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訓民正音)/가림토문기원설

가림토문과 한자의 기원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 <상선약수>

유위자 2025. 11. 14. 22:20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 : 훈민정음 가림토문기원설] * 가림토문과 한자의 기원 -天文記錄으로 찾은 韓國史- <상선약수> 中國은 문자가 없던 시대의 日蝕까지 기록해 놓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일식기록은 기원전 2128 년의 일식으로 書經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기원전 2128 년에 中國에는 文字가 없었다. 漢字의 원형이라는 갑골문자마저 殷末 200 년 동안(B.C. 1250~B.C. 1046?)에 사용 했다고 날조했다. 周나라 선왕(宣王, B.C. 827~ B.C. 782) 때 周文을 만들었고, 진(秦)나라 때 소전(小篆)을 만들어 문자를 통일 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甲骨文字가 발견된 黃河 下流는 우리나라 영토이다. 일식기록으로 본 三國이 黃河 河流를 축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三國은 수세기에 걸쳐 치열하게 싸운 나라들이다. 殷이 黃河 하류에 있었다면, 殷을 멸망시킨 周도, 秦도, 漢도 黃河 하류에 있어야 한다. 黃河 하류가 中土라면, 三國이 전쟁을 하기 전에 中國부터 멸망 시켜야 했다. 하지만 三國史記나 三國遺史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黃河 下流에는 中國이 없었던 것이다. 中國은 우리나라 文字를 빌려 쓴 것에 불과하다. 기원 직후 玉篇에는 漢字가 22,726 字였다. 1716 년에 만들었다는 강희자전(康熙字典)에는 47,035 字로 나와 있다. 그러면 기원전 11세기의 甲骨文字는 몇 字 였을까. 고작 3 千字이다. 甲骨文字는 점치는 데 사용된 문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일상생활 에서는 3 천 단어쯤 있으면 의사소통이 가능 하다고 하지만, 그 옛날에는 3 千字로 절대 역사책을 쓸 수 없었다. 역사책 이라는 특성상, 온갖 분야의 전문용어가 등장한다. 관직만 해도 대체 몇 개인가. ▲영변지에 실린 鹿圖文 : 한웅대성존(桓雄大聖尊)이 하늘에서 내려온 뒤에 신지혁덕(神誌赫德)에게 명하여 鹿圖文으로 기록 하였는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일찍이 神誌의 전서(篆書)로 쓴 옛 비석을 보고 다시 문서(帖)를 만들어 세상에 전한 것이다 (桓雄大聖尊天降後命神誌赫德以鹿圖文記之崔孤雲致遠亦嘗見神誌篆古碑更復作帖而傳於世者也 蘇塗經典本訓). 孔丘(孔子)가 썼다는 書經(尙書)이 中國의 첫 역사책 이라고 했다. 孔丘 이전에 문자가 있었다면, 書經 이전에 역사책이 나왔어야 한다. 孔丘는 기원전 5~6세기 사람이다. 書經이 중국의 첫 역사책 이라면 한자는 周 宣王이 아니라, 기원전 6세기부터 중국에서 사용된 문자[중국 전설에서 한자를 개발했다는 창힐(倉頡)이 배운 부도(符都 : 符都誌는 朴堤上이 쓴 글로 창세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의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인 녹도문(鹿圖文)이다]라는 소리다. 그런데 書經은 요순시대(堯舜時代 : 기원전 24세기)부터 기록한 책이다. 2천년 가까이 역사를 기억했다가 기록할 수 있는가. 일본은 300년의 역사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나라 역사책을 보고 고사기(古事記), 日本書紀를 썼다. 우리나라의 첫 文字는 기원전 39 세기에 만든 鹿圖文이고, 가림토(加臨土) 문자도 기원전 2181년에 만들었다. 그렇다면 기원전 2128 년에 일어났다고 書經에 기록된 일식은 어느 나라가 관측하고 기록한 일식인가. 문자가 없는 중국이 2천년이나 일식기록을 전해올 수 있는가. ▲ 가림토 문자 : 3 세檀君 가륵(嘉勒) 2년(庚子 B.C.2181).. 이에 삼랑을보륵(三郞乙普勒)에게 명을 내려 정음(正音) 38 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토(加臨土)이다... 또한 3년(辛丑)에 神誌 고설(高契)에게 명을 내려 「倍達留記」를 편수하게 하였다 (庚子二年..是命三郞乙普勒譔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辛丑三年命神誌高契編修倍達留記 檀君世紀) 加臨土文字는 후대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원전이 된다. 한자의 기원과 가림토문 이야기 일반적으로 표의문자인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다.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진 창힐문자가 있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다. 창힐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다. 위 그림의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이며 그 왼쪽이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인 신지문자(녹도문)이다.『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다.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이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된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된 것이다.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이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문자이다. 창힐이 중원에 유통시킨 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한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 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은나라 유민을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신지문자보다 더 진보된 형태였을 것이다.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이 그 곳이다.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 거기에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다.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이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가 새겨져 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한글 자모 24자가 세종 때 창제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훈민정음의 "正音"에서 알 수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를 반포한 것이라기 보다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 3세 부루 때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桓檀古記"나 "대쥬신제국사"등 에서 언급한 된 있다. 실제로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을 7번이나 만주에 왕래하게 한 역사적 사실은 이를 어느 정도 뒷받침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오랑캐 정도로 알고 있는 여진이나 거란 몽고족은 바로 가림토 문자를 사용하던 우리 민족이란 것이다. 중국이란 나라는 이들 우리민족이 지배했을 때 강성한 제국을 유지하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여러 나라로 분열되곤 하였다. 이를 근거로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잃은 중국이 분열될 것이라는 예견 또한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가림토문자가 특이한 것은 전세계 어느 나라 문자와도 다른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문자가 대단히 반듯하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원시 한자의 모양도 구불구불 하였던 것이 단군 3세때 처음 만들어진 우리민족(쥬신족)의 가림토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한편 시베리아에 거주하던 쥬신족(숙신족)의 일부가 베링해를 거쳐 아메리카로 진출하였는데 이들이 바로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원이라고 한다. 놀라운 것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적 중에서 가림토 문자 'ㄷ' 'ㅁ' 'ㅐ'등이 새겨진 것이 발견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 뿐 아니라 사대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인도대륙의 한 고장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아도 뜻을 유추할 수 있을 정도로 가림토 문자가 사용되고 있다고 하여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이들의 주장이 더욱 실제적인 고증을 거치기를 기대한다. * 한글에 대한 상선약수님의 견해] - (천문기록으로 찾은 한국사에서) 그렇다면 한글은 정말 李氏朝鮮이 만든 것인가. 世宗이 한글 창제에 밤낮으로 고생한 나머지 안질이 나서 치료하기 위해 요양을 해야 했는데, ‘訓民正音'의 연구는 요양하러 간 행재소(行在所)에서 까지 골몰 했다고 했다. 그토록 힘들게 만들었는데, 이상하게도 한글의 제작과정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별로 없다. 訓民正音 解例本에 닿소리(자음)는 소리를 낼 때 발음기관의 생긴 모양을 본뜨고, 홀소리(모음)는 하늘(·)과 땅(ㅡ)과 사람(ㅣ)을 본떴다고 했다. 최만리(崔萬理) 등의 訓民正音 반대 상소문에서 “설혹 말하기를 비록 옛 글자 전자(篆字)를 모방 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다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고 해서 옛날 글자를 보고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 崔萬理는 集賢殿 학자로 副提學이다. 그 외 訓民正音 창제과정에 참여했다는 집현전 학자 이름만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訓民正音 解例本이나 世宗實錄에는 集賢殿 학자가 아니라 世宗이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정말 李氏朝鮮이 만들었다면, 한글 창제 과정을 상세하게 남겨 놓았을 것이다. 李成桂가 韓半島로 내빼고 나서 朱元璋이 빼앗은 高麗의 항해서적이 漢字가 아니라고 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8 대 후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에서 훈민정음 이전에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민간에서 사용하는 글자가 있었는데 그 수가 다 갖추어지지 못하고 그 모양에 일정한 규범이 없어 한 국가의 말을 적어 내기에는 모자란다고 적었다. 또한 고려와 탐라에서도 한자가 아닌 어떤 고유글자가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청비록[淸脾錄:조선 영조.정조 때의 문장가,실학자인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엮은 시평집]에는 10세기 후반에서 11세기 초에 장유(張維 1587~1638)가 중국의 강남에 갔을 때 고려에서 떠내려간 ‘슬(瑟)’이란 악기의 밑바닥에 쓰인 글을 중국 사람들이 읽지 못하자 그가 한문으로 옮겨 주었다는 기록이 있음을 보아 고려에 일정한 고유글자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카톨릭대학교의 이승재 교수는 고려시대 불경 등에 사용됐던 각필과 훈민정음의 자형이 일치되는 예가 무려 17개나 되며(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이종호, 국정브리핑) 中國의 江南은 티벳고원 북부의 怒江 상류 이남이다. 崔萬理의 上訴文에 특히 중요한 대목이 있다. “설사 언문이 전 왕조 때부터 있었다고 하더라도(借使諺文 自前朝有之) ” 前王朝는 물론 高麗다. 향찰(鄕札)은 三國 末에서 高麗 初까지 사용 했으므로 高麗의 航海書籍은 鄕札로 적은 것이 아니다. 한글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신지(神誌)글자는 朝鮮時代의 정책과도 배리되어 世祖, 睿宗, 成宗 시대에 전국적으로 禁止圖書로 정하고 국가적으로 회수 조치”했겠는가. 한글을 李氏朝鮮의 발명품으로 날조하기 위해서다. “李氏朝鮮의 政策”이라 함은 中奴에게 주지 않은 우리나라의 발명품을 모조리 李氏朝鮮의 발명품으로 둔갑 시키는 것이었다. ▲ 훈민정음 서문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것을 매우 딱하게 여기어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히어 나날의 소용에 편리 하도록 함에 있나니라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訓民正音序文) 우리나라가 漢字를 만들고, 2300 년이나 문제없이 사용해 왔다. 제 뜻을 잘 펼쳤기에 온갖 역사책에 문학서적, 과학서적 등 온갖 책을 다 저술했다. 漢字에 따라 말마저 바꾼 中奴는 역사책 조차 쓴 적이 없었다. 한민족을 수렁 같은 어리석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李成桂와 濊貊族이다. 이도(李祹: 李氏朝鮮의 世宗이라 불리는 濊貊族) 역시 高麗史 날조에 관여했던 濊貊族이다. “恭愍王 이후의 사실을 바로잡고, 특히 太祖에 관한 내용을 충실히 하”도록 즉 恭愍帝 이후 李氏朝鮮에 유리하도록 날조하고 李成桂에 대한 내용을 한없이 부풀리도록 李祹가 직접 지시했던 것이다. 李祹는 가짜 檀君陵까지 만든 자다. “우리 世宗께서는 檀君廟를 平壤에 설치 하였는데, 世祖 원년에 위패를 고쳐 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我世宗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揆園史話). " 濊貊族의 무덤은 陵이고 檀君의 무덤은 묘냐? 神人王儉은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의 시조가 아니다. 李祹가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나라 高麗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世界史에도 드문 위대한 통치자”는 高麗 皇帝였던 것이다. 李氏朝鮮은 高麗의 온갖 것을 다 베낀 나라다. 국내의 각종 소송 문건 및 서류는 보관하지 않으나 북송 황제의 조서나 어명, 사신들의 글은 왕부 서고에 보물처럼 간직하여 상국의 검열에 대비한다(고려도경) 高麗時代에 訴訟文件을 소중히 보관 했음은 李氏朝鮮이 高麗의 慣習法을 成文法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高麗가 소송문건도 안 남겼는데, 어떻게 李氏朝鮮이 高麗의 관습법을 알 것인가. 李氏朝鮮이 刑法 으로서 刑典에 모순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적용했다는 大明律의 실체는 바로 高麗의 法律이다. 明이 高麗의 법률을 그대로 베껴 大明律이라 한 것이다. 明이 高麗에게서 가로챈 것은 실로 엄청나다. 曆法(大統曆), 地圖(大明混一圖)까지 베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鳳皇이 우리나라를 상징하고 龍은 중국을 상징한다고 李成桂와 朱元璋이 하나씩 나눠가졌다. ◀ 정화 함대의 중심선박인 보선 상상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인터넷판에 실린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훔치는데 이골이 난 明이다. 明 역시 이전 왕조에만 高麗史를 배당한 것이 아니라, 明의 것으로도 가로챘다. 남을 위해 高麗의 역사를 베껴준 明이 자신을 위해 高麗史를 챙겼을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가. 그래서 明의 정화함대(鄭和艦隊)가 1421 년 아메리카를 발견 했다고 날조할 수 있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鄭和艦隊는 高麗의 艦隊다. 高麗는 세계 최고의 造船術과 航海術을 보유하고 있었다. 李舜臣이 壬辰倭亂 때(1592~1598) 倭船에 맞서 사용한 거북선이 高麗의 戰艦이다. 콜럼버스와 마젤란은 高麗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대항해에 나섰던 것이다. (高麗 함대가 언제 아메리카 탐험에 나섰을까. 蒙古가 여자를 내세워 高麗의 國富를 갈취할 때는 탐험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럴 돈이 있으면, 나 달라고 했을 나라가 아닌가. 武臣政權 때는 三別抄에 맞서, 高麗 皇帝도 군대를 보유해야 하니까, 그럴 여유가 없다. 鄭和 함대가 탐험 길에 오른 것은 武臣政變이 일어난 1170 년 이전이다) 高麗가 얼마나 찬란한 나라였는가 하면, 高麗史는 중국의 五大十國, 宋, 遼汗, 西夏, 金汗, 蒙汗, 明의 역사로 분배됐는데, 특히 宋에 집중되어 宋學이라는 학문까지 만들어냈다. 그 뿐만이 아니라 高麗史를 일부 챙긴 濊貊族의 나라 李氏朝鮮을 과학의 나라로 끌어올려 韓國史에서 가장 잘난 나라로 만들어 주었다. 저들 나라에 세계 최고,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를 한아름씩 안겨준 나라다. 淸조차 高麗의 도자기와 칠공예 기술을 계승해 서양에 수출까지 했을 정도다. 蒙汗도 억압하고 멸시한 宋의 역사책을 써주고, 明도 자신들을 억압, 멸시했다는 蒙汗의 역사책까지 써줬는데, 역사날조에 지대하게 공헌한 淸의 正史書를 아직까지도 써주지 않고 있다. 金汗史, 遼汗史, 蒙汗史는 高麗의 역사를 해체 한다는 목적이라도 있지만, 미개한 淸의 역사는 뭐하러 수고스럽게 쓸 것인가. 李氏朝鮮이 高麗처럼 가로챌 역사가 많은 나라 였다면, 淸이 망하자마자 日本하고 거래 해서라도 李氏朝鮮의 역사를 빼돌렸다. 李氏朝鮮에는 자랑할 만한 역사가 단 하나도 없다. 어째서 高麗는 과학문명이 찬란히 꽃피고 李氏朝鮮은 高麗의 발명품을 모조리 빼앗아야만 했는가. 高麗는 5 천년 한문화를 계승한 동아시아의 지배자로서 창의적 역량이 한껏 발휘될 수 있는 열린사회였고, 李氏朝鮮은 우리나라 피지배종족이 지배층으로 있어 창의적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던 한없이 쪼그라든 폐쇄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을 숭상한 나라이고, 李氏朝鮮은 과학기술을 천시한 나라였다. 그래서 高麗는 첨단과학무기로 동아시아를 제패해 찬란한 문명을 만들어냈고, 李氏朝鮮은 韓半島로 쪼그라들었다가 끝내 나라가 망한 것이다. 高麗는 古代社會와 李氏朝鮮을 잇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新羅 영토에서 건국한 高麗는 화약무기를 발명해 三國의 영토를 되찾은 대제국이다. 화약을 발명하고 거북선을 개발한 高麗는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주변 나라들을 모조리 정복했다. 高句麗의 계승국 高麗는 高句麗를 능가하는 나라였다. 高麗 시대에 5300 년의 우리나라 문화는 그 절정에 달해 있었다. 李成桂와 그 후손들은 그런 高麗史를 해체해 中國史로 꾸미고 李氏朝鮮史로 둔갑시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