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도지(符都誌)/부도지전승내력

박제상(朴堤上, 363년 ~ 419년 추정)가계 /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유위자 2025. 10. 2. 09:02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09_2 : 부도지 전승 내력] * 박제상(朴堤上, 363년 ~ 419년 추정)가계 / 삼국사기 권제45 열전 제5 박제상의 가계 박제상(朴堤上)註 156 (혹은 모말(毛末)註 157이라고도 한다)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註 158의 후손이며,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註 159 5세손(世孫)이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註 160이고, 아버지는 물품(勿品)註 161 파진찬(波珍飡)이다. 제상이 관직에 나아가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註 162 註) 156 박제상(朴堤上): 신라 눌지왕대의 충신이다. 박제상에 대한 이야기는 본 기록과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눌지마립간 2년조,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3월조에 나온다. 본 기록에는 제상의 또 다른 이름이 모말(毛末), 『일본서기』에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 전한다. 이와 더불어 본 기록에서 제상이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아버지는 파진찬(波珍湌) 물품(勿品)이라 전하나, 『삼국유사』에는 그가 김씨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본 기록의 내용이 좀 더 구체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신빙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의 조부 박아도만 하더라도 일성이사금 15년(148)에 갈문왕이 된 것으로 나타나 있어 본서의 기년(紀年)을 따른다면 눌지마립간 2년(418)에서 270년의 차이가 난다. 신라본기에는 기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가계 전승 또한 신뢰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그의 부인이 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다고 하였는데,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18 실성마립간조를 보면, 실성왕이 치술의 아버지라고 전하여서 제상을 실성왕의 사위로 보기도 한다 (선석열, 2001, 「박제상의 가계와 관등 나마의 의미」, 『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 혜안, 257~258쪽). 본 기록에는 박제상이 삽량주간(歃良州干)이었다고 전하고, 『삼국유사』에는 삽라군태수(歃羅郡太守)였다고 전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한다. 또한 중고기 말·중대 초에 군에 태수(太守)를 파견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주목하건대, 제상의 관직이 삽량주간 또는 삽라군태수였다고 전하는 것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다. 5세기 초반에 신라에서 박제상을 삽량(삽라; 경남 양산시)지역에 어떤 이유 때문에 파견한 것을 중대 이후에 이와 같이 부회한 것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제상은 418년에 눌지왕의 부름을 받아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눌지왕의 동생 복호(卜好)를 귀환시키는 데에 공을 세웠고, 왜에 볼모로 가 있던 눌지왕의 또 다른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지략(智略)으로 귀국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그 자신은 왜인에게 잡혀 화형(火刑)당하였다. 눌지왕은 왜에서 순국한 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추증하였고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의 부인으로 삼았다. 박제상열전의 원전은 경덕왕 16년(575) 삽량주(歃良州)를 양주(良州)로 개칭하기 이전인 중대에 박제상의 행적을 정리한 전승자료였고, 여기에 전하는 우식곡(憂息曲) 관련 기록은 김대문(金大問)이 지은 『악본(樂本)』에도 전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의 원전은 본서 박제상열전의 원전보다 늦게 정리된 별도의 박제상 관련 전승자료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전덕재, 2021, 『삼국사기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 주류성, 424~426쪽). 註) 157 모말(毛末): 박제상(朴堤上)의 다른 이름이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3월조에서는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라고 하였다. ‘毛’의 훈은 ‘털’, ‘토’, ‘톨’인데, 본서 지리지에서 한주(漢州) 주부토군(主夫吐郡)을 장제군(長堤郡)으로, 삭주(朔州) 나제군(奈堤郡)을 나토군(奈吐郡)으로, 명주(溟州) 속토현(束吐縣)과 토상현(吐上縣)을 속제현(梀隄縣)과 제상현(隄上縣)으로 개정하였던 것을 통해 신라에서 ‘토(吐)’가 둑, 즉 제방을 의미하는 제(堤 또는 제(隄))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말(末)·마리(麻利)는 ‘맏’과 통하는 글자로서 ‘상(上)’이나 ‘수(首)’를 뜻한다. 결국 모말과 모마리를 훈차(訓借)한 것이 ‘제상(堤上)’이라 이해할 수 있다 (이병도, 1977,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665쪽). 註) 158 혁거세(赫居世): 신라의 건국 시조로, 박씨의 시조이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의 기록과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 혁거세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전한다. 기원전 69년에 탄생하여, 13세가 되던 기원전 57년에 신라의 왕위에 올랐고, 그로부터 만 60년이 지난 서기 4년에 승하하였다. 또한 경주지역의 선주 세력인 6촌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으며, 알영(閼英)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죽어서 오릉(五陵)에 묻혔는데,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남해(南解)가 신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혁거세의 왕호는 거서간(居西干)인데, 오직 혁거세에게 붙여진 것이다. 註) 159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신라 제5대 왕이다. 본서 신라본기에 따르면, 탈해이사금의 뒤를 이어 서기 80년에 왕위에 올라 112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계보상으로는 시조 혁거세의 혈통을 이어받은 박씨로서,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파사이사금 즉위년조와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5대 파사이질금조에서는 제3대 왕인 유리왕(노례왕)의 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즉위년에 이어 나오는 세주(細注)에는 유리왕의 아우인 나로(奈老)의 아들이었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파사이사금은 총명하고 위엄이 있던 덕분에, 형으로 전하는 일성(逸聖)에 앞서 즉위할 수 있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지마(祗摩)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註) 160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일성이사금 15년조에 박아도(朴阿道)를 갈문왕에 봉하였다고 전한다. 본 기록에 따르면, 아도는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으로 박제상(朴堤上)의 할아버지라고 한다. 한편 일성이사금(逸聖尼師今) 15년에 박아도를 갈문왕으로 추봉한 것은 그가 일성이사금의 친부(親父)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즉 본서 신라본기 일성이사금 즉위조에 일성이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의 맏아들로 나오지만, 유리와 일성의 사망 연도가 각각 서기 57년과 154년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양자가 실제 부자 관계였을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하고, 오히려 일성이 갈문왕으로 추봉한 박아도가 그의 아버지였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이기백, 1974,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20쪽). 註) 161 물품(勿品): 박제상의 아버지이다. 본 기록에 따르면, 시조 혁거세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관등은 파진찬(波珍飡)이라 한다. 종래에 물품이 파진찬이라 전하나, 그의 아들 박제상이 생전에 관등이 나마(奈麻)였고, 추증받은 관등이 대아찬(大阿飡)이란 점으로 보아, 이것은 그대로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박제상의 가계조차도 신뢰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김용선, 1979, 「박제상소고」, 『전해종박사회갑기념 사학논총』, 일조각). 註) 162 제상이 관직에 나아가 삽량주간(歃良州干)이 되었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는 제상이 삽라군태수(歃羅郡太守)로 재직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삽량주와 삽라군은 오늘날 경남 양산시에 해당한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조에 “문무왕 5년, 인덕(麟德) 2년(665)에 상주(上州)와 하주(下州)의 땅을 분할하여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다.”라고 전한다. 또한 신라가 군에 태수(太守)를 파견하기 시작한 것은 642년 대야성전투(大耶城戰鬪) 이후였던 것으로 확인된다(전덕재, 2021, 272~273쪽). 따라서 눌지왕 2년(418)에 제상이 삽량주간 또는 삽라군태수에 재직하고 있다는 표현은 중대 이후에 부회한 것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현재 박제상을 둘러싸고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본 기록에 제상이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라 전하는 것을 신뢰하여 신라에서 지방 소국이나 낙동강을 통한 수로교통을 감찰할 목적으로 양산지역에 파견한 관리였다고 보는 견해(전덕재, 1990, 13~15쪽), 신라에서 양산지역에 파견한 군사지휘관으로 보는 견해(강종훈, 2000, 192쪽) 등이 제기되었다. 반면에 본 기록에 전하는 세계를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이해하는 연구자는 박제상이 삽량(양산)지역 출신의 지방세력이라고 보거나(김용선, 1979, 603쪽) 울산지역 출신의 지방세력으로 보는 견해(木村誠, 1992; 백승옥, 2011, 49~51쪽)를 제기하였다. 한편 박제상은 시조 혁거세의 후손이었지만, 석탈해가 박씨세력 가운데 일부를 지방에 강제로 이주시켰고, 박제상은 그러한 사람 가운데 양산지역에 토착화한 사람의 후손으로 이해하는 견해(주보돈, 1998, 828쪽), 제상은 왕경 출신으로서 실성왕과 눌지왕의 대립에서 실성왕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실성왕의 몰락과 함께 양산지역으로 좌천되었다고 보는 견해(선석열, 2001, 47~48쪽)도 있다. 이밖에 박제상은 왕경 출신이었지만, 양산지역으로 사민(徙民)되어 재지에서 토착화된 지방세력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신현웅, 2006). 〈참고문헌〉 전덕재, 1990, 「신라 주군제성립 배경 연구」, 『한국사론』 22,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전덕재, 2021, 「신라 중고기 말·중대 초 縣制의 실시와 지방관에 대한 고찰」, 『신라문화』 58 강종훈, 2000, 『신라상고사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김용선, 1979, 「박제상소고」, 『전해종박사회갑기념 사학논총』, 일조각 木村誠, 1992, 「新羅國家發生期の外交」, 『アジアのなかの日本史』 Ⅱ, 東京大學出版會 백승옥, 2011, 「고대 울산의 역사 지리적 성격과 박제상」, 『한일관계사연구』 38 주보돈, 1998, 「박제상과 5세기 초 신라의 정치동향」, 『경북사학』 21 선석열, 2001, 「박제상의 가계와 관등 나마의 의미」, 『신라국가성립과정연구』, 혜안 신현웅, 2006, 「박제상의 출자와 신분 문제」, 『신라문화』 27바로가기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내다 (402년) 이보다 앞서 실성왕(實聖王)註 163 원년 임인(壬寅; 402)에 왜국(倭國)과 화친을 맺었는데, 왜왕이 나물왕(奈勿王)註 164의 아들 미사흔(未斯欣)註 165을 볼모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일찍이 나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註 166 한스럽게 여겨,註 167 그의 아들에게 원한을 풀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왜왕의 청을〕거절하지 않고 보냈다.註 168 또한〔실성왕〕11년 임자(壬子; 412)에 고구려 역시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註 169를 볼모로 삼고자 하니, 대왕이 또한 그를 〔볼모로) 보냈다.註 170 註) 163 실성왕(實聖王): 신라 제18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02~417년이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에는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삼국유사』권제1 왕력에는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이라고 전한다. 현재 나물왕대부터 마립간을 칭하였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마립간호가 실성에 의하여 일단 폐지되었다가 눌지 때 다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李基白, 1974, 22쪽 각주 30; 주보돈, 2016, 179~180쪽). 한편 『일본서기』 권9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0월조에 미질이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于岐; 미사흔)를 왜에 볼모로 보냈다고 전하는 신라왕(新羅王) 파사매금(波沙寐錦)이 실성왕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전덕재, 2010, 77~78쪽)가 제기되어 실성왕대에도 매금, 즉 마립간이란 왕호를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서 실주왕(實主王), 보금(寶金)이 실성왕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였고,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전세(前世) 2왕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하는 사부지왕(斯夫智王)을 실성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성의 아버지는 알지(閼智)의 후손인 이찬(伊飡) 대서지(大西知)인데,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그가 미추왕(味鄒王)의 동생이라고 전한다. 이에 따른다면, 실성은 나물과 같이 미추이사금의 조카이자 사위가 된다. 실성왕의 어머니는 아간(阿干) 석등보(昔登保)의 딸이고 왕비는 미추왕의 딸이다. 다만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어머니는 예생부인(禮生夫人) 석씨(昔氏)이며, 왕비는 아류부인(阿留夫人)이라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전왕인 나물에게는 아들 눌지가 있었지만, 그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사촌이면서 동서인 실성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나물의 경우 그 아버지, 어머니, 부인이 모두 김씨였던 데에 반하여 실성은 모계(母系)가 석씨였기 때문에 실성이 석씨 세력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장창은, 2008, 96쪽). 실성은 나물왕 37년(392)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나물왕이 죽기 1년 전인 401년 돌아와 이듬해 즉위하였다. 그는 나물왕의 아들 미사흔과 복호를 각각 왜와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으며, 417년에 눌지를 해치려다가 도리어 눌지에게 시해되었다. 〈참고문헌〉 이기백, 1974,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장창은, 2008, 『신라 상고기 정치변동과 고구려 관계』, 신서원 주보돈, 2016, 「마립간기의 출범과 부체제」, 『신라의 건국과 성장』(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02), 경상북도 전덕재, 2010, 「6세기 금석문을 통해 본 신라 관등제의 정비과정」, 『목간과 문자』 5 註) 164 나물왕(奈勿王): 신라 제17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356~402년이다. 나물왕은 두 번째 김씨 왕으로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중국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내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시대가 변혁되고 명칭이 바뀌었다[時代變革 名號改易]”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나물왕대에 신라가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음을 엿볼 수 있다. 나물왕 때에 신라는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왜(倭)의 침입을 물리치는 등 고구려에 종속적인 위치에 있었다. 나물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나물이사금 즉위년조 참조. 註) 165 미사흔(未斯欣): 나물왕의 아들이자 눌지마립간의 동생이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실성이사금 원년 3월조에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나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삼았다.”고 전하고, 눌지마립간 2년 가을조에 “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이 왜국(倭國)에서 도망해 돌아왔다.”, 동왕 17년 여름 5월조에 “미사흔(未斯欣)이 죽자 서불한(舒弗邯)으로 추증하였다.”라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서는 제17대 나밀왕(那密王)이 즉위한 지 36년 경인(庚寅, 390)에 왜왕이 왕자 한 명을 왜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이에 나물왕이 셋째 아들 미해(美海 또는 미토희(未吐希))를 시켜 왜국에 예방하게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0 자비마립간조에는 미질희각간(未叱希角干) 또는 미흔각간(未欣角干)이라 전하는데, 나물왕 김제상조에 전하는 미토희(未吐希)는 미질희각간(未叱希)의 오기로 봄이 합리적이다. 또한 『일본서기』 권9 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0월조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이 미질이지파진간기(微叱已知波珍干岐)를 왜에 볼모로 보냈다고 전한다. 여기서 파사매금은 실성왕, 파진간기는 파진찬(波珍飡)이란 관등, 미질이지는 미사흔을 가리킨다 (전덕재, 2010, 「6세기 금석문을 통해 본 신라 관등제의 정비과정」, 『목간과 문자』 5, 77~78쪽). 본서 신라본기와 더불어 『일본서기』에 실성왕이 미사흔(미질이지)을 왜에 볼모로 보냈다고 전하므로, 나밀왕(나물왕)이 미해(미사흔)를 왜에 보냈다고 전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무엇인가 착오가 있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본 기록과 본서 신라본기에 의하면, 미사흔은 실성이사금 원년(402) 왜국에 볼모로 보내졌다가 눌지마립간 2년(418) 왜국에서 도망하여 돌아왔고. 눌지왕의 명으로 박제상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동왕 17년(433)에 사망하여 서불한(舒弗邯)으로 추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자비마립간 4년(461)에는 왕이 미사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으며 그 사이에서 소지마립간이 태어났다. 註) 166 왕은 일찍이 나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을: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나물이사금 37년(392) 봄 정월조에 “고구려에서 사신을 보냈다. 왕은 고구려가 강성하였기 때문에 이찬(伊湌) 대서지(大西知)의 아들 실성(實聖)을 보내 볼모로 삼았다.”고 전하고, 나물이사금 46년(402) 가을 7월조에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실성(實聖)이 돌아왔다.”고 전한다. 신라는 377년에 고구려의 도움을 받아 전진(前秦)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382년에 또 한 차례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를 통해 근초고왕대 백제의 팽창에 대항하여 신라와 고구려가 377년 이래 우호 관계를 맺었음을 엿볼 수 있다. 신라는 백제가 가야세력 및 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자, 혹시 백제, 왜·가야세력이 서로 연합하여 자신을 협공하지 않을까 하는 경계심을 가졌다. 고구려는 371년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래 백제에 수세적인 입장이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 신라를 끌어들여 백제를 협공하면, 전략적으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구려가 신라에 접근하였고, 신라 역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구려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370년대 후반에 신라가 고구려에 완전히 부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고구려는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국력이 약화된 상태였고, 게다가 전략적으로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신라와의 연결이 절실하였던 시점이었으므로 신라에게 부용국의 지위를 강요하였을 가능성은 적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개토왕(廣開土王)이 즉위한 이래 고구려의 국력이 강성해지자, 신라 나물왕은 392년에 실성을 인질로 보내면서 스스로 고구려 부용국(附庸國)이라 자처하였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러한 사실은「광개토왕릉비」에 신라 나물왕이 399년에 변방을 쳐들어온 왜를 물리치기 위해 구원을 요청하면서 스스로 고구려의 노객(奴客)이라 칭하였다고 전하는 것을 통해 입증할 수 있 다(전덕재, 2000, 「4세기 국제관계의 재편과 신라의 대응」, 『역사와 현실』 36, 85~87쪽). 註) 167 한스럽게 여겨: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눌지마립간 즉위년조에 “나물왕 37년(392)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나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였다.”고 전한다. 註) 168 이보다 앞서 실성왕(實聖王) 원년 임인(壬寅; 402)에 … 거절하지 않고 보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실성이사금 원년(402) 3월조에 “왜국(倭國)과 우호 관계를 맺고 나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았다.”고 전한다. 417년에 눌지가 실성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를 통해 실성왕이 나물왕의 맏아들 눌지를 잠재적인 정적(政敵)으로 인식하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실성왕은 한편으로 왜와의 화친을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한편으로 정적인 눌지를 견제하기 위해 눌지의 동생 미사흔을 왜의 요청을 받아들여 볼모로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전덕재, 2000, 「4세기 국제관계의 재편과 신라의 대응」, 『역사와 현실』 36, 80쪽). 그러나 본서 신라본기에 실성이사금 4년과 6년, 7년, 14년에 왜가 신라를 침략하였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건대, 신라와 왜와의 우호 관계는 곧바로 깨졌음을 알 수 있다. 註) 169 복호(卜好): 나물왕의 아들이자 눌지마립간의 동생이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실성이사금 11년(412)조에 “나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고 전하고, 눌지마립간 2년(418) 봄 정월조에 “복호가 고구려에서 나마(奈麻) 제상(堤上)과 함께 돌아왔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눌지왕 즉위 3년 기미(己未; 419)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보해(寶海; 복호)를 고구려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눌지왕이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가게 하고, 김무알(金武謁)을 보좌로 삼았으며, 장수왕이 그를 억류하여 보내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여기에 눌지왕 10년 을축(乙丑; 425)에 박제상이 기계(奇計)를 써서 보해를 고구려에서 데려왔다고 전하여 본서에 전하는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기년 문제에 대해서는 본 기록과 신라본기에 전하는 기록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 것으로 판단되고, 『삼국유사』에 전하는 기년은 후대에 부회 윤색한 것으로 이해된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제20 자비마립간조에 자비왕의 비가 파호갈문왕(巴胡葛文王)의 딸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법흥왕 즉위년조에 법흥왕의 비를 보도보인(保刀夫人), 본서 권제9 신라본기제9 혜공왕 16년조에 혜공왕의 첫째 왕비를 신보부인(新寶夫人), 본서 권제10 신라본기제10 민애왕 즉위년조에 민애왕의 어머니가 귀보부인(貴寶夫人)이라 전하나,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각각 파도부인(巴刀夫人), 신파부인(神巴夫人), 귀파부인(貴巴夫人)이라 하였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상주 문소군조에서 문소군의 영현(領縣)인 진보현(眞寶縣)이 본래 칠파화현(柒巴火縣)이었다고 한다. 이들 자료를 통해 보(寶 또는 保)와 파(巴)가 서로 통용되는 글자였음을 살필 수 있다. 더구나 본서 권제10 신라본기제10 흥덕왕 3년 여름 4월조에 장보고(張保皐)를 궁복(弓福)이라고기술하였으나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신무대왕·염장·궁파조에서는 그를 궁파(弓巴)라고 표기하였는데, 복(福)도 파(巴)와 통용되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유사』 권제4 의해제5 사복불언조에서 사동(蛇童)을 설명하면서 세주(細注)에 “아래에서 사복(蛇卜) 또는 사파(蛇巴) 또는 사복(蛇伏)이라 하였으니, 모두 (사)동을 말한다.”라고 언급하였는데, 복(卜 또는 伏)과 파(巴)가 서로 통용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처럼 보(寶 또는 保), 복(福 또는 卜, 伏)이 서로 통용되었음을 주목하건대, 복호(卜好)와 파호(巴胡)는 동일 인물이라고 봄이 옳을 것이다 (今西龍, 1933, 「新羅葛文王考」, 『新羅史硏究』, 近沢書店, 252쪽; 이기백, 1974, 「신라시대의 갈문왕」, 『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13쪽). 복호가 고구려에서 귀국한 후에 눌지왕이 그를 갈문왕으로 봉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사금시기에 주로 왕의 죽은 아버지나 왕비의 부친, 즉 장인 등을 갈문왕으로 책봉하다가 눌지왕대에 이르러 왕의 동생을 갈문왕으로 책봉하는 것이 관례였음을 알려주는 사례로서 주목된다. 註) 170 또한〔실성왕〕11년 임자(壬子; 412)에 … 그를 〔볼모로) 보냈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실성이사금 11년(412)조에 “나물왕의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눌지왕 즉위 3년 기미(己未; 419)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보해(寶海; 복호)를 고구려에 보내줄 것을 요청하자, 눌지왕이 보해에게 명하여 고구려에 가게 하였다고 전하여 본 기록 및 신라본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수주촌간 벌보말 등이 박제상을 천거하다 눌지왕(訥祗王)註 171이 즉위함에 이르러,註 172 말 잘하는 사람을 구해〔두 나라에〕가서 그들을 맞이해올 것을 생각하였다. 수주촌간(水酒村干)註 173 벌보말(伐寶靺)註 174과 일리촌간(一利村干)註 175 구리내(仇里迺),註 176 이이촌간(利伊村干)註 177 파로(波老)註 178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들을〕불러 물어 말하기를 “나의 두 아우가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로 가서 여러 해가 지났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 사이이기 때문에 그리운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다. 〔그들이〕살아 돌아오게 하기를 바라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다 함께 말하기를, “신들은 삽량주간 제상이 강직하고 용맹하며 지모(智謀)가 있다고 들었으니, 가히 전하(殿下)의 근심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註 179 註) 171 눌지왕(訥祗王): 신라 제19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417~458년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에는 눌지왕이 일명 내지왕(內只王)이라고 전한다. 따라서 지증왕 4년(503)에 건립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나오는‘내지왕(乃智王)’역시 눌지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물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보반부인(保反夫人)이다. 왕비는 실성이사금의 딸인데, 눌지는 실성의 사위이면서 정치적으로 실성과 대립하였던 것이다. 417년에 눌지는 자신을 해치려 한 실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박제상을 통해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가 있었던 복호와 미사흔을 구출해 왔으며, 백제와 동맹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대항하였다. 註) 172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함에 이르러: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눌지마립간 즉위년조에 “나물왕 37년(392)에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는데, 실성이 돌아와 왕이 되자 나물이 자기를 외국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 아들을 해쳐 원한을 갚으려 하였다. 사람을 보내 고구려에 있었을 때 서로 알던 사람을 초청하여 몰래 말하기를, ‘눌지를 보면 곧 죽이시오.’라고 하였다. 드디어 눌지로 하여금 가서 길 중간에서〔고구려 사람을〕마중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이 눌지를 보니 외모와 정신이 시원스럽고 우아해 군자의 풍모가 있으므로 마침내 고하기를, ‘그대 나라의 왕이 나에게 당신을 해치라고 시켰으나 지금 그대를 보니 차마 해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이내 돌아갔다. 눌지가 이를 원망하여 도리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전한다. 註) 173 수주촌간(水酒村干): 수주촌의 지배자를 가리킨다. 본서 권제34 지리1 상주조에 “예천군(禮泉郡)은 본래 수주군(水酒郡)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보주(甫州)이다.”라고 전한다. 따라서 수주촌은 오늘날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단양 신라 적성비」와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 전하는 물사벌(勿思伐)이 바로 수주촌을 가리킨다 (전덕재, 2009, 「관산성전투에 대한 새로운 고찰」, 『신라문화』 34, 57~58쪽). 신라에서 간(干)은 소국과 촌, 부(部)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위호(位號)로 널리 사용되었다. 註) 174 벌보말(伐寶靺): 눌지왕이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귀환시키려 할 때, 두 사람을 데려올 수 있는 적임자로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벌보말은 수주촌간(水酒村干), 즉 오늘날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위치한 수주촌의 지배자였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와 「포항 냉수리 신라비」,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촌의 지배자들을‘~촌(村) ~간지(干支)’라고 표기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포항 중성리 신라비」에‘소두고리촌(蘇豆古利村) 구추열지간지(仇鄒列支干支), 나음지촌(那音支村) 복보간지(卜步干支)’와 같이 표기한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본래는‘수주촌 벌보말간지(伐寶靺干支)’라고 표기하였는데, 후대에‘수주촌간 벌보말’로 개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註) 175 일리촌간(一利村干): 일리촌의 지배자를 가리킨다.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강주조에 “성산군(星山郡)은 본래 일리군(一利郡)이산군(里山郡)이라고도 하였다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가리현(加利縣)이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성산군은 오늘날 경북 고령군 성산면에 해당한다. 따라서 일리촌간은 오늘날 고령군 성산면에 위치한 일리촌의 지배자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註) 176 구리내(仇里迺): 눌지왕이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귀환시키려 할 때, 두 사람을 데려올 수 있는 적임자로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구리내는 오늘날 경북 고령군 성산면에 위치한 일리촌의 지배자였다. 벌보말과 마찬가지로 구리내의 경우도 본래‘일리촌(一利村) 구리내간지(仇里迺干支)’라고 표기하였으나 후대에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로 개서한 것으로 이해된다. 註) 177 이이촌간(利伊村干): 이이촌의 지배자를 가리킨다. 본서 권제2 신라본기제2 나해이사금 12년 봄 정월조에 “왕자 이음(利音, 혹은 나음(奈音)이라고도 하였다)을 이벌찬(伊伐湌)에 임명하여, 중앙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겸하여 담당하도록 하였다.”고 전한다. 이를 통해‘奈’와‘利’가 통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이촌간의 이름이 파로(波老)인데,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22년 9월조에 파로(波路)가 오늘날 경북 영주시에 해당하는 날이군(捺已郡) 사람이라고, 본서 권제35 잡지제4 지리2 삭주조에 “나령군(奈靈郡)은 본래 백제 나이군(奈已郡)이었다.”고 전한다. 나이군은 날이군과 마찬가지로 경북 영주시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여러 기록을 종합하건대, 이이촌(利伊村)은 나이촌(奈已村)의 다른 이름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김철준, 1952,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상), 『역사학보』 1; 1990, 『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38쪽). 이에 따른다면, 이이촌간은 오늘날 경부 영주시에 위치한 이이촌의 지배자라고 볼 수 있다. 註) 178 파로(波老): 눌지왕이 왜와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었던 미사흔(未斯欣)과 복호(卜好)를 귀환시키려 할 때, 두 사람을 데려올 수 있는 적임자로 박제상(朴堤上)을 추천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당시 파로는 오늘날 경북 영주시에 위치한 이이촌(나이촌)의 지배자였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22년(500) 9월조에 소지왕이 날이군(捺已郡; 경북 영주시)에 행차하였을 때, 날이군 사람인 파로(波路)가 그의 딸을 왕에게 바쳤으나 거절하였다가, 후에 그녀를 궁궐의 별실에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이이촌간 파로(波老)와 날이군 사람 파로(波路)는 동일 인물이라 보기 어렵지만, 후자가 전자의 후손이거나 또는 그 가문에 속한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김철준, 1990, 『한국고대사회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38쪽). 벌보말, 구리내와 마찬가지로 파로의 경우도 본래‘이이촌(利伊村) 파로간지(波老干支)’라고 표기하였으나 후대에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로 개서한 것으로 이해된다. 註) 179 눌지왕(訥祗王)이 즉위함에 이르러 … 풀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눌지왕〕10년 을축(乙丑; 425)에 이르러 왕이 신하들과 국내의 호걸·협객을 불러 모아 친히 연회를 베풀었다. 술 순배가 세 번 돌아 여러 가지 음악이 시작되자, 왕이 눈물을 흘리며 여러 신하에게 말하기를, ‘전에 아버님께서 성심으로 백성을 위한 정사를 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을 동쪽으로 왜국에 보냈다가 다시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또 내가 즉위한 이래로 이웃 나라의 군사가 심히 강성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았는데, 유독 고구려가 친교를 맺자는 말을 하므로, 내가 그 말을 믿고 내 아우를 고구려에 사절로 보냈더니, 고구려 역시 억류해두고 보내지 않았다. 내가 비록 부귀를 누린다지만, 하루라도 잠시나마〔이 일을〕잊고 울지 않을 때가 없었다. 만약 두 아우를 만나게 되어 함께 선왕의 사당에 참배하게 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겠는데, 누가 능히 그 계책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백관(百官)이 모두 아뢰기를,‘반드시 지혜와 용기를 가져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신들은 삽라군태수(歃羅郡太守) 제상(提上)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에는 눌지왕이 보해(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다음, 그가 호걸·협객들을 불러 모아 미사흔과 복호를 데려올 계책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백관들이 삽라군태수 제상을 천거하였다고 전하여 본 기록의 내용과 차이가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고구려에서 복호를 데려오다 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세 신하의 말을 일러주고 가주기를 청하였다. 제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비록 어리석고 못났으나 감히 명을 삼가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교빙(交聘)의 예를 갖추어 고구려로 들어가, 왕에게註 180 말하기를, “이웃 나라와 친교(親交)하는 도리는 정성과 신의뿐입니다. 왕자를 볼모로 교환하는 것은 오패(五霸)註 181에도 미치지 못한 행위로서 참으로 말세(末世)의 일입니다. 지금 저희 임금의 사랑하는 아우가 이곳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저희 임금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도와주려는 뜻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생각하며 잊지 않고 있습니다.註 182 만약 대왕께서 고맙게도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마치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런 손해될 것이 없으나,註 183 저희 임금이 대왕께 입은 은덕(恩德)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것이오니, 왕께서 이에 대해 유념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좋다”라고 말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註 184 註) 180 왕에게: 여기서 왕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을 가리킨다. 註) 181 오패(五霸): 중국 춘추시대 봉건제후 가운데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다섯 제후를 말한다. 즉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 초(楚)의 장왕(莊王), 오(吳)의 합려(闔閭), , 월(越)의 구천(句踐)을 지칭한다. 혹은 오의 합려, 월의 구천 대신에 진(秦)의 목공(穆公), 송(宋)의 양공(襄公)을 들며, 혹은 제의 환공, 진의 문공, 송의 양공, 진의 목공, 오왕(吳王) 부차(夫差)를 꼽기도 한다. 모두가 국가를 일시에 부강하게 하였으나, 도의(道義)나 왕도(王道)에 의한 것이 아니고 권모술수(權謀術數)로 쟁패(爭霸)하였기 때문에 유가(儒家)에서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60~761쪽). 註) 182 저희 임금은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 잊지 않고 있습니다: 원문은‘寡君以鶺鴒在原之意 永懷不已’이다. ‘鶺鴒在原’은『시경(詩經)』소아(小雅) 상체(常棣)편에 “척령(鶺鴒)이 언덕에 있으니, 형제가 위급하고 어렵게 되었도다. 매양 좋은 친구가 있으나, 무심코 길이 탄식 하노라[鶺鴒在原 兄弟急難. 每有良朋 況也永歎]”라고 전하는 것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척령(鶺鴒)은 할미새를 가리킨다. ‘척령지원(鶺鴒在原)’은 할미새는 수조(水鳥)인데, 언덕에 있으면, 상처(常處)를 잃은 것이기 때문에 울며 알아서 그의 동류(同類)를 찾는다는 말로서, 형제가 위급하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실을 비유하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61쪽). 註) 183 마치 아홉 마리의 소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아무런 손해될 것이 없고: 많은 것 가운데 극히 일부분이라는 뜻이다. 원문은 ‘若九牛之落一毛 無所損也’이다. 이것은『번천문집(樊川文集)』권3에 전하는 두목(杜牧)이 지은 「낙중감찰병가만 송위초노습유귀조(洛中監察病假滿 送韋楚老拾遺歸朝)」에 나오는 구절 [獨鶴初沖太虛日 九牛新落一毛時] 및 『소명문선(昭明文選)』권41에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 나오는 구절[假令僕伏法受誅 若九牛亡一毛 與螻螘何異]을 적절하게 편집하여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61쪽). 본서 권제41 열전제1 김유신(상)조에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다고 하여도 무성한 수풀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 [一葉落 茂林無所損].”라고 전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註) 184 마침내 교빙(交聘)의 예를 갖추어 …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본 기록에는 박제상이 장수왕을 설득하여 복호를 귀환시켰다고 전하나,『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는 이와는 달리 박제상이 보해(복호)를 몰래 데리고 왔다고 전한다. 이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상이〕왕 앞에서 직접 명령을 받고, 곧장 북해(北海)의 길로 가서 변장을 하고 고구려로 들어갔다. 보해가 있는 곳에 나아가 함께 도망할 날짜를 약속하고, 먼저 5월 15일에 고성(高城)의 수구(水口)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한 기일이 가까워지자 보해가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조회에 나가지 않다가, 밤중에 몰래 도망쳐 고성의 해변에 이르렀다.〔장수〕왕이 이를 알고 수십 명을 시켜 뒤쫓게 하였다. 고성에 이르러 따라 미쳤으나 보해가 고구려에 있을 때에 항상 가깝게 상종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까닭에 군사들이 그를 매우 동정하여 모두가 화살촉을 뽑고 쏘았으므로 드디어 살아서 돌아왔다.” 『삼국유사』기록에 고성이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이것은 경덕왕 때에 달홀군(達忽郡)을 개칭한 것에 해당한다. 따라서『삼국유사』기록은 경덕왕대 이후에 정리된 전거 자료에 의거하여 기술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삼국유사』기록의 원전은 신라 하대 또는 고려 초기에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데려온 사실을 보다 극적인 내용으로 각색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향하다 〔고구려에서 두 사람이〕귀국하기에 이르자, 대왕이 기뻐하며 위로하고 말하기를, “나는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였는데, 이제 단지 한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제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이 비록 노둔한 재주를 가졌음에도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왕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대국(大國)이고, 왕 역시 어진 임금이었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신(臣)이 한마디 말로 깨우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왜인 같은 경우는 말로 깨우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거짓 계략을 써서 왕자를 돌아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이 저곳에 가면, 나라를 배반하여 논죄(論罪)하였음을 저들이 듣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여 아내와 자식도 만나지 않고 율포(栗浦)에註 185 다다라 배를 타고 왜국으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소식을〕 듣고 달려와 포구에 이르러 배를 바라보며 대성통곡하며 말하기를, “잘 다녀오십시오.”라고 하였다. 제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나는 장차 명을 받아 적국(敵國)에 들어갈 것이니, 당신은 다시 만날 기약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註 186 註) 185 율포(栗浦): 본서 권제34 잡지제3 지리1 양주 임관군조에 “동진현(東津縣)은 본래 율포현(栗浦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울주(蔚州)에 합쳐져 속하였다.”고 전한다. 동진현은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강동동과 구유동, 정자동 일대[옛 울주군 강동면]에 해당한다. 따라서 율포는 옛 강동면에 위치한 포구로 이해할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2 경상도 울주군 산천조에 “유포(柳浦)는 고을 동쪽 30리 바다 어구에 있다.”라고 전한다. 유포는 현재 울산광역시 북구 구유동에 위치한 포구이다. 종래에 조선시대의 유포가 신라의 율포에 해당한다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고석규 외, 2005,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568쪽). 註) 186 이에 죽기를 스스로 맹세하여 … 기약을 하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는 “이때 제상은〔눌지왕의 말을〕듣고 재배하며 조정과 하직하고, 말을 타고 집에 들르지도 않은 채, 길을 떠나 곧장 율포(栗浦) 해변에 이르렀다. 그 아내가 소문을 듣고 율포까지 쫓아가 보니, 남편은 이미 배 위에 있었다. 아내가 안타깝게 불렀으나, 제상은 다만 손만 흔들고 〔배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여기에 “처음에 제상이〔왜로〕떠날 때 부인이 소문을 듣고 뒤쫓았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망덕사(望德寺)의 문 남쪽 모래 위에 이르러 넘어져 길게 절규하였던 까닭에, 그 모래사장을 장사(長沙)라 불렀다.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를 부축하여 돌아오려 하였는데,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 지명을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오랜 뒤에도 부인이 그 사모함을 이기지 못해 세 딸을 이끌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하다가 죽었다. 그리하여〔부인은〕치술신모(鵄述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祠堂)이 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후대에 장사와 벌지지 등의 지명 유래를 제상의 아내와 관련하여 부회한 사실 및 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로 숭배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라고 볼 수 있다. 현재 경북 경주시 외동면에 있는 치술령에 박제상의 부인과 관련된 민간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 내용은 박제상의 아내가 딸들을 데리고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몸은 변하여 돌이 되고, 영혼은 변하여 새가 되었는데, 그 돌을 현재 망부석(望夫石)이라 부르고, 영혼이 변한 새는 은을암(隱乙庵)이라는 절의 법당 뒤에 큰 동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또 은을암의 동굴로부터 매일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쌀이 조금씩 흘러나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강인구 외, 2002, 『역주 삼국유사』 Ⅰ, 이회문화사, 284쪽). 미사흔을 왜에서 구출하여 보내다 마침내 곧바로 왜국에 들어가 마치 나라를 배반하고 온 것처럼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백제 사람이 앞서 왜에 들어와 거짓으로 꾸며 말하기를, “신라와 고구려가 왕의 나라를 침략하려 모의하였다.”라고 하였다. 왜에서 마침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찰하며 지키게 하였는데,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巡邏軍)을 모두 잡아 죽였다.註 187 왜왕이 이에 백제 사람의 말을 사실로 여겼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상이 실제로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였다.註 188 이에 군사를 내어 장차 신라를 습격하기로 하고, 아울러 제상과 미사흔을 선발하여 장수로 임명하고, 겸하여 그들로 하여금 길을 인도하게 하였다. 일행이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에註 189 이르렀는데, 왜의 여러 장수가 은밀하게 의논하여 말하기를, “신라를 멸한 후에 제상과 미사흔의 아내와 자식을 잡아 돌아오자.”라고 하였다.註 190 제상이 그 사실을 알고 미사흔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며 마치 물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하였더니, 왜인들이 그것을 보고〔그들에게〕딴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며 좋아하였다. 이에 제상이 미사흔에게 몰래 본국[신라]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였다. 미사흔이 말하기를,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찌 혼자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뜻을 이룰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미사흔이 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통곡하며 작별 인사하고 돌아갔다.註 191 註) 187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 왜의 순라군(巡邏軍)을 모두 잡아 죽였다: 『일본서기』 권14 웅략천황(雄略天皇) 8년 봄 2월조에 “천황(天皇)이 즉위한 이래로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이 배반하고 속여서 공물[苞苴]을 납입(納入)하지 않은 지가 올해로 8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中國; 倭國)의 뜻을 크게 두려워하여 고려와의 친분을 두텁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고려왕은 정병(精兵) 100인을 보내 신라를 수호(守護)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충주고구려비」에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의 당주(幢主)가 존재하였다고 전하는데, 이것은 신라 영토 내에 고구려 군대가 주둔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이해되고 있다. 본 기록은 이와 같은 기록들과 함께 5세기 초반에 고구려의 군대가 신라에 주둔하며 신라를 침략하려는 왜를 견제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주목된다. 註) 188 마침내 곧바로 왜국에 들어가 … 배반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제상이 왜국에 가서 거짓으로 말하기를, ‘계림왕(雞林王)이 아무 죄도 없는 나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였기 때문에 여기로 도망하여 왔습니다.’라고 하니, 왜왕은 그 말을 믿고 집을 주어 편히 살게 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일본서기』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봄 3월조에 “신라왕은 우례사벌(汙禮斯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제상),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에 이전에 인질이 되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미사흔)을 데리고 오려는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허지벌한을 꾀어 거짓으로‘사자(使者)인 우례사벌, 모마리질지들이 신에게, 『우리 왕은 신이 오래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처자(妻子)를 적몰(籍沒)하여 노비로 삼았습니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원컨대 잠시 본국에 돌아가서 허실(虛實)을 알아보고자 합니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그러자 황태후(皇太后)가 허락하였다.”라고 전한다. 註) 189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 원문은 ‘海中山島’이다. 현재의 대마도(對馬島)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4(주석편하)』,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761쪽). 註) 190 이에 군사를 내어 … 자식을 잡아 돌아오자.”라고 하였다: 본 기록은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와 『일본서기』에 전하지 않는다. 註) 191 제상이 그 사실을 알고 … 작별 인사하고 돌아갔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이때 재상은 항상 미해(美海; 미사흔)를 모시고 해변에서 새와 물고기를 잡았는데, 그 잡은 것을 매번 왜왕에게 바치니, 왕이 무척 기뻐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때마침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제상이〔미해에게〕말하기를,‘떠나가실 만합니다.’라고 하였더니, 미해가‘그러면 같이 가자’라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 ‘신이 만약 간다면, 왜인이 알고 쫓아올까 염려됩니다. 원컨대 신은 이곳에 남아서 그들이 쫓는 것을 막을까 합니다.’라고 하니, 미해가 ‘지금 나는 그대를 아버지나 형과 다름없이 여기는데, 어찌 그대를 버리고 혼자만 돌아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제상이 말하기를,‘신이 능히 공의 목숨을 구함으로써 대왕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어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라고 하고 술을 따라 미해에게 바쳤다. 이때 계림(雞林) 사람 강구려(康仇麗)가 왜국에 와 있었는데, 그에게 미해를 호송하게 하였다.”라고 전한다. 본 기록에는 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는 가는 도중에 머문 섬에서 두 사람이 고기와 오리를 잡는 척하다가 미사흔만 신라로 귀국하였는데, 마침 연무가 자욱하게 끼어 왜군이 미사흔을 추격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신라 정벌에 관한 언급 없이, 다만 왜왕이 마련해준 거처 근처에서 미해와 제상이 새와 물고기를 사냥하며 즐기다가 새벽 안개가 끼어 날이 앞을 분간하기 어려운 틈을 타서 제상이 미해를 귀국시켰다고 기술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왜에서 박제상을 불태워 죽이다 제상이 홀로 방 안에서 자다가 늦게 일어났는데, 미사흔으로 하여금 멀리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러 사람이 묻기를, “장군께서는 어찌하여 늦게 일어났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여 말하기를, “어제 배를 타 나른하고 피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제상이〕방에서 나오자,〔그제서야〕미사흔이 도망간 것을 알아챘다. 이에 제상을 포박하고 배를 저어〔미사흔을〕추격하였다. 때마침 연무가 자욱하여 어두컴컴해짐에 따라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인들이〕제상을 왕이 있는 곳에 보내자,〔왜왕이〕곧바로 목도(木島)로註 192 유배보냈다가 얼마 안 있어 사람을 시켜 장작불에 불을 질러〔제상의〕신체를 태운 후에 그의 목을 베었다.註 193 註) 192 목도(木島): 현재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다. 註) 193 〔왜인들이〕 제상을 왕이 있는 곳에 보내자, … 그의 목을 베었다: 본 기록과 달리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제상의 죽음과 관련된 상세한 내용이 전한다. 이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에 제상을 옥에 가두고 묻기를, ‘너는 어찌하여 너희 나라 왕자를 보냈느냐?’고 하자, 〔제상이〕 대답하기를, ‘나는 계림의 신하이지 왜국의 신하가 아니다. 지금 우리 임금의 소원을 이루게 하려고 한 것뿐이니, 감히 무엇을 그대에게 말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이르기를, ‘지금 너는 이미 나의 신하가 되었는데도 계림의 신하라고 말하느냐? 그렇다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갖출 것이지만, 만약 왜국의 신하라고 말하면, 반드시 후한 녹(祿)으로 상을 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상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벌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작록(爵祿)은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왜)왕이 노하여 제상의 다리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다. 지금 갈대 위에 피 흔적이 있는데, 세간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전한다. 〔왜왕이〕 다시 묻기를,‘너는 어느 나라의 신하냐?’라고 하자, 〔제상이〕‘나는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뜨겁게 달군 쇠 위에 세워 놓고 묻기를,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라고 하니, 〔제상이〕 ‘나는 계림의 신하다.’라고 하였다. 왜왕이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목도(木島)에서 불태워 죽였다.” 한편 『일본서기』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봄 3월조에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 미사흔)이 신라로 돌아가는 것을 황태후가 허락하였다는 기록 다음에 “그래서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함께 보냈다. 모두 대마(對馬)에 이르러 서해(鉏海)의 수문(水門)에서 묵었다. 그때 신라의 사자(使者)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은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허지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허수아비를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놓고, 거짓으로 병에 걸린 척하며 습진언에게 고하여, ‘미질허지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어간다.’라고 하였다. 습진언은 사람을 보내 병자(病者)를 보게 하였다. 곧 속은 것을 알고, 신라의 사자 3인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불태워 죽였다. 이에 신라로 가서 도비진(蹈鞴津)에 진을 치고, 초라성(草羅城; 경남 양산)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고 전한다. 신라에서 국가를 위해 순국(殉國)한 영웅들의 일화를 가무극 또는 연극의 형태로 각색하여 공연하였다. 박제상의 일화를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으로 각색하여 가무극이나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하였는데, 아마도 이때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과 같은 스토리가 정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64쪽).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증하다 대왕이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추증하고,註 194 그 가족들에게 〔물품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미사흔에게 제상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註 195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제상의 은혜에〕 보답하였다. 註) 194 대왕이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며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추증하고: 본서 지증왕대 이전 신라본기 기록, 『양서(梁書)』 신라전, 「포항 중성리 신라비」,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대아찬 관등이 보이지 않는다. 법흥왕 11년(524)「울진 봉평리 신라비」에 태아간지(太阿干支)가 비로소 나오는데, 이를 주목한다면, 대아간지(대아찬)는「포항 중성리 신라비」가 건립된 지증왕 4년(503)에서 법흥왕 11년(524) 사이에 설치하였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법흥왕 7년(520)에 17관등을 정비하였다고 이해하고 있으므로(노태돈, 1989, 186쪽), 대아간지(대아찬)를 증설한 시점 역시 법흥왕 7년(520) 무렵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전덕재, 1996, 128~129쪽). 이에 따른다면, 눌지왕이 418년 무렵에 박제상을 대아찬으로 추증하였다고 전하는 본 기록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다. 본래 눌지왕이 대아찬 이하 간지계열의 관등을 추층하였고, 520년 이후에 다시 박제상에게 대아찬을 추증하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한다. 〈참고문헌〉 노태돈, 1989, 「울진봉평신라비와 신라의 관등제」, 『한국고대사연구』 2 전덕재, 1996,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註) 195 미사흔에게 제상의 둘째 딸과 혼인하여: 『삼국유사』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미해(미사흔)가 귀국한 후에 “〔제상의〕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삼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본서 권제3 신라본기제3 소지마립간 즉위년조에 소지마립간의 어머니 김씨는 서불한(舒弗邯) 미사흔(未斯欣)의 딸이라고 전한다. 한편 『삼국유사』권제1 왕력 제20대 자비마립간조에 왕비는 파호갈문왕(巴胡葛文王)의 딸 또는 미질희(未叱希) 각간(角干) 또는 미흔(未欣) 각간의 딸이라고 전한다. 본서 신라본기와『삼국유사』왕력의 기록에 따르면, 자비왕은 눌지왕의 동생인 파호갈문왕, 즉 복호(卜胡)와 미사흔(미질희)의 딸과 혼인하였고, 소지마립간의 어머니는 미사흔의 딸이자, 박제상의 외손녀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눌지왕이 귀국한 미사흔을 위해 연회를 열다 처음에 미사흔이 돌아오자, 〔눌지왕이〕 6부(部)註 196에 명하여 멀리 나가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註 197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형제들이〔함께〕모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이 친히 노래 부르고 춤을 추어 그의 〔기쁜〕 뜻을 나타냈는데, 지금〔고려〕의 향악(鄕樂)註 198 우식곡(憂息曲)註 199이 바로 이것이다. 註) 196 6부(部): 신라 상고기(上古期)에 국정을 운영하던 6개의 단위정치체 및 중고기 이후 왕경(王京)의 행정구역단위를 지칭한다. 본서 권제1 신라본기제1 유리이사금 9년조에 종전의 6촌 명칭을 양부(梁部), 사량부(沙梁部),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본피부(本彼部), 한기부(漢祇部), 습비부(習比部) 등 6부로 개편하였다고 전한다. 다만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는 양부(梁部)의 명칭이 급량부(及梁部)로 나온다. 501년에 건립된「포항 중성리 신라비」에는 훼(喙), 사훼(沙喙), 모단벌훼(牟旦伐喙), 본파훼(本波喙) 등 4개 부명, 503년에 건립된「포항 냉수리 신라비」에서는 훼(喙), 사훼(沙喙), 본피(本彼), 사피(斯彼) 등 4개 부명, 524년에 건립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는 훼부(喙部), 사훼부(沙喙部), 잠훼부(岑喙部), 본파부(本波部) 등 4개 부명(部名)이 각각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훼나 훼부는 양부, 사훼나 사훼부는 사량부, 모단벌훼나 잠훼부는 점량부, 사피는 습비부, 본파훼나 본피⋅본파부는 본피부에 각각 상응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밖에 여러 금석문에서 습부(習部), 한지벌부(漢只伐部), 한지(漢只)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 발견 이후에도 상고기(上古期) 신라 6부가 여전히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이해하는 견해가 제기되었지만(이종욱, 2000), 그러나 상고기에 6부는 본래 자치권을 보유한 단위정치체라는 사실이 6세기 초의 금석문을 통해 새롭게 확인되었기 때문에 현재 6세기 전반 법흥왕대까지도 국왕이 자치권을 보유한 6부와 공동으로 국정을 운영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덕재, 1996, 38~56쪽; 노태돈, 2000; 강종훈, 2000, 157~181쪽; 주보돈, 1992; 2006). 현재 상고기에 6부가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이해하면서도 이사금시기에 6부가 축차적(逐次的)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전덕재, 1996, 27~37쪽)와 분화설(分化說)에 입각하여 마립간시기에 6부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 (주보돈, 1992; 강종훈, 2000, 157~170쪽), 5세기를 거치면서 6부가 축차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武田幸男, 1990) 등이 제기되었다. 반면에 유리이사금대에 양부와 사량부가 먼저 성립된 다음, 기림이사금대를 전후해 국읍 주변 4방의 촌을 4부로 편제하였다는 단계 성립설을 주장한 견해도 있다(박대재, 2014). 6부는 6세기 전반 법흥왕대에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함께 점차 단위정치체로서의 성격을 상실하고, 왕경의 행정구역단위로 변모하였다. 각 부에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을 설치하고, 감랑(監郞)이나 감신(監臣) 등의 관원을 설치했다는 본서 권제38 잡지제7 직관(상)의 기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참고문헌〉 이종욱, 2000, 「한국 고대의 부와 그 성격-소위 부체제설 비판을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 17 전덕재, 1996, 『신라육부체제연구』, 일조각 노태돈, 2000, 「초기 고대국가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한국고대사연구』 17 강종훈, 2000, 『신라 상고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주보돈, 1992, 「삼국시대의 귀족과 신분제-신라를 중심으로-」, 『한국사회발전사론』, 일조각 주보돈, 2006, 「신라의 부와 부체제」, 『부대사학』 30 박대재, 2014, 「신라 초기의 국읍과 6촌」, 『신라문화』 43 註) 197 처음에 미사흔이 돌아오자, …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나물왕 김제상조에 “미해(美海; 미사흔)는 바다를 건너와 강구려(康仇麗)에게 먼저 나라에 알리게 하였다. 〔눌지〕왕은 놀랍고도 기뻐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굴헐역(屈歇驛)에서 맞이하게 하였다. 왕도 친아우 보해(寶海)와 함께 남교(南郊)에서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 잔치를 베풀고 크게 사면령을 내렸으며, 〔제상의〕 아내를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삼고, 그의 딸을 미해공의 부인으로 삼았다.”라고 전한다. 본 기록에는 미사흔이 귀국하자, 6부에게 명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고 전하는 반면, 『삼국유사』에는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고 전하여 차이를 보인다. 중고기에 왕경 6부인만이 경위(京位)를 수여받은 점을 미루어 보건대, 백관보다는 6부가 당대에 사용한 표현에 가깝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본 기록은 5세기 전반 눌지왕대에 6부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국정을 운영하였음을 알려주는 자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전덕재, 1996, 30~31쪽). 굴헐역은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굴화리에 위치하였던 굴화역(堀火驛)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일본서기』 권9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攝政) 5년 봄 3월조에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대마도(對馬島)의 서해수문(鉏海水門)에 머물던 미질허벌한(微叱許智伐旱; 미사흔)을 몰래 신라로 보냈다고 전한다. 종래에 서해수문은 대마도 북안에 위치한, 즉 상현군(上縣郡) 상대마정(上對馬町) 악포(鰐浦)로 비정되는 화이진(和珥津)과 동일한 곳으로 추정하였다(小島憲之·直木孝次郞·西宮一民·藏中進·毛利正守譯, 1994, 427쪽). 미사흔은 대마도의 화이진(서해수문)을 떠나 부산 수영만을 경유하여 울산만에 다다르고, 여기에서 굴화리로 가서 신라 관리들의 접대를 받은 다음, 언양을 지나 경주의 월성(月城)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전덕재, 1996, 『신라육부체연구』, 일조각 小島憲之·直木孝次郞·西宮一民·藏中進·毛利正守譯, 1994, 『日本書紀』 ①, 小學館 註) 198 향악(鄕樂): 고려 음악 가운데 향악은 신라시대로부터 전해온 전통적인 음악을 가리킨다. 『송사(宋史)』 권478 고려전에 대중상부(大中祥符) 8년, 즉 고려 현종 6년(1015)에 어사(御事) 민관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아뢴 글에 “음악은 두 종류가 있는데, 당악(唐樂)과 향악(鄕樂)입니다.”라고 언급한 내용이 전하고, 거기에서 더 구체적으로 “음악은 매우 저급하여 금(金)·석(石) 계통의 음(音)이 없고, (송나라에서) 악기를 하사한 이후에 비로소 좌·우 2부(部)로 구분하였으니, 좌부(左部)는 중국음악이며, 우부(右部)는 향악으로 그(고려) 옛날부터 전해온 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고려도경(高麗圖經)』권40 악률(樂律)조에 “지금 (고려의) 음악에 양부(兩部)가 있는데, 좌부는 당악이니, 중국의 음악이고, 우부는 향악이니 이(夷)의 음악이다. 중국음악은 악기가 다 중국제도 그대로이다. 다만 향악에는 고(鼓)·판(版)·생(笙)·우(竽)·필률(觱篥)·공후(箜篌)·오현금(五絃琴)·비파(琵琶)·쟁(箏)·적(笛)이 있어 그 형제(形制)가 약간씩 다르다.”고 전한다. 『고려사』 권70 지제24 악조에서는 고려의 음악을 크게 당악(唐樂)과 아악(雅樂), 속악(俗樂)으로 구분하여 소개하였고, 속악은 또한 향악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또한『고려사』권71 지제25 악2 속악조에서 고려시대에 환구(圜丘)와 사직(社稷)에 제사할 때와 태묘(太廟), 선농(先農), 문성왕묘(文宣王廟)에 제향할 때에 아헌(亞獻), 종헌(終獻) 및 송신(送神)에 모두 향악을 연주하였다고 밝혔다. 『송사』고려전과『고려도경』의 기록을 통하여 고려시대에 중국의 음악을 당악, 그것에 대비된 고려의 음악을 향악이라고 불렀음을 살필 수 있다. 고려 중기 우식곡(憂息曲)이 바로 향악에 속하였던 것이다. 신라는 9세기 후반 경문왕대 또는 헌강왕대에 당악(唐樂)과 대비된 신라의 음악을 향악이라고 범주화하였는데. 여기에는 신라 고유의 음악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 음악, 서역에서 전래된 음악까지 망라되었다 (전덕재, 2020, 『한국 고대 음악과 고려악』, 학연문화사, 139~146쪽). 註) 199 우식곡(憂息曲): 눌지왕(訥祗王)이 왜국에서 귀환한 미사흔(未斯欣)을 축하하기 위하여 개최한 연회에서 춤추고 노래 부른 것에서 유래된 신라의 가무(歌舞)이다. 본서 권제32 잡지제1 악조에 우식악(憂息樂)은 눌지왕 때에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세종실록』 세종 12년 2월 19일조에 박연(朴堧)이 “거문고 타는 법은 전하지만, 가사(歌詞)는 알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최자(嗺子)·탁목(啄木)·우식(憂息)·다수희(多手喜)·청평(청평악)[淸平(淸平樂)]·거사련(居士戀) 등이 이것이다.”라고 언급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세종실록』 세종 18년(1436) 병진 윤6월 24일조에서 “의정부(議政府)에서 예조(禮曹)의 첩정(牒呈)에 의하여 아뢰기를, ‘최자·탁목·우식은 바로 우리나라의 고악(古樂)인데, 지금 관습도감(慣習都監)에서 모두 이를 시험해 선발하지 않고 있어 장차 폐지되어 없어질 지경에 이르고 있사오니, 아울러 연습하게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성종대에 편찬된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거문고의 악조로 최자조(嗺子調)·탁목조(啄木調)·우식조(憂息調)가 있다고 하였다. 세종 18년(1463)에 거문고로 최자·우식·탁목을 연주하는 법을 전습(傳習)하도록 조치하였고, 그것이 성종대에 현금을 연주하는 악조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신라에서는 우식곡이 춤과 노래, 가사가 있는 가무였으나, 고려시대에 우식은 거문고의 연주에 맞추어 가사(歌詞)를 창하는 성악곡(聲樂曲)으로 변화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가사마저 망실되어 기악곡으로 변질되었고, 그 타는 법은 악조로서 정립되어 후대에 전승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