궐제국에 귀속
된 피정복민들의 긴 명단 가운데 나타난다.
거란 문화는 정신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문화와 크게 다르다. 부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
화는 매우 특이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그 내용이 다른 알타이계 부족들의 기원 설화와는 크게 다름
을 보여주고 있다 : 초기 통치자들 중에서 두개골 형상의 신비스러운 한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텐트에서 펠트 밑에 숨어 있었다. 이 두개골은 의식이 행해지는 때에만 사람의 모습으로 텐트에서 나오는
데, 의식이 끝나면 두개골은 다시 텐트로 돌아가서 원래 형태로 변하곤 했다. 은둔처에 숨어 지내는 또 하나의 신
비스런 통치자의 머리는 멧돼지의 머리였다.
돼지, 소, 그리고 개들이 거란족의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는 쉽게 분간
할 수 없는 다양한 계층과 이인종(異人種)의 혼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진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란족의 사회가 매
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사회 구조 안에서 다양한 인종 그룹들이 다양한 기능적 임무를 담당했다는
것은 가히 짐작되는 일이다. 야금술 같은 몇몇 특수한 공업은 이러한 분야에 특별히 종사해 왔던 부족들에 의해 독
점되었으며, 지배 계급 거란족들의 주된 역할은 여러 다른 부족들의 잠재적인 경제력을 잘 조합해서 정치적으로 이
용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북부 지역을 정복하여 그 곳에 "중국 왕조"를 세운 거란족은 결코 미문명화된 미개인의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란 정권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야율(耶律) 부족 출신 아보기(阿保機 AD 872-926))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줄기 햇살에 의해 잉태된 아보기는 세 살 짜리 아이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태
어나자마자 네 걸음을 걸었다 한다. 그는 네 달 후에 똑바로 걷기 시작했으며 한 돐이 되었을 때는 말을 하며 장래
의 일을 예언하였다한다. 이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조상대대로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천부적인 지도자로 공히
인정되었다.
관습에 의해 부족연합체인 거란의 추장은 각 부족장들 가운데 3년 임기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보기는 한번 추장
으로 추대된 후에 추장직을 양도하지 않고 9년을 집권했다. 마침내, 권력 이양의 압력을 받자 그는 서쪽으로 이동
하여 철광석과 소금이 산출되며 농업이 가능한 오늘날 차하르(察哈爾 Chahar)省 지역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일종의 유배를 당해 후진에 처해 있었음에도, 아보기는 다른 거란계 부족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유
지하면서 자신의 경제력을 지렛대로하여 906년에 8개 부족을 통합하고 독보적인 추장이되는데 성공했다.
태조(太祖)가 된 아보기는 20년 동안 내부 세력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문자를 채택하게 된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국제 관계에서 키르기즈인들에 대한 원정은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924년에 몽골
리아에서 우이구르인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던 키르기즈인들의 세력을 무찔렀던 것이다. 아보기는 키르기즈인들
을 격퇴한 후에 중국 서부 튀르키스탄에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던 우이구르인들에게 그들의 본토인 몽골리아에 다
시 나라를 재건할 것을 제의했었다. 비록 우이구르인들이 아보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거란인들과 우
이구르인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계속 이루어졌으며, 거란 문화에 대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은 지대했다.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은 멜론 재배 기술로부터 우이구르 문자의 부분적 채택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아보기는 926년 고려(高麗) 원정에서 사망하였다. 태종(太宗, 927-947)으로 잘 알려진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는 거
란제국의 세력을 더욱 더 확장시켰으며 중국북부 주요 행로들을 장악했다. 947년에 거란인들은 제국의 이름을 요
(遼)로 바꾸었는데, 그 이름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들의 본토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이름이었다.
거란은 제국의 기반을 닦아 가면서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1010년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고,
뒤이어 1014과 1018년에 또다시 도전하였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끝났는데,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고려의 강감찬
장군의 귀주(龜州)대첩으로 인해 거란은 크게 패하였다. 거란은 전통치 기간을 통해서 속민(屬民)이었던 여진족과
중국화된 발해인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029년에는 발해(渤海)가 주동이 되어 고려인과 함께 거란에 대항
하여 싸웠는데, 이 시도는 아직 시기상조였으므로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1114년에 거란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여진족이 북쪽 변경 밖의 여진족과 합세하여 거란제국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지막 거란 왕은 1125년, 퉁구스계 여진족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퇴위 당했다. 이러한 불행이 있기 바로
전에 왕실 요인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도망하여 중국 문서에 서요(西遼)라고 알려진 새
로운 거란제국을 설립하였다. 야율대석을 추종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검은 거란족(Black Khitans)이라는 의미로 카
라키타이(Karakitai)라고 불렀다. 여기서 이름의 마지막 음절이 차이가 나는 것은 튀르크 방언의 특이성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족할만한 설명은 불가능하나, Khitan과 Kitai가 동일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카라키타이의 역사는 풀리지 않는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문서나 이슬람 문서에서 나타난 단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야율대석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역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매우 신중하
게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숨길 수 있는 도로들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거란인들 -더 정확히 카라키타이인들은 – 서
쪽을 향해 행진하면서 두개의 루트를 따라갔다. 하나는 투르판(Turfan) 지역의 우이구르인들의 땅을 통과해 갔는
데, 그 곳에서 그들은 우이구르인들로부터 친근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더 서쪽으로 행진했는데 그는
그 곳에서 카쉬가르(Kashgar)의 통치자에 의해 접근이 금지된 길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 곳으로부터 천산산맥
의 북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가게 되었는데, 이 길은 카라키타이인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 후에 그들은
튀르크계 카라한조로부터 도읍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그곳을 그들의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국가 지도자였던 야율대석은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으로 구르 칸(Gur Khan)이라는 왕명을 사
용했으며, 그의 긴 통치기간(1124-1143) 동안에 카라키타이 제국의 세력을 서부 트란속시나(Transoxiana)까지 확
장했다. 전성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서부 중국 국경으로부터 아랄해에 이르렀으며 남부 시베리아의 일부도 카라키타
이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물증들이 있다. 수적으로 적은 거란인들은 거대한 전체 제국을 그들이 직접
관할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지방 장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족들을 통괄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통치권을 허
락하는 대신 그들은 구르 칸에게 조공을 바쳤다.
카라키타이 제국은 1211년 징기스칸의 봉신(封臣)이며 나이만(Naiman)의 통치자인 큐츠류그(Küchlüg)에게 제국의
절반 가량을 정복당하고, 콰레즘의 무함메드 칸에게 제국의 서부지역을 빼앗김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거란인들의 제국은 단지 2세기 반 동안 밖에 지속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처음
에는 중국 북부가, 후에는 전 중국이 거란족의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의 러시아어명은 지금도
Kitay이며, 영어명은 Cathay이다. 이 영어명은 르네상스 시대에 중국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13세기 전반부부터 줄곧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명칭이다.
거란족의 운명은 참으로 괄목할만하다. 몽골어를 사용하는 만주지방출신 소수그룹이 2세기동안 중국 북부를 정복하
였으며 마침내 세력권에서 밀려날 때 조차도 내륙아시아에 튀르크어와 이란어 사용 부족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유목
민 제국을 창립하여 통치할만한 정치적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퉁구스계어를 사용하는 만주 동부 지방의 여진족의 역사는 거란족의 역사와 많은 점에서 일치점을 보여준다. 산림
의 사냥꾼들인 여진족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제국을 세움으로써 중국 영토의 큰 부
분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여진족의 금조(金朝 1122-1234)는 몽골족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거란족과
는 달리 패배 후에 그들의 새로운 제국을 다시 형성시키지 못했다.
여진족의 문화와 그리고 여진족과 거란족 사이에 존재했던 복합적인 관계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두 민
족의 문화에서 사냥은 경제적인 면과 종교 예식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에게 수사슴의
울음 소리를 흉내내는 전문 사냥꾼들과 독수리들을 주었는데, 이 독수리들은 후에 거란족에 의해서 종교적 성격을
띤 야생 거위 사냥에 사용되었다. 수사슴 사냥은 여가를 즐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사이기도 했는데, 거란
족들의 종교 의식에 여진족들이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일이 선호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진족들은 거란인들의 손아귀에서 때만되면 반복되는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던 것
이다. 여진족들의 마지막 봉기는 요나라 법정에서 여진족 부족장 아골타(阿骨打)에게 가해진 치욕적인 행태로 인해
발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나라를 세운 뒤, 중국인들을 통치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한 여진족은 그들 자신의 민
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들 고유의 문자를 개발했으며, 그들의 언어가 살
아남게 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하고 지방의 인구들이 혼합되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이인종(異人種)의 융합은 불
가피한 것이었다. 몽골인들이 금조(金朝)를 멸망시켰는데, 이 때에 금조는,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
한 것이었겠으나, 이미 중국화되어 있었다.
사. 셀축제국
셀축제국은 튀르크계 오우즈 부족7)의 장군 셀축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나이가 들어 무슬림이 된 셀축은 960년경에
시르다르야강 서쪽의 상업도시인 젠트(Jent)에 정착하여 자신의 그룹을 형성해 나갔다. 셀축그룹은 점차 발전하여
서 오우즈 부족 통치자 야브구(Yabgu)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해가면서 독립부족으로서
정치 군사적인 힘을 키워나갔다. 당시에 서부 스텝 트란속시아나에서는 페르시아계 이슬람왕조 사만조8)(Saman
887-999)와 튀르크계 이슬람왕조 카라한조(Karahan 840-1212)9)가 대립하고 있었다. 셀축은 사만조를 도와서 카라
한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는데, 이 때 승리의 댓가로 사만조는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지역은 셀축족에게 넘겨
주게 됨으로써 셀축제국의 터전이 마련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후에 사만조, 카라한조, 가즈나조10)등 이슬람 왕
조들간의 계속되는 전쟁에 밀려 셀축인들은 시르다르야 젠트 지역을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들은 호라산, 콰
레즘, 그리고 아제르바이잔 지역등으로 분산되어 흩어지게 되었다.
이후에 셀축의 손자들이며 셀축제국의 실제적인 창립자 투우룰(Tugrul)과 차으르(Chagry)에 의해서 셀축집단은 재
통합되게 되었다. 셀축인들은 아프카니스탄 펜잡 지방을 중심으로 성립된 가즈나朝가 내분으로 약화된 틈을 타서
메르브와 니샤푸르(Nisapur)를 장악해 니샤푸르를 수도로 정하고 투우룰을 술탄(Sultan)으로 추대하여 셀축제국을
탄생시켰다. 셀축제국은 1040년 가즈나조를 붕괴시키고, 더욱 확장하여 레이(Rey)와 이스파한(Isfahan) 지역을 석
권함으로 명실공히 튀르크계 이슬람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셀축인들은 압바스 이슬람 왕조의 요청으
로 1055년에 압바스왕조의 수도 바그다드에 진군하여 무너져가는 압바스왕조를 구해주게 됨으로써 이슬람왕조의 보
호자로서 발전하게 되었다. 압바스 왕조는 셀축제국 술탄 투우룰에게 '東西의 대왕(大王)'이라는 왕호를 하사하여
이슬람의 최대 세력임을 공포하였다.
투우룰 술탄에 이어 셀축제국의 왕이 된 알프아르슬란(Alp Arslan)은 서쪽으로 진군하여 이락, 이란을 넘어 소아시
아 아나톨리아와 아제르바이잔 지역까지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진입은 비잔틴제국과의 충돌을
낳게 하였는데, 두 제국 사이의 첫 충돌이 1054년에 시작되어 이후에 수년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두
제국간의 결정적인 대접전은 1071년 터어키 동부 반(Van) 호수 근처 말라즈기르트(Malazgirt)에서 발발하였다. 셀
축군은 술탄 알프아르슬란이 직접 지휘하였으며, 비잔틴군은 디오게네스 황제가 진두지휘하였다. 당시 2십만명의
비잔틴군에는 프랑크, 노르만 용병들이 대거 합세하였다. 셀축군은 5만명밖에 되지않았지만, 이 전쟁에서 셀축군은
유목민족 전술인 매복과 기습작전을 통해서 비잔틴군을 격퇴하고 비잔틴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그 후 협상 끝에 비
잔틴 황제는 풀려났다.
셀축제국과 비잔틴제국 사이에 발발한 말라즈기르트(Malazgirt) 전쟁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이 전쟁으로
소아시아에 진출한 튀르크족들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 소아시아의 주인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한편, 말라즈기르트
전쟁 후에 비잔틴은 수차례에 걸친 십자군 전쟁등을 통해서 소아시아 탈환과 제국 수호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셀축제국에 이어 소아시아에서 설립된 튀르크계 오스만제국 술탄 메흐멛 2세에 의해서 1453년 유럽의 수도
콘스탄틴노풀이 점령되고 마침내 비잔틴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11).
셀축제국의 술탄 알프아르슬란은 얼마 후에 카라한조와의 전쟁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멜릭샤
흐(Melikshah)가 술탄이 되었다. 그러나 방대한 영토를 관할해야 했던 셀축은 말기에 내부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
고, 쇠약해진 셀축의 국경 수비는 아랍과 쿠르드인들을 용병으로 모집하여 수행해야만 하게 되었다. 멜릭샤흐 이후
에 제국은 계속되는 십자군 전쟁과 내부 분열등으로 아나톨리아(소아시아), 시리아, 키르만, 호라산 등 4분되어 쇠
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1157년 셀축제국의 본거지인 호라산(Horasan) 지역은 몽골계 카라키타이인들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싸우던 술탄 산자르(Sanjar)가 전쟁에서 사망함으로 호라산 셀축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나고 말았다. 한편, 소아시
아에 진출한 튀르크계 집단은 아나톨리아 셀축제국(Anatolia Selchuk)의 지배하에 계속 발전하면서 십자군 전쟁을
수차례 치루게 되었다. 그러나, 아나톨리아 셀축제국은 1243년에 소아시아에 진출한 몽골제국의 군대에 의해 패망
하고 말았다. 소아시아는 그 후 에게지방 부르사(Bursa)를 근거로 발전한 오스만 튀르크제국(1299-1921)에 의해 튀
르크인들의 통치 지역으로 다시 회복되었다.
아. 튀르크족의 이슬람화
튀르크 민족의 일종인 카를룩(Karluk)족은 발카쉬湖의 동쪽 지방에 근거를 두고 유목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오르
콘江 유역에서 우이구르부족과 함께 돌궐제국을 무너뜨렸으나 우이구르제국이 창건된 후 아마도 곧 우이구르부족과
의 알력으로 인한 정권다툼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AD 751년 아랍인, 티베트인과 함께 탈라스 전투에서
중국군과 싸웠던 부족이다. 튀르크족으로서 흉노제국의 정통 후예처럼 여겨지는 카를룩은 중국에 대한 적대적 감정
이 강했고 민족적인 강인한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친중국계 튀르크 민족인 우이구르와의 갈등 관계는 계속되
었다.
우이구르(오르콘)제국이 스텝의 중앙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동안에는 카를룩의 활동범위는 비교적 제한
되었다. 그러나 오르콘 멸망 후 카를룩은 서부스텝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카를룩은 키르기즈와 마
찬가지로 대제국을 건설하려고 기도하지 않았고,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키르기즈 지역, 고대 페르가나
(Ferghana)지방에 진출함으로써 튀르크 민족은 당시 이미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있었던 페르시아 세계와 접하게 되
었다. 이때 티베트는 군사적으로 강성하여 타림분지로 진출하고 있었다.
8세기 말이었던 그 당시 서부스텝 사마르칸트와 부하라의 지배권은 내부적으로 분열되어 힘이 약해진 아랍 압바스
왕조에서 페르시아(이란인)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란계 사마니드왕조는 상인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카를룩에 이
슬람의 전파를 시작하였으나, 10세기 중반 열렬한 이슬람 승려들의 포교와 동.서 카를룩의 전쟁이 이슬람화된 西카
를룩의 승리로 끝나면서 대규모의 튀르크족들이 이슬람화되었다.
이란의 사만朝는 10세기의 전 기간을 통해 스텝으로부터 유목 튀르크계 부족들이 서부스텝 지역, 페르시아 및 아프
가니스탄 지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이 왕조는 튀르크계 부족들을 이슬람화시킴으
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만조는 튀르크계 신흥 이슬람 제국인 카라한조와 가즈나조
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이리하여 이란 민족세계와 인접한 지역에 두 개의 튀르크 제국이 형성됨으로써 페르시아 제
국내에 튀르크족의 진출이 시작되었다. 이란 세계에 대한 튀르크족의 진입은 11세기 중엽, 셀축제국이 건국되면서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가즈나朝는 사실상 스텝지대의 정치적 문제에 실질적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카라한조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나
전형적인 스텝제국의 성격을 유지하면서, 유목 돌궐제국의 전통을 답습하고 있었다. 카라한조의 이슬람화는 중앙아
시아 튀르크족 역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튀르크계 셀축제국은 11세기에 와서 페르시아를 완전 통치하게 되었다. 지배층과 군대는 튀르크계로 형성되었으면
서도 피지배 민족은 이란인들이었으며, 이들이 사용하는 문자가 아랍문자로써 이란어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처
음에는 역사가들에 의해 이란계 제국으로 오해를 받았었다. 셀축제국에 의해 정복된 후 99년동안 페르시아는 튀르
크족과 몽골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셀축 제국의 역사는 중동사는 물론 유럽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 시기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은 성지를 점령하고 있었던 바로 이 셀축제국을 분쇄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반면에 이미 이슬람화되고 정착민족화 된 셀축제국의 역사는 중앙아시아 역사나 스텝의 역사와는 긴밀한 연관을 갖
지 않았다.
이란세계 내에서 셀축 세력이 붕괴되고 있을 때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지역인 제국의 동부 변경지역은 구리드朝와
가즈나朝가 지배하고 있었다. 구리드국은 가즈나조의 영향으로 인해 11세기에 이슬람을 수용하게 되었고, 초기에는
가즈나조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지만 13세기에 와서 가즈나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구리드국도 이슬람계 콰레즘 왕
국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한편, 1110년 이란과 스텝이 접하는 변경지대에는 새로운 제국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이는 거란계 난민인 카라키타
이(Kara Kitay)였다. 이들의 지배자는 비이슬람교도이면서도 모든 종교를 포용하였는데, 이 때 네스토리우스교(경
교)를 포함하여 모든 소규모 종교들이 부활하였다. 이 카라키타이가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페르시아의 셀축제국과
부딪치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셀축제국은 패배하였고 이슬람국가에서 비이슬람적 통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라
키타이도 몽골에 의해 밀려오던 나이만족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으며, 그들이 점유하던 땅은 콰레즘(Kwarezm)에
의해 점령당하였다. 콰레즘은 옥쿠스강 하류의 비옥한 지역에 건설된 왕국이었다. 콰레즘은 13세기 쿠틉이 다스리
던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지만 이 제국도 결국 몽골제국의 거센 돌풍에 의해 1220년 순식간에 멸망 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