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동이(東夷)군자국(君子國)/廣開土太帝碑

* 광개토대제비 약사 -상성약수님 정리-

유위자 2025. 8. 31. 09:54
* 광개토대제비 약사 -상성약수님 정리- - 1880년 이전 : 조선시대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39,註解)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에는 집안지방에 皇城이 있으며 그 북쪽 7리되는 곳에 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를 여진족의 유적으로 오인하고 있었다. - 1880년경 만주지역의 封禁이 풀린 뒤 청나라 농부에 의하여 발견된 비를 關月山이 조사한 뒤 비의 부분적인 탁본 이 북경의 금석학계에 소개됨 - 1882년경에 만주를 정탐여행중이던 일본군 參謀本部의 밀정 포병중위 酒勾景信(사까와 카게노부)에 의하여 쌍구 본 제작 일본 유입. - 1889년에 어용기관지인{會餘錄} 5집을 통해 비문 내용을 세상에 처음으로 공표. - 1899년경 부터는 일,청 양국에서 선명한 탁본을 얻고자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하였으며,이러한 과정에서 비 면의 마멸과 일부문자가 오독되기에 이르렀다. - 1928년 집안현 지사였던 유천성(劉天成)등이 2층 비각을 세움 - 1976년에 관리소홀로 2층비각이 소실되어 비문 일부도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능비 자체가 크게 훼손. - 1982년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속에 보존. 탁본의 종류 1) 사까와 쌍구가묵본(酒勾雙鉤加墨本) : 일본 참모본부의 밀정인 사까와 가케노부(酒勾景信)중위 임의로 문자를 판독한뒤 비문에 종이를 대고 문자의 테두리를 그린 이후 문자의 바같쪽을 먹물로 칠하여 가공한 것으로 묵수곽전 본(墨水廓塡本)으로도 불리운다. 2) 원석정탁본(原石精拓本) : 천진(天津)이나 북경(北京)에서 전문 탁공이 파견되기 시작한 1882년 이후의 일인 데,지금까지 알려진 초기 원석탁본은 불과 4-5종에 지나지 않아 능비연구의 최대 난관이 되어 왔다. 일본의 미즈다니(水谷悌二郞)씨가 소장하였던 탁본,대만 부사년도서관 소장탁본,한국의 임창순소장 탁본,최근에 발 견된 중국의 북경대학 소장탁본등은 탁출년대에 약간의 異論이 있으나, 능비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인 능비 발 견 초기의 원석탁본으로 비교적 선본(善本)들이다. 3)석회가공탁본(石灰加工拓本) : 능비가 발견되어 얼마 지나지 않은 1900년대부터 청,일(淸日)양국에서 탁본의 고 가매매(高價賣買)와 참모본부의 해독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비면에 진흙을 바르거나 석회칠(石灰塗付)을 하기 도 하여,'누가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짓을 하였을까?' 하는 비문변조 문제를 둘러싸고 한일학계의 쟁점이 되어왔 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탁본이 석회칠을 한 후의 탁본이며,지금도 비면의 일부에는 석회의 흔적이 남아 있 어 비문연구의 장애가 되고 있다. 4) 최근의 대표적 탁본 : 최근에 들어와 현대적 기법에 의해 새로운 원석탁본이 중국에서 만들어 지기 시작하였는 데 장명선탁본(張明善拓本,1963년)과 주운태탁본(1981년)이 있다. 광개토대제비 해설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한 땅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다. 그렇다면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어디에 있었나. 중 국 대륙이다. 韓半島와 滿州는 高句麗軍이 밟을 필요도 없는 땅이다. 중국 대륙의 百濟軍이 패해 百濟 皇帝가 항복 하면서 百濟의 전영토가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북아에다 비를 세울 이유는 없다.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전승기념비다. 廣開土境好太皇은 百濟와 新羅, 伽倻, 東夫餘가 있고 倭가 있는 중국 대륙과 토번(吐蕃)이 있는 중 앙아시아[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廣開土境好太皇은 즉위 8 년에 吐蕃을 정복했다. 吐蕃은 747 년 고선지(高仙芝 : ?~755)가 정벌할 때까지도 파미르 고원 너머 중앙아시아에 있었다. 廣開土境好太皇은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했던 것이다]를 정복한 것이다. ▲ 광개토경대훈적비문중 일부 廣開土境好太皇은 중국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은 高句麗와 百濟의 상대가 되지 않아, 끝없이 눈치를 보고 있던 소국 이었다. 중국은 朱蒙聖帝 때 정복된 이후 우리나라의 충실한 속국이었다. 역사를 날조한 李成桂는 碑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碑는 축소 韓國史를 증명하는 거짓 증거물 이기도 했다. 그래서 축소 역사 에 맞춰 비문 내용까지 바꿔 가짜 비를 제작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비롯해서 中原高句麗碑나 울진봉평비(蔚珍鳳 坪碑) 등 모든 비가 날조 역사에 맞춰 새로 새긴 가짜 碑다. 원래 廣開土境大勳跡碑는 高句麗 영토에 세웠다. 百濟 영토에 세우면, 당장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百濟 영토를 바라다 볼 수 있는 국경지대에 세웠을 것이다. 廣開土 境大勳跡碑가 세워진 구체적인 장소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던 百濟 영토에 가까운 西鴨綠江(嘉陵江) 혹은 黃 山江(揚子江), 漢水(黃河), 浿水(漢水) 유역으로 압축된다. 漢水 유역에 세웠다면, 訥縣(현 洛陽)과 百濟의 초기 도성이 있던 현 開封 사이의 국경지대이다. 百濟의 제 2 皇城(長沙)이 高句麗 땅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黃山江 (揚子江) 유역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어디에 세웠던 간에 가짜 비는 東鴨綠江 유역에 세 웠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을 西鴨綠江에서 東鴨綠江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복종하 며 쥐새끼처럼 살았던 華夏는 그 사실을 지우고자,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방치하고 있다. 훼손되고 붕괴 되기를 학 수고대하고 있다.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을 깎아낸 것도 모자라, 관리를 내세우며 파괴해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 두 깨어져 나갔다. 碑의 파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5 년에 한 번씩 합성 수지액을 주사하는데, 그 부분이 변색되고 표면까지 심하게 마모됐다. 중국이 늘상 하는 짓이지만, 말은 보호한다 면서도 실제로는 훼손하고 있다. 19 세기 말부터 中奴와 倭奴가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석회칠을 할 때 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자를 마구 집어넣고 불리한 글자는 뺐기 때문에 탁본을 만들 때마다 글자가 다르다. 어 째서 일본은 廣開土境大勳跡碑에다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깎아 내야만 했는가. 日本이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던 하 잘 것 없는 “벌거숭이” 왜(倭)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軍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5 년 동안 쌍구 가묵본[雙鉤加墨本 : 1884 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만듬]을 연구했고, 淸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군 참모본부 의 장교들이 수차에 걸쳐 현지에 가서 비문을 조사했다. 露日戰爭이 끝난 1905 년에는 비를 일본으로 운반할 계획 까지 세웠다. 日本軍 주도하에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날조하여 이른바 ‘任那日本府’라 하여 倭의 韓半島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征韓論으로 발전했다. 倭奴의 논리에 따르면, 韓 國이 고대 일본을 지배한 사실이 밝혀진 이상, 征倭論 및 미래 한국의 일본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인 셈이다! 倭奴 의 논리에 의하면, 노예들 스스로 列島를 우리나라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百濟와의 전과를 최대의 업적으로 현시한 것”은 그 당시 百濟가 동아시아 제1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百濟만을 百殘이라 하 고 百濟 皇帝를 殘主라 한 것은 百濟에 대한 원한이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 廣開 土境好太皇의 최대업적 이었다.(상선약수) [Photo] 100년전에 찍은 광개토대왕비 입력 : 2004.08.22 22:52 57' / 수정 : 2004.08.23 11:11 03' 100여년 전 한 조선인이 만주 지안(集安)시 광개토대왕비 옆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됐다. 정성길 경기 화성평화공원 박물관장이 22일 공개한 이 사진은 1903년 일본에서 발행된 ‘조선의 명소와 유적’이라는 화보집에 실린 것으로,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쓴 한복 차림의 인물이 눈내린 산야를 배경으로 비석 옆에 서 있다. 사진 설명에는 ‘고구려 호태왕릉비―삼국시대 고구려’라고 적어 고구려가 한국사임을 분명히 했다. /대구=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