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訓民正音)/가림토문기원설

훈민정음은 가림토문에 기반한다 / 송호수 <광장> 1984. 6월호

유위자 2025. 11. 14. 21:45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 : 훈민정음 가림토문기원설] * 훈민정음은 가림토문에 기반한다 / 송호수 <광장> 1984. 6월호 ▲ 철학박사 송호수. '민족정통사상의 탐구' '한민족의 뿌리사상' '겨레얼 삼대원전(三大原典)' 등 단행본을 저술 했다. 송 박사는 민족의 뿌리 찾기에 일생을 바치다시피 했다. 미국 S. Baylor 대학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철학박 사. 동아대, 부산대, 고려대, 한성대 등에서 전임강사로 활동했다. 또한 그는 미국 S. Baylor 대학의 명예연구교수 였다. 이 글은 송 교수가 지난 2004년 “한민족의 뿌리 사상”이란 주제로 강연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송 교수 는 이 강연에서 여러 자료를 증거로 내세우며 “맹자-공자-노자는 동이족, 즉 한민족이었다“고 피력했다. 이 글은 ['송호수 박사 민족 사상 글모음' "위대한 민족" - 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 ] 라는 제목으로 보림사에서 개천5886(1989)년에 출판한 책 중에서 실린 글의 일부이며, 글 쓴 분은 송호수 박사이십니다. 저자에게 양해도 없이 이런 글을 마구 쓰게 됨에 죄송스럽게 생각하며 널리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옮깁니다. 참고로, 책 원문에는 한자가 필요한 경우에 한글로는 쓰여있지 않고 한자로만 쓰여 있는 것을 제가 옮기면서 한글로 바꾼 후에 ( )안에 다시 한자를 썼으며 이야기의 한자 화일에 없는 글자는 쓰지 못하고 *,**등으로 한자가 없는 글자에 표시를 하여 아래에다가 따로 설명만 해 놓았음을 밝힙니다. 1. 한글과 닮은 일본 옛글 무릇 인간생활에서 문화와 표기법은 아마 같은 시대에서 비롯되어진것 같다. 그 표기법이 단순한 기호였건 문자였건간에 인간생활과는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옛 글자 즉 신대문자(神代文字)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아서, 저서들도 상당히 나와 있고 (대략 97종) 또 옛 글들도 여러가지 유형이 꽤 발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소위 그들이 말하는 신대문자 중에서 아히루문자(阿比留文字)는 우리측의 한글과 너무 일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아히루 문자가 역사적으로 오래된 문자라 하여 '친(親)'격이라 하고, 우리의 한글 곧 언문이 '자(子)'격이라 하여 일본의 아히루 문자와 한글은 '친자(親子)관계' 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도 그럴것이 대마도와 구주 지방에서 주로 발견이 되었고 고대의 신궁(神宮), 신사(神社)의 위패(神體)가 그렇고, 또 그들의 최고 조상신을 모신 이세(伊勢) 신궁에서만도 한글과 같은 아히루 문자로 기술된 문헌들이 도합 99점이 있다고 다다이(田多井四郞治)씨는 그의 [일본신대 문자론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차외(此外), 이세(伊勢)의 신궁문고(神宮文庫)에는 패전지아체(稗田之阿體), 태안마(太安마*), 등원겸자(藤原鎌子)를 비롯, 후제호천황시대(後醍호**天皇時代)의 문헌을 끝으로하여 기수합계구십구점(其數合計九十九點)있습니다. 이것을 시대별로 해보면,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記)'가 되어진 때를 기점으로 후제호천황시대(後醍호**天皇時代)를 마지막으로하여 그 이전도 없거니와 그 이후에도 없다. * 여기서 '마'는 이야기에 들어 있는 한자에는 없습니다. '麻' 아래에 '呂'이 있는 글자로 일본어로 '그대'를 뜻하는 호칭이라고 합니다. ** '호'자도 없어서요, 酉와胡자를 나란히 쓴 글자입니다. 라고 되어있는 것이다. <자료 1> 또 신경(神鏡)의 이면에 부각되어 있는 글자 역시 아히루문자(한글)로 되어있다. <자료 2> 뿐만아니라 신사(須賀神社등)의 위독(位독***)에도 아히루 글씨로 되어있다. *** '木'자와 '賣'자가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자료 3> 그래서 나까노(中野裕道)같은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이 아히루신자(阿比留神字)는 조선으로 건너가서 언문(諺文)의 원형이 된 것이다. 지역적으로도 당연히 생각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러한 경우에 일본의 학자는, 화자(和字)편에서 언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전다정씨(田多井氏)도 말한 바와 같이 시대 고증에서 말하더라도 和字편이 훨씬 고대 것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아고(吾鄕淸彦)씨는 '아히루문자와 언문(한글)과는 친자(親子)의 관계'라는 제하에서, "아히루 문자와 언문과의 사이는 親子의 관계가 있어도 아무런 불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다.,,, 아히루 문자인 즉 대마(對馬)의 복부아비류가(卜部阿比留家)가 천아옥근명(天兒屋根命)의 직전(直傳)으로 비장보존(秘藏保存)하여 온 고대화자(古代和字)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연전(1968)에 한국을 다녀간 바 있는 가리 레디야드 박사(미 컬럼비아大 한국사 교수)는 그의 한글 창제를 다룬 박사 학위 논문에서, "훈민정음이 중국 언어학 이론에 영향을 받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외에도 몽고의 팔사색(八思色) 문자의 흔적도 보이고 있다."고 하는 이견이 있었다. 또한 일본의 북리(北里)박사도 레디야드와 같이 한글이 몽고의 팔사파문자의 영향에 의한 창제설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오향(吾鄕)은, "아히루문자와 한글이 팔사파문자에 자극되어 그 영향에서 제작되었다고 판정하는 北里의 설은 착각이다."라고 일격을 가하였다. 이렇듯 吾鄕은 한글과 아히루 문자가 팔사파 문자의 영향에서 창제설을 배격하면서도 어디까지나 한글 창제가 일본의 아히루 문자의 영향하에서 이루어 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후에 수정하였지만) 물론 인접한 한국과 일본은 상호간 그 문화의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시한상에 먼저의 것이 후자의 것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것도 당연한 소치이다. 그렇다면 한글 창제 영향의 先이 과연 일본이나 몽고에서일까 아니면 직접적인 외래 영향성을 배제할만한 충분한 고증이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할 것이다. 2. 고전(古篆)과 한글 훈민정음 창제 근거를 보면 전(篆)자를 모방하여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먼저 정인지는 훈민정음 서문에서, "형상은 옛 전(篆)자를 모방하고 소리는 7조(調)를 화협하였는데 삼극(三極)의 뜻과 이기(二氣)의 묘(妙)가 모두 포괄되어 있다." ** 원문이 한자로 나와 있는데 생략했습니다(이하 모두 생략). 라고 하였으며 또 <조선 왕조 실록> 세종 실록 25년 12월조에서는, "이달에 상왕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만들었는데 그 글자는 옛 전(篆)자를 모방하였다."라고 하였으며, 또 최만리의 소(疏)에서도, "글자 틀이 비록 옛 전문을 모방하고 글자를 합쳐서 소리를 내나 모두 다 옛 것과 반대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또 일본의 北里박사 역시 옛 전자를 저본으로 하여 이 새 글자를 제작한 것이라고 하였다. (일본 神大大 문자, 쪽 357) 정인보 역시 우리나라의 옛적에 문자가 있었다는 추증을 하면서 다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다만 고초(古初)의 문자 - 단군 古祖 이래 북방의 문화를 실어가지고 내려오는 - 面, 내려 오면서 수익 없는 전쟁에 시달려 문자의 발전이 자연히 지후(遲後)함을 면치 못하게 되자 漢족의 문자 점점 융성하여 방취(傍取)하는 손이 어찌할 수 없이 그리 향하게 되매 뒤에 미쳐서는 한자로 고문대책(高文大冊)에 사용하기까지도 마침내 주저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까지 전하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가 그 하나이다."(정인보 조선사연구 하권 典故甲, 三, 藝文典, 안호상, 민족정론 쪽 31) 또 신경준(1712 - 1781)은 옛적에 문자가 있었음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동방에 옛적에 통속으로 쓰던 문자가 있었으나 그 수가 불비(不備)하고 그 형틀이 무법(無法)하여 제대로 말이 못되어 일반으로 쓰이지 못하였드니,,, 우리 세종 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 (신경준 諺書韻解 : 안호상, 민족정론 쪽 31)라고 하였으니 어쨌든 훈민정음이 나오기 이전에 한자 아닌 우리의 고유 문자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더욱이 전술한 바와 같이 세종실록이나 훈민정음(解例本)에 나오는 정인지의 글, 최만리의 글 등은 한결같이 옛 전(篆)자를 본떠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고 하였는데 이 전(篆)서에 대하여는 천부경(天符經)에 관한 기록에 많이 드러나고 있다. "천부경은 천제환국(天帝桓國)의 구전지서(口傳之書)였던 바 환웅천황(桓雄天皇)께서 천강(天降) 이후에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하였더니 최고운은 신지(神誌)의 옛 전비(篆碑)를 발견하여 작첩(作帖)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졸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쪽 71 - 78)라고 하였으며 천부경을 주해한 노주(蘆洲) 김영의(金永毅)도 "신지의 전문을 고비(古碑)에서 보고 최고운이 해석하여 태백산에 각(刻)하였다." 하였고, 단전요의(檀典要義)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 고운(孤雲)이 번역하였다." 하였고, 또 정조 실록에도 "천부경은 보배로운 전문(天符寶篆)이라."하였다. (졸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쪽 41 - 90 ) 그런데 또 신사기(神事記)에 보면 "신지가 문자를 만들어 윤리를 가르쳤다."라고 하였다. 3. 天符經과 한글 전술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은 전(篆)자를 본떠 지었다.(字倣古篆)"고 세종 실록이나 정인지, 최만리 등이 똑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篆字로된 천부경을 최치원이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번 살펴봐야 할 것은 훈민정음 창제시에 본이 되었던 그 전(篆)과 최고운이 천부경을 지금의 한자로 번역할 적이 본(原本)이 되었던 전(篆)이 물론 그 형틀에 있어 서로 다른 글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천부경 연구에 일생을 바친 일암(一菴) 김형탁(金炯鐸) 선생의 유고를 보면 그는 '한글'을 '환문(桓文)'이라 적고 있는데 '독환문범례(讀桓文凡例)'에서 한글의 오리(奧理)를 풀면서 천부경(그는 '天經'이라 하였음)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천경의 '일시무시(一始無始)'의 句를 고요히 千回萬 番을 암송하면 이 경계를 점차 알게 될 것이다. 이미 설명한 바의 ●과 ○의 일환일권(一丸一圈)은 곧 그 중에 스스로 종횡이획(縱橫二劃) ㅣ(ㅡ)의 이치가 있음을 자연히 알 것이다. 이미 이ㅣ(ㅡ)의 (十)字에는 ○이 둘려 있으니, 이는 천부경의 이른바 '일석삼극무진(一析三極無盡)'의 이치이다. 天地가 이미 조판(肇判)하고 천지가 감응 상교상적(相交相積)하여 ㅕㅑ, ㅠㅛ로 천지가 대성(大成)하니 곧 천부경 '일적십거(一積十鉅)'의 이치이다. 천지가 이루어지면 천지가 회중(會中)하고 合하여 성인(成人)하고 ㅘㅝ가 되니 이것은 곧 천부경의 이른바 '대삼 합육(大三合六)'의 이치이다. 이미 이 사관(四關) '일시무시(一始無始)', '일석삼극무진(一析三極無盡)', '일적십거(一積十鉅)', '대삼합육(大三合六)’ (즉 천부경 본문의 일부)을 투득(透得)하면 天地가 天地된 바를 가히 알 것이다. <자료 4>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훈민정음이 창제된 원리가 천부경(造化經)에 이미 담겨져 있음을 추리해냈다. 그런데 또 '훈민정음 해례'의 '제자해(制字解)'에서는 ● : 바탕이 둥글어 天을 상징하고 ㅡ : 바탕이 명명하여 地를 상징하고 ㅣ : 바탕이 서있어 人을 상징한다. 이렇게 천부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의 삼극(三極), 곧 天, 地, 人원리가 원천적으로 훈민정음 창출 원리였다는 것이 설명되고 있음을 보아, 저 一庵의 관점과 상관된다 할 것이다. 말하자면 천부경의 '삼극(三極)'(천,지,인) 원리에서 한글이 창출되었다는 일암의 설과 역시 삼극원리에서 훈민정음이 창출된 '제자해(制字解)'의 설이 서로 일치하고 있으며, 또 더우기 천부경이나 훈민정음의 양자 공히 '篆字'가 그 창출된 바의 원형이었다는 데에 유의할 문제가 있다고 보아진다. 일암(一菴) 김형탁(金炯鐸)은 그가 지은 <단군철학 석의>(檀君哲學釋義圖說)에서도, "桓文(한글)의 의지(義旨)를 세구(細究)하면 먼저 ●○의 實하고 虛한 2개의 환(環)을 만들었으니, 곧 聖經(천부경)의 '일시무시(一始無始)'에 實이 먼저요, 虛가 뒤임의 뜻이오, ●中의 종횡이리(縱橫二理)를 배출하여 (ㅣ)(ㅡ)의 分이 되니 곧 성경의 '일석삼극(一析三極)'의 뜻이오, ㅡ가ㅣ에 入하여 ㅕㅑ가되고, ㅣ가 ㅡ에 入하여 ㅛ ㅠ가 되어서 종과 횡이 교적(交積)하니 곧 성경의 '일적십거(一積十鉅)'에 '무궤화삼(無궤*和三)' 뜻이요, ㅕㅑ 가 ㅛㅠ로 더불어 합하여 ㅛ ㅑ ㅠ ㅕ 를 이루어 天地會合의 像이 되니 곧 성경의 大三이 六에 合하여 三을 生하여 運함의 妙한 理이라. 그 구조가 정밀하고 심원하여 의리(義理)가 극진함이 성경으로 더불어 딱들어 맞으니 그 한 손(단군)에서 같이 나왔음이 의심이 없나니라. 그러므로 함부로 성문(聖文)-한글-으로써 성경의 圖를 지으니 오는 者는 상세히 할지어다. (이 실허(實虛)의 이환(二環)이 주역의 흑백 두 점으로 더불어 모양은 같으나 가르침이 다르니라.) * 궤(櫃)字 에서 왼쪽의 나무 木을 뗀 글자입니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암은 천부경과 한글이 동일한 솜씨( 한 사람의 손)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한글과 천부경은 그 창출원이 동일한 곳이지 서로 따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는 유학 출신으로 30대에 천부경을 얻어보고 일생을 천부경(篆碑文)연구에 전력을 다하고는 그 전비문을 도해해 보니까 그것이 한글이었다는 것으로 확언하고 있다. 4. 檀君조선의 '가림다(加臨多) 文' 태백일사에 보면 "단군 시대에 신지의 篆문이 있었다"고 하고 부여의 王文이 처음으로 전문이 번거로와 생략하여 예(隸)서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또 신시(神市: 桓雄)시대에는 一二三*****(표기 불능,,쩝,,)와 같은 산목(算木)이 있었다고 하였다. 치우(蚩尤)시대에는 투전(鬪佃)이 있었고 부여시대에는 서산(書算)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단군 3세 가륵(嘉勒) 2년에는 三郞 을보륵에(乙普勒)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를 지었는데 '가림다'(加臨多: 選地文, 즉 가려진 땅, 곧 하늘에 선택받은 글)인 그 글은, "단군가륵이년(檀君嘉勒二年)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 정음삼십팔자(正音三十八字) 시위가림다(是爲加臨多) 기문왈(其文曰),,,, <자료 5>"와 같이 되어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가림다 문과 일본 대마도 구주 지방을 그 주 출처로하는 아히루 문자와 세종때 나온 훈민정음의 三者는 삼각적으로 너무나도 일치하고 있다. (졸저 한민족의 뿌리사상 쪽 58, 59 도표 太白逸史 참조) 고려 광종때에 장유(張儒)는 접반사(接伴使)로서 난을 피하여 오월(吳越)에 이르러 동국 한송정곡(寒松亭曲)이 거문고 밑에 새겨져 있어 월(越)씨가 이를 알지 못하여 장유를 만나 절하고 물었다. 장유는 즉석에서 한시(漢詩)로 풀어 이르되, "月白寒松夜 波晏鏡浦秋 哀鳴來又去 有信一沙鳴 (달밝은 한송정 밤, 물맑은 경포대 가을, 슬피 울며 오가는, 갈매기 소식뿐)"라고 하였으니 "저 거문고 밑바닥에 새겼던 글은 가림다였다"고 하였다.(태택일사 – 94) 그렇다면 고려 초의 광종때까지도 가림다문이 산재하였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가림다문의 창제설은 <동국역대>, <단기고사>, <단군세기> 등에도 명기되어 있고, 또 <한단고기>의 <단군세기>나 <태백일사>에는 그 가림다문의 字形이 그대로 실려있다. 동국역대(東國歷代)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삼세단제(三世檀帝) 가륵원년(嘉勒元年) 기해춘이월(己亥 春二月) 납언박사(納言博士) 강보륵(姜普勒 - 일명 乙普勒)이 찬(撰) 국문정음(國文正音)하여 명지음(名之音)하여 언문(言文)이라 하다.라고 하였고, 또 발해 대야발(大野勃)의 <단기고사(檀奇古史:729년 再編)>에는, 제삼세단제가륵(第三世檀帝嘉勒) 이년춘(二年春) 博士 乙普勒을 命하여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선*) -백악마한촌(白岳馬韓村)에 고비문(古碑文)이 있다.- * '지을 선'字입니다. 選에서 부수로 책받침 대신에 言이 들어갑니다.라고 하였으며, 또 < 檀君世紀:1297-1364 고려 공민왕 때>에는, 제삼세단군 가륵(第三世檀君嘉勒),,,,, 庚子二年 시속상불일(時俗尙不一) 방언상수(方言相殊) 수유상형(雖有象形) 표의지진서(表意之眞書) 십가지읍어(十家之邑語) 다불통(多不通) 백리지국(百里之國) 자난상해(字難相解) 於是 명삼랑지보륵(命三郞之普勒) 찬정음삼십팔자(撰正音三十八字) 是爲 가림토(加臨土) 其文曰 辛丑三年 명신지고계(命神誌高契) 편수배달류기(編修倍達 留記) <자료 6> * 쩝,, 여기서 <자료 6>을 보셔야하는데,, 라고 되어있다. 보다시피 이상의 가림다문 38자 속에는 훈민정음 28자가 거의 다 원형 그대로 들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즉 가림다문 38자에서 10자를 제거한 것이 곧 28자인 훈민정음이다. 또 단군시대에는 신전문(神篆文)이 있었다 하였다. 5. 인도(印度)의 '구라자트'文 인도의 남방 '구라자트'주에서 쓰고 있는 문자가 우리의 한글과 일치하는 점이다. 자음에서는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같다는 것이다. ",,, 구라자트 주의 간판에서 신기하게도 한글과 비슷한 글자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글과 너무나 비슷하여 한글식대로 읽어나갈 수가 있었다. 독일의 어느 학자가 옛날에 한글이 남인도의 드라비디안語와 닮은데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한 일이 있다는데, 드라비디안語가 아니라 구자라트어를 잘못 알고 쓴 것이 아닌가 싶다. 특히 구자라트어에서 한글의 모양과 많이 닮은 것은 자음 가운데서 ㄱㄴㄷㄹㅁㅂㅅㅇ 등이고, 모음은 ㅏㅑㅓㅕㅗㅛㅜㅠㅢ 의 열 자가 똑같았다. 종자음(終子音), 즉 받침까지도 비슷하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구자라트에 있는 동안 소리를 내어 간판을 한글식으로 읽으며 다녔다.(新 왕오천축국전 쪽 200-201)라 고 되어 있는데, 구자라트 주는 인도 대륙에서도 서쪽 해변에 가까운 지역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우리와 인접한 곳에서 원시 한글과 같은 소위 아히루 문자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상과 같이 인도라면 우리와는 지역상으로 상당히 격리되어 있어 구자라트어의 형성이란 그 향방을 종잡기 매우 어렵다고 보여진다. 다만 이 구자라트 지방은 일찌기(지금부터 1200년 전) 신라승 혜초가 오천축(五千竺)을 고행하면서 남천축에서 서천축으로 가는 도중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서 우리와의 문화사상에 연고라면 연고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오천축국전' 참조) 물론 전술한 바와 같이 고전(古篆)인 천부경을 최치원이 알고 번역을 한 것이라면 고운보다 약 100년 전의 인물이 혜초였다. 같은 신라인으로서 후대인인 고운이 고전을 인지하고 있었는데 그보다 먼저인 혜초가 고전을 응용하지 아니했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소장문 중에서 고대 한글(아히루문자)이 적힌 한점에 '和銅 元年'(일본 신대문자 쪽 218-219)이라 하였다.(安萬侶가 古事記를 지은 것은 和銅 5년임). 이 '화동원년'은 서기 708년에 해당하며, 혜초는 704년생이다. 말하자면 '이세신궁'에 있는 한글 문헌이 쓰여진 연대와 한글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는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 혜초가 머문 연대가 거의 동시대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구자라트 어와 가림다 문과의 상관성을 암시라도 하고 있는 듯하다. 또 고구려 성왕(동명 성왕?)이 요동성에서 파낸 명(銘) 위에 범서(梵書:인도 문자)가 있었는데, 시신(侍臣)들이 그 글을 알아 보았다고 하였다. "석고려성왕안행국계차("昔高麗聖王按行國界次),,, 우굴득명 (又掘得銘) 상유범서(上有梵書). 시신식지(侍臣識之),,,, 우시한역(于時漢亦) 미견패엽(未見貝葉). 하득해외배신기능식 범서호 (何得海外陪臣己能識梵書乎).,,,," (주 : 삼국유사 요동성육왕탑(遼東城育王塔))이때는 불교가, 고구려는 고사하고 漢나라에도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그런데 왕을 모신 신하들이 이 범서라는 문자를 알아 해득했다고 한다. 또 일본의 북리박사는 '일본 고대 언어 조직考의 彦文과 실?(悉?)'의 節에서 '고전즉범자(古篆則梵字)'(일본 신대문자 쪽 367)라는 말을 쓰고 있다. 어쨌든 한글을 전제로 한다는 측면에서 보아 '가림다문,고전(古篆), 범서, 구자라트 문자, 아히루 문자, 훈민정음' 등은 서로 동일계라는 상관성을 짙게 풍겨주고 있다고 보아야한다는 데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맺 음 말 한자 문화의 강한 정치 세력의 팽창은 원시한글(가림다 문)을 얻어보기 어렵게 하였다. 그러나 비교적 대륙 방향에서의 밀어 닥친 공격적 戰禍가 적은 소위 문화 유산의 안전지대였던 일본 지역에서는 그 보존이 가능하였다. 30년의 연구 끝에 고대화자총감(古代和字總監)을 저술한 吾鄕은, "九鬼家는 천아옥근명이래(天兒屋根命以來), 대중신신기백(大中臣神祇伯)의 직계(直系)로서 3천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다. 중단함이 없이 門外不出의 고사비록(古史秘錄)을 전래하여 왔다. ,,,漢字渡來以降, 대륙 문화의 격렬한 공략 중에서 古代和字는 九鬼家의 神道系家門의 비호로 地下에 잠겨 주옥같이 비장(秘藏)되어 온 것이다." (일본 신대문자 중에서)라고 말하고 있다. 아히루 문자를 보존하였던 '阿比留家'는 대마도에 있고, 아히루 문자는 유독 대마도와 구주지방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그런데, '三韓秘記'를 인용한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에 보면, 自古 仇州 對島 乃三韓分治也 非倭人世居地.라고 하였다. 즉 "옛부터 구주와 대마도는 三韓 땅이니 왜인들이 살던 곳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대마도와 구주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조선의 통치 강역이었던 대마도와 구주에서 고조선의 '가림다'문이 발굴되는 것은 하등에 이상한 것이 아니라 당연하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아히루 문자는 고대 한글인 가림다 문과 같음.) 가령 가림다 38자 중에서의 '*(ㅎ)'이란 글자는 아히루 문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고(신대문자 쪽 237), 그 외에는 가림다문과 아히루 문자, 훈민정음 등 3자의 글자 모습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위의 *는 ㄷ자를 왼쪽으로 90도 돌리고 그 위에 ㅅ자와 비슷한 글자를올려 놓은 모습임.) 따라서 아히루 문자는 훈민정음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림다문의 흔적이 아히루 문자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일본학자도 수긍함. 吾鄕) 그렇다고 하여 훈민정음이 아히루 문자의 영향에 창제된 것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인 직계로서의 고대 한글인 가림다문을 본떠 이루어 졌다고 보아진다. (졸저, 한민조의 뿌리사상 쪽 57 참조.) 지금까지 훈민정음 창제에 관하여 많은 추측설, 모방설, 추증설 등이 있었으나 고대한글인 가림다 문의 38자에서 10자를 줄여 훈민정음 28자가 되었고 다시 4자를 줄여 지금 쓰여지고 있는 한글 24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단군 3세 가륵임금때에 만들어진 가림다문을 한글의 기원으로 보지 않으면, 일본에서의 아히루 문자를 모방하여 (소위 親子 관계설) 훈민정음이 되었다는 설을 배격할 통로가 없는 것이다. 최고운(857 - ?)이 古篆碑(원시글)를 한자로 번역하였고, 그보다 앞서 혜초(704 - 787)가 머물렀다는 인도의 구자라트 주에서 지금도 전하여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모습과 같은 시대, 즉 일본의 和銅(708-714) 원년에 써진 '패전아체(稗田阿體)'가 서명한 '이세신궁'에 소장된 한글이 가림다 문 38자가 그대로 제 모습을 하고 있는가 하면, 역시 동 시대인 일본의 후제호천황시대(後醍호天皇時代:1318-1339)를 그 하한선으로 하는 이세신궁의 신대문자(99점, 신궁문고 것만) 즉 한글(아히루문자, 즉 가림다문)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의 명확한 물증들이 언제까지나 훈민정음에 관한 '세종 창제설'에 집착하여 머뭇거리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더욱이나 세종실록 등에도 흔민정음은 옛글(古)을 본때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데 말이다! <광장 1984,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