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도지(符都誌)/부도지전승내력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 / 위키백과, 나무위키

유위자 2025. 10. 2. 13:07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9_2 : 부도지 전승 내력]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초상(보물 제1497호) 작자 미상, 무량사에 소장 *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 / 위키백과, 나무위키 김시습(金時習, 1435년~1493년)은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불교 승려이고 문인이다.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한성부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상도 김해를 거쳐 강원도 강릉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의 본관은 강릉, 자(字)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불교 법명은 설잠(雪岑)이다.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김일성(金日省)의 아들이다.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경기도 노량진(현재의 서울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도 한다. 1493년 조선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이계전(李季甸), 김반(金泮), 윤상(尹祥)의 문인이다. 아버지 김일성(金日省)은 무반 출신으로 충순위를 역임했다. 이름인 시습(時習)도 〈논어 論語〉 학이편(學而篇)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한다. 생후 8개월에 글뜻을 알았다 하며, 3세에 유모가 맷돌로써 곡식을 빻는 모습을 보고 스스로 글을 지을 정도로 천재적인 재질을 타고 났다 한다. 桃紅柳綠三春暮 도 홍 유 록 삼 춘 모 복사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러 삼월은 이미 저물었네. 珠貫靑針松葉露 주 관 청 침 송 엽 로 푸른 침으로 구슬을 꿰니 솔잎의 이슬이네. 소문을 듣고 당시 정승인 허조가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늙을 노(老)를 넣어 지어보라" 청하자, 老木開花心不老 노 목 개 화 심 불 노 늙은 나무에 꽃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라고 지어 허조를 놀라게 하였다고도 한다. 5세 때 이미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이라는 이름을 들었다. 집현전 학사 최치운(崔致雲)이 그의 재주를 보고 경탄하여 이름을 시습(時習)이라 지어 주었다. 어린시절 세종대왕이 그의 천재성을 듣고 5세의 김시습을 불러다가 시험을 맡은 박이창(朴以昌)이 병풍에 그려진 강변에 접한 정자와 배를 가리키며 지어보라 하자, 小亭舟宅何人在 소 정 주 댁 하 인 재 작은 정자, 배 매인 집에는 누가 사는가? 라는 시를 썼다. 박이창의 호가 소정주(小亭舟)인데 김시습이 이를 알고 시를 지었는지 아니면 김시습을 시험한 후 박이창이 이 시를 마음에 들어해 호를 지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전자라면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김시습의 문재(文才)와 재치에 미루어 전자라고 짐작함에 무리가 없다. 감탄한 박이창이 童子之學 白鶴舞靑空之末 동 자 지 학 백 학 무 청 공 지 말 동자의 학문이 마치 백학이 하늘 끝에서 춤추는 듯하다. 라고 스스로 시를 지은 다음 대구를 지어보라 하자 김시습은, 成王之德 黃龍飜碧海之中 성 왕 지 덕 황 룡 번 벽 해 지 중 어진 임금의 덕이 마치 황룡이 푸른 바다를 뒤엎는 듯하다. 라고 답하여 박이창을 거듭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2] 이에 흡족한 세종은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었는데 이 비단을 모두 홀로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하였다. 과연 이걸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가 궁금했던 모양인데 '별 거 아닌 거'라는 투로 즉석에서 비단을 서로 묶어서 엄청 길게하고는 그냥 질질 끌면서 가버렸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다. 《어우야담》에도 세종 앞에서 시를 지은 일과 비단을 끌고 돌아간 일화가 실려있다. [원문: 김시습은 다섯 살에 능히 글을 지을 줄 알았다. 세종이 그를 대궐 안으로 불러 친히 만나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해 주고자 했다. 삼각산(三角山)을 주제로 시 짓기를 명하니, 김시습이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삼각산 높은 봉오리 하눌을 꿰뚫으니, 올라서면 복두성도 딸수 있겠네. 삼각산 바위에 뚫린 굴 비구름 일으킬 뿐 아니리니, 왕가로 하여금 만세토록 평안케 하리라." 임금이 기특하게 여기면서도 기뻐하지 않는 듯하였는데, 이는 김시습이 신하가 되지 않으려는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종이 비단 백 필을 내리며 그에게 직접 집으로 가져가라고 하였다. 김시습은 비단 백 필을 풀어 그 머리와 꼬리를 서로 잇고서 한 쪽 끝을 허리에 두른 패 하직하고 나가니, 백 필의 비단이 모두 딸려 갔다. 임금은 이를 보고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중략)... 다섯 살 때부터 능히 글을 지었으므로 스스로 오세(五歲)라 호(號)를 지었다.] 소년기에 그는 당시의 석학인 이계전, 김반, 윤상 등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 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를 하다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을 듣고 3일 동안 문을 닫고 번민한 끝에 통곡을 하고 책을 불살랐다고 알려져 있다. 1456년 성삼문이 극형에 처해졌을 때 한밤 중에 시체를 수습해 몰래 서울 아차고개 남쪽에 묻고 장사지냈다고 한다. 이후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21세에 방랑의 길에 들어서, 경기도 양주(楊州)의 수락(水落), 수춘(壽春)의 사탄(史呑), 해상(海上)의 설악(雪岳), 월성(月城)의 금오(金鰲) 등지를 두루 방랑하면서 글을 지어 세상의 허무함을 읊었다. 문학인으로서는 남효온, 송익필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 불린다. 이는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인 남용익(南龍翼)이 『호곡시화』를 편찬하며 명명한 것이다. 그는 관서·관동·삼남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는데, 〈매월당시사유록 每月堂詩四遊錄〉에 그때의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31세에 경주 금오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많은 저술을 하기도 했는데 한국 최초의 소설이라 일컬어지는 금오신화의 저자이다. '금오'는 경주 남산의 봉우리 금오봉을 말하는데 금오신화를 이 산에 있던 용장사에서 스님으로 7년 동안 머무를 때 썼기 때문이다. 벼슬길에 뜻이 없었는지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17살에 과거에 응시했다가 불합격되는 통에 너무 오만하였음을 뉘우치고 절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하던 도중에 찬탈 소식에 울분을 토하며 머리를 밀고 승려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양녕대군이 수재라고 하여 세조에게 그를 천거했으나 떠도는 승려로 살아가면서 벼슬자리를 모두 거부했다고도 한다. 하루는 억지로라도 끌고 간다며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달아나더니만 논밭에 거름을 주기 위해 만든 똥통에 스스로 빠져서 "자, 이런데도 날 주상에게 데려갈 테냐? 가봐야 네놈들 목만 날아갈 텐데?"라며 비웃었고 포졸들은 미쳤다고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당대에 설법으로 이름이 높아 세조가 그 설법을 듣고자 재물도 준다고 하고 어명을 어기면 참수할 것이라 협박까지 했음에도 "그러면 죽여 보시오"라며 거침없이 대들었다. 죽여봐야 설법을 못 들으니 세조가 고민 끝에 효령대군에게 부탁하여 효령대군이 손수 와서 설득하자 딱 1번 가서 세조에게 가서 설법을 했다고 한다. 47세인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고, 유학자를 만났을 때는 불도를 말하지 않았다. 세조 때에 변절하여 6신(六臣)을 고한 영의정 정창손을 길에서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 세조 정변 이후부터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와 사귀기를 꺼리며 두려워하였으나 종실(宗室)인 이정은(李貞恩)과 유응부·남효온·안응세(安應世)·홍유손 4명만은 시종 변하지 않았다. 성리학 사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승려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시점에 승려가 되었는가는 불분명하다. 1466년(세조 12)에 김시습, 유응부은 충청남도 공주군의 지역유지들과 함께 동학사 숙모전을 증축하고, 숙모전 옆에 단을 쌓고 사육신과 단종에 관련되어 순절한 신하들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김시습, 유응부이 증축한 건물은 년(영조 4)에 화재로 동학사가 불에 소실되었다가 후대에 1864년(고종 원년)에 만화(萬化) 스님이 다시 세웠다. 1472년에는 경기도 양주의 시골에 정자를 세우고 조그만 화전을 일구면서 시와 저술에 전념하였다. 언젠가 서강(西江)을 여행하다가 유응부, 한명회(韓明澮)의 시를 보고 운을 바꾸어 조롱하기도 했다. 한명회, 유응부의 시 靑春扶社稷(청춘부사직) /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白首臥江湖(백수와강호) /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김시습, 유응부의 시 靑春亡社稷(청춘망사직) / 젊어서는 나라를 망치고 白首汚江湖(백수오강호) / 늙어서는 세상을 더럽힌다. 이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이 개작시를 보고 감탄했고 배를 잡고 웃으며 그 시를 읊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한명회는 노발대발하며 시를 적은 종이를 찢어 버렸다고 한다. 신숙주와 정인지, 정창손의 행차를 길에서 보게 되면, 나타나 서슴없이 욕설을 날리며 조소하였다. 하루는 길을 가는데 신숙주[5]가 마침 가마를 타고 가고 있기에 "이놈! 선왕의 신신당부를 어긴 이 못난 놈!"이라고 호통을 치자 신숙주는 아무 말도 없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서거정과도 우연히 만났는데 신숙주와 달리 서거정은 오래 전부터 수양대군을 모시던 사람인지라 김시습도 서거정은 호통치지 않고 정답게 이야기를 하였으나 말투는 서로를 은근히 비꼬는 비수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서거정도 그를 천거하고자 세조에게 건의했으나 결국 그도 포기했다고 한다. 그나마 세조가 죽고 벼슬을 지내기도 했으나 워낙에 떠돌아 다닌 게 오래되어서 잘 맞지도 않았다. 현실과 이론의 차이 및 온갖 부조리에 치를 떨며 오래가지 않아 때려치우고 다시 야인으로 돌아가 지냈다고 한다. 생존 당시에는 야인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김시습의 이름이 언급되는 시기는 김시습이 죽은 뒤 한참 뒤인 중종 시기였다. 그래서 김시습의 일화는 정사보다는 주로 야사가 출처이다. 한편 그가 만나 교유하던 인물로는 서거정, 김담, 김종직 등이었다. 이후 잠시 머리카락을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혼인하여 대를 이으려 했으나 아내가 일찍 죽고 실의에 빠져 다시 머리를 깎고 입산했다. 그 후 떠돌아 다니다가 홍산의 무량사((당시 충청도 공주목 홍산현, 현 충남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만수산에 위치한 사찰)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언대로 절 옆에 묻었다가 3년 후에 파 보니 얼굴이 산 사람과 같아 사람들은 부처라 여겨 화장 후 나온 사리를 봉안했다. 사리는 부여군 무량사 부도에 봉안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비바람으로 부도가 훼손되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이후 불교계에서 사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를 받아들여서 2017년 9월 무량사로 되돌아갔다. 뒤에 중종은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시호를 내렸다. 향년 59세(1493년). 선조는 이이를 시켜 시습의 전기를 쓰게 하였고, 숙종 때에는 해동의 백이(佰夷)라 하였으며 집의의 벼슬을 추증, 정조 대에 남효온과 함께 이조판서로 추증되는데 당시에 이미 자손이 끊겼다는 언급이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일생을 한마디로 말하면 '재주는 많았으나 세상이 어질지 못해 평생을 미친 것처럼 꾸며 살다 갔다.'라고 할 수 있겠다.공주의 동학사 숙모전에도 배향된다. 여담 - 한국의 도맥 일파에서는 김시습이 중요한 인물로서 여겨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김시습은 중국의 검선 여동빈의 천둔검법을 체득하여 후세에 전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전설이지만 그의 저술 중에 내단학 이론을 정리한게 몇 있는 것은 사실. - <부도지>가 김시습에 의해 번역되었고 그 필사본이 보관되고 있었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김시습의 유명세를 빌린 위서라는게 정설. - 2013년 2월에는 김시습이 그린 자화상을 송시열의 제자 김수증 모사한 중모본이 TV쇼 진품명품에 나와 감정가 3억 원을 기록했다. - 후대의 인물인 기자헌과 유몽인은 김시습의 유교와 불교를 같이 숭상하는 사상에 공감했고 불교에 심취했다 한다. - 윤춘년은 김시습, 유응부의 절개를 높이 평가하였다. 명종실록을 적은 사관은 이를 비꼬아 '요사하고 허탄하고 속된 전설 같은 것을 말하기 좋아하였으며, 김시습(金時習)을 추존하여 공자(孔子)에 비유하기도 하였다.'는 악평을 남기기도 했다. [선조수정실록 1권, 1567년(선조 즉위년, 명 융경 1년) 10월 5일 병술 10번째기사, "윤춘년의 졸기"] - 윤춘년은 불교사상과 노장 사상에도 관심을 두어, 당시 조선 주류 사상인 주자성리학의 학문만이 진리라며 집착하지는 않았다. 윤춘년 외에도 윤춘년의 먼 친척인 윤유후는 성삼문을 높이 평가하여 성삼문의 저서와 시문을 수습해 성근보유고를 남기기도 했다. 윤춘년과 윤유후는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 쪽 후손들이었다. 가계 증조부 : 김윤주(金允柱) 할아버지 : 김겸간(金謙侃) 아버지 : 김일성(金日省) 어머니 : 울진 장씨 부인 : 남효례의 딸 저서 《고금제왕국가흥망론(古今帝王國家興亡論)》 《관동일록(關東日錄)》: 100여편의 시 《금오신화(金鰲新話)》 《법화경별찬(法華經別讚)》: 법화경을 찬미했다. 《산거백영(山居百詠)》(1468년): 시집 《산거백영후지(山居百詠後志)》(1476년) 《신귀설(神鬼說)》 《애민의(愛民議)》 《위치필법삼대론(爲治必法三代論)》 《유호남록(遊湖南錄)》 《유관동록(遊關東錄)》 《유관서록(遊關西錄)》 《유금오록(遊金鰲錄)》 《천형(天形)》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태극설(太極說)》 《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華嚴一乘法界圖註幷書)》: 의상의 화엄일승법계도를 주석한 것이다. 사후에 지어진 김시습,유응부 관련 저서 《매월당시사유록(每月堂詩四遊錄)》 : 기자헌이 김시습,유응부의 시를 중심으로 폈다. 《매월당집(梅月堂集)》: 김시습,유응부 사후 18년에 중종의 명으로 자료를 수집하여 10년이 걸려 3권의 문집으로 처음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