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단고기(桓檀古記)기사/거란여진위구르

거란(契丹) 그리고 요(遼)

유위자 2025. 10. 12. 22:11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1_10 : 한단고기_거란,여진,위구르] * 거란(契丹) 그리고 요(遼) 거란족은 알타이어계의 몽골어족에 속하는 종족으로 우문선비의 일파이고, 고막해(庫莫奚)와 원류가 같은 종족으로 여겨진다. 거란의 이름은 [위서]에 처음 나타난다. 4세기경에 거란은 고막해와 분리되어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거란족은 지금의 서랍목륜하인 황수 유역과 용성(요녕 조양)의 북쪽에 주로 거주하였다. 남북조시기에 거란은 8부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통일된 부락연맹체를 이루지 못하였다. 479년에 고구려와 유연이 지 두우를 분할하려고 연합을 하자 거란은 이를 두려워해서 북위에게 도움을 청하였고, 유연과 고구려의 강력한 공격 의 여파는 고막해에 이르러 고막해마저 북위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였다. 수나라 말기에 거란은 대하씨를 수령으로 하는 부락연맹을 형성하였고, 고구려, 당나라와 돌궐에 3중 등거리외교를 구사하며 생존을 이어갔다. 당태종 시기(627-649)에 거란족의 수령인 굴가는 돌궐에서 벗어나 당나라에 귀부하였다. 648년에 당나라는 거란지 역에 송막도독부를 설치하고 대하씨 수령인 굴가를 송막도독에 임명하고 이씨(李氏)를 사성하였다. 730년경에 이르러 대하씨가 주도한 거란연맹은 무너지고 요련씨가 대신하게 되었다. 945년에 이르러 저오가한은 연 맹장에서 한걸음 나아가 스스로 가한에 올랐으며 당나라는 그에게 여전히 송막도독의 직함을 잇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거란은 중흥의 길에 접어 들었으며, 요련씨 부락연맹은 9가한을 이어 역사상 요련9장(長)의 시대를 열어 갔다. 그중에서 질랄부는 요련8부를 형성하여 거란부족을 통괄하였다. 901년에 질랄부의 야율아보기는 실위, 우궐, 해족을 정복하고, 발해와 요서, 요동을 놓고 20년 전쟁에 돌입하였다. 902년 야율아보기는 40만의 군대로 하동, 대북을 공략하여 9개 군현을 정복하였고, 905년에 이르러 후당을 공격하 여 북중국 지역을 대부분 공략하였다. 907년에 이르러 야울아보기는 거란국을 세우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916년 에 이르러 야율아보기는 황제를 칭하고 스스로를 천황제라 불렀으며 년호는 신책(神冊)으로 정하였다. 건국후 태조 야율아보기는 남쪽으로 대, 하북을 공격하고, 서쪽으로 돌궐, 토혼, 당항, 사타, 저복을 어지럽혔으 며, 926년에는 동쪽으로 진출하여 발해국을 멸망시l고 그 지역에 꼭두각시 정부인 동란국(東丹國)을 세웠다. 이해 야율아보기는 부여부에서 사망하였다. 936년에 태종 야율덕광은 석경당의 지원 요청을 받아 후당을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석경당을 후진의 황제로 옹립하 였으며, 출전의 대가로 연운16주를 할양받았다. 943년에 다시 군사를 일으켜 후진을 공격하였으며, 946년에는 후진을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이미 중국 북부지방의 역사를 주도하는 중심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듬해 거란은 나라 이름을 요(遼)로 바꾸었다. 거란의 국가제도를 바꾸 어 북원과 남원 이리근을 대왕으로 격상시키고 3경제도를 두었다. 세종 야율완은 950년에 남정의 길에 올라 후한을 공격하였으며, 이듬해는 후주를 공격하였다. 이해 9월에 세종 야 율완은 태정왕의 모반으로 살해되고, 태종의 큰 아들인 야율경이 목종으로 즉위하였다. 목종 야율경은 귀족들의 모반을 진압하고, 사타족이 세운 북한(北漢)을 도와 북주와 뒤이어 일어난 송나라를 공격 하였다. 969년에 목종이 시종엑 살해를 당하자 야율현이 경종으로 즉위하였다. 경종 야율현은 974년 송나라의 화의 요청을 받아 수교를 했으나 다시 북한의 요청으로 송나라를 공격하여 여러차례 승리하였다. 또한 979년에는 백마령, 사하 지역에서 송군을 격파하였다. 성종 야율융서는 12살에 즉위하였기에 승천황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성종은 국호를 다시 거란으로 바꾸고 고려와 송나라에 대한 군사행동을 시작하였다. 1004년에 거란군은 당흥, 수성 등지에서 송군을 격파하였고, 송나라는 단주에서 거란과 맹약을 맺었다. 이른바 단 연지맹(澶淵之盟)이었다. 이로써 거란과 송나라는 120여년동안 평화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거란은 성종 시기에 달단, 오고, 적열부의 군사를 이용하여 서쪽으로 회골(回鶻), 동쪽으로 고려를 침공하였으며 거란의 최전성기를 열었다. 그의 어머니인 소탁은 거란이 낳은 여걸이다. 어린 성종의 수렴청정을 맡아 직접 전쟁 에 참가하고 대신회의를 주재하고 개혁을 추진하였다. 성종 년간에 거란은 관리제도를 정돈하고 법률을 수정하였으 며, 세제개혁을 단행하여 동북아 최강국의 시대를 열었다. 1013년에 성종이 죽고나서 뒤를 이은 흥종 야율종직은 황태후의 섭정을 받았으나 1034년에 친정을 시작하여 송나 라, 서하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조복부는 속국으로 거느렸다. 1044년, 1049년, 1050년 3차례에 걸쳐 서하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서하를 번국으로 삼았다. 1055년에 흥종이 죽고 도종 야율홍기가 임금이 되었다. 도종은 부세를 균등하게 하고 무기를 수리하고 농상을 장려하였으며 도적을 금지하였다. 1063년에 황태숙(皇太叔) 야율중원이 행 궁을 침입하여 도종을 살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권신 야율을신이 권력을 농단하고 선의 황후와 태자 준을 살해하였다. 이를 따라 조복(阻卜), 적열(敵烈), 달리저(達里底), 발사모(拔思母), 다찰랄(茶扎 剌), 매리급부(梅里急部)등이 거란의 연맹체에서 이탈하였다.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북방기마연맹국가인 거란의 앞날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1101년에 도종의 손자인 야율연희가 임금이 되었다. 요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천조제이다. 이때 거란연맹에 속하였 던 여러 부족과 인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특히 오고(烏古), 적열(敵烈), 달단(韃靼)의 이반과 거란 귀족의 내란 은 거란의 역사운명을 더욱 빨리 재촉하였다. 1115년에 거란의 속국으로 억눌렸던 여진족의 아구타(阿骨打)가 금나 라를 세웠다. 천조제는 몇차례 친정을 단행했으나 누차 패하고 국토의 반을 잃었다. 1116년에서 1122년 사이에 금나라 군대는 요나라의 5경을 공략하였고 천조제는 지금의 내몽골 살랍제 서북쪽에 위 치한 협산(夾山)으로 도망하였다가 1125년에 지금의 산서성 응현인 응주에서 금나라 군대에게 체포되어 해빈왕으로 강등되어 유배되어 살다가 죽었고 요나라는 망하였다. 거란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제 1기에는 거란인들이 만주 지방에 정착한 시대이다. 제 2 기는 그들이 중국을 정복하고 요(遼) 나라를 세워 947년 부터 1125년 까지 중국을 통치한 시기이다. 요나라가 멸망 한 후에 잔존한 거란인들의 일부가 서부지방으로 이동하여 카라키타이(Karakitay) 제국을 세웠는데, 이 제국은 몽 골 제국이 발흥하기 까지 지속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제 2기인 거란족의 중국 통치 시대에 대해 자세히 다룰 필요 가 없다고 본다. 거란이란 이름은 AD 5세기 초부터 등장한다. 북위 왕조는 오늘날 열하(熱河) 지방인 당시의 제홀(Jehol) 지방, 즉 시라무렌 강과 흥안(興安 Khinghan)嶺 산맥에 군집해 있던 거란족들과 정규적인 접촉을 갖고 있었다. 5세기 말엽에 거란족들은 중국의 북방 변경에서 점차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되어 돌궐제국과 충돌하게 되었 다. 697년에 돌궐 카간 모초(Mo-ch'o)는 거란인들을 격퇴했다. 거란족의 이름은 오르콘 비문에서 돌궐제국에 귀속 된 피정복민들의 긴 명단 가운데 나타난다. 거란 문화는 정신적인 면에서나 물질적인 면에서 스텝 유목민들의 문화와 크게 다르다. 부족의 기원을 설명하는 설 화는 매우 특이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나타내는데 그 내용이 다른 알타이계 부족들의 기원 설화와는 크게 다름 을 보여주고 있다 : 초기 통치자들 중에서 두개골 형상의 신비스러운 한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텐트에서 펠트 밑에 숨어 있었다. 이 두개골은 의식이 행해지는 때에만 사람의 모습으로 텐트에서 나오는 데, 의식이 끝나면 두개골은 다시 텐트로 돌아가서 원래 형태로 변하곤 했다. 은둔처에 숨어 지내는 또 하나의 신 비스런 통치자의 머리는 멧돼지의 머리였다. 돼지, 소, 그리고 개들이 거란족의 문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으며, 그들의 문화는 쉽게 분간 할 수 없는 다양한 계층과 이인종(異人種)의 혼합체적인 성격을 지닌 진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거란족의 사회가 매 우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그 사회 구조 안에서 다양한 인종 그룹들이 다양한 기능적 임무를 담당했다는 것은 가히 짐작되는 일이다. 야금술 같은 몇몇 특수한 공업은 이러한 분야에 특별히 종사해 왔던 부족들에 의해 독점되었으며, 지배 계급 거란족들의 주된 역할은 여러 다른 부족들의 잠재적인 경제력을 잘 조합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북부 지역을 정복하여 그 곳에 "중국 왕조"를 세운 거란족은 결코 미문명화된 미개인의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거란 정권의 잠재적인 가능성은 야율(耶律) 부족 출신 아보기(阿保機 AD 872-926))의 탁월한 지도력 아래서 충분 히 발휘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한 줄기 햇살에 의해 잉태된 아보기는 세살 짜리 아이의 몸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네걸음을 걸었다한다. 그는 네달 후에 똑바로 걷기 시작했으며 한 돐이 되었을 때는 말을하며 장래의 일을 예언하였다한다. 이리하여, 그는 일찍부터 조상대대로 영웅으로서의 자질을 가진 천부적인 지도자로 공히 인 정되었다. 관습에 의해 부족연합체인 거란의 추장은 각 부족장들 가운데 3년 임기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아보기는 한번 추장 으로 추대된 후에 추장직을 양도하지 않고 9년을 집권했다. 마침내, 권력 이양의 압력을 받자 그는 서쪽으로 이동 하여 철광석과 소금이 산출되며 농업이 가능한 오늘날 차하르(察哈爾 Chahar)省 지역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비록 일종의 유배를 당해 후진에 처해 있었음에도, 아보기는 다른 거란계 부족들과 계속적인 접촉을 유 지하면서 자신의 경제력을 지렛대로하여 906년에 8개 부족을 통합하고 독보적인 추장이되는데 성공했다. 태조(太祖)가 된 아보기는 20년 동안 내부 세력을 강화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문자를 채택하게된 것은 문화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국제 관계에서 키르기즈인들에 대한 원정은 또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924년에 몽 골리아에서 우이구르인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웠던 키르기즈인들의 세력을 무찔렀던 것이다. 아보기는 키르기즈인 들을 격퇴한 후에 중국 서부 튀르키스탄에 이미 정착해서 살고 있던 우이구르인들에게 그들의 본토인 몽골리아에 다시 나라를 재건할 것을 제의했었다. 비록 우이구르인들이 아보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거란인들과 우이구르인들 사이의 관계는 매우 친밀하게 계속 이루어졌으며, 거란 문화에 대한 우이구르인들의 영향은 지대했 다. 이러한 문화적인 영향은 멜론 재배 기술로부터 우이구르 문자의 부분적 채택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하다. 아보기는 926년 고려(高麗) 원정에서 사망하였다. 태종(太宗, 927-947)으로 잘 알려진 그의 아들이며 후계자는 거 란제국의 세력을 더욱 더 확장시켰으며 중국북부 주요 행로들을 장악했다. 947년에 거란인들은 제국의 이름을 요 (遼)로 바꾸었는데, 그 이름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그들의 본토를 가로질러 흐르는 강의 이름이었다. 거란은 제국의 기반을 닦아 가면서 점차 활력을 잃어갔다. 1010년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고, 뒤이어 1014과 1018년에 또다시 도전하였다. 그러나, 매번 실패로 끝났는데,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고려의 강감찬 장군의 귀주(龜州)대첩으로 인해 거란은 크게 패하였다. 거란은 전통치 기간을 통해서 속민(屬民)이었던 여진족과 중국화된 발해인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1029년에는 발해(渤海)가 주동이 되어 고려인과 함께 거란에 대항 하여 싸웠는데, 이 시도는 아직 시기상조였으므로 쉽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침내 1114년에 거란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여진족이 북쪽 변경 밖의 여진족과 합세하여 거란제국을 붕괴시키고 말았다. 이리하여 마지막 거란 왕은 1125년, 퉁구스계 여진족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퇴위당했다. 이러한 불행이 있기 바로 전에 왕실 요인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은 몇몇 동료들과 함께 도망하여 중국 문서에 서요(西遼)라고 알려진 새 로운 거란제국을 설립하였다. 야율대석을 추종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검은 거란족(Black Khitans)이라는 의미로 카 라키타이(Karakitai)라고 불렀다 . 여기서 이름의 마지막 음절이 차이가 나는 것은 튀르크 방언의 특이성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족할만한 설명은 불가능하나, Khitan과 Kitai가 동일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카라키타이의 역사는 풀리지 않는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문서나 이슬람 문서에서 나타난 단서들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야율대석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역을 찾는 과정에서, 그는 매우 신중하 게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숨길 수 있는 도로들을 따라 갔다는 것이다. 거란인들 -더 정확히 카라키타이인들은 - 서쪽을 향해 행진하면서 두개의 루트를 따라갔다. 하나는 투르판(Turfan) 지역의 우이구르인들의 땅을 통과해 갔는 데, 그 곳에서 그들은 우이구르인들로부터 친근한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더 서쪽으로 행진했는데 그는 그 곳에서 카쉬가르(Kashgar)의 통치자에 의해 접근이 금지된 길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 곳으로부터 천산산맥 의 북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가게 되었는데, 이 길은 카라키타이인들이 지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이 후에 그들은 튀르크계 카라한조로부터 도읍 발라사군(Balasagun)을 탈취하여 그곳을 그들의 새로운 왕조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탁월한 국가 지도자였던 야율대석은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으로 구르 칸(Gur Khan)이라는 왕명을 사 용했으며, 그의 긴 통치기간(1124-1143) 동안에 카라키타이 제국의 세력을 서부 트란속시나(Transoxiana)까지 확 장했다. 전성기에는 제국의 영토가 서부 중국 국경으로부터 아랄해에 이르렀으며 남부 시베리아의 일부도 카라키타 이 제국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역사적 물증들이 있다. 수적으로 적은 거란인들은 거대한 전체 제국을 그들이 직접 관할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지방 장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부족들을 통괄하도록 하였으며 그들의 통치권을 허 락하는 대신 그들은 구르 칸에게 조공을 바쳤다. 카라키타이 제국은 1211년 징기스칸의 봉신(封臣)이며 나이만(Naiman)의 통치자인 큐츠류그(Küchlüg)에게 제국의 절반 가량을 정복당하고, 콰레즘의 무함메드 칸에게 제국의 서부지역을 빼앗김으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거란인들의 제국은 단지 2세기 반 동안 밖에 지속하지 못했지만 그들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처음 에는 중국 북부가, 후에는 전 중국이 거란족의 이름으로 서구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의 러시아어명은 지금도 Kitay이며, 영어명은 Cathay이다. 이 영어명은 르네상스 시대에 중국을 지칭하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13세기 전반부부터 줄곧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온 명칭이다. 거란족의 운명은 참으로 괄목할만하다. 몽골어를 사용하는 만주지방출신 소수그룹이 2세기동안 중국 북부를 정복하 였으며 마침내 세력권에서 밀려날 때 조차도 내륙아시아에 튀르크어와 이란어 사용 부족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유목 민 제국을 창립하여 통치할만한 정치적 생명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퉁구스계어를 사용하는 만주 동부 지방의 여진족의 역사는 거란족의 역사와 많은 점에서 일치점을 보여준다. 산림 의 사냥꾼들인 여진족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제국을 세움으로써 중국 영토의 큰 부 분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여진족의 금조(金朝 1122-1234)는 몽골족의 침입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러나, 거란족과 는 달리 패배 후에 그들의 새로운 제국을 다시 형성시키지 못했다. 여진족의 문화와 그리고 여진족과 거란족 사이에 존재했던 복합적인 관계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두 민 족의 문화에서 사냥은 경제적인 면과 종교 예식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에게 수사슴의 울음 소리를 흉내내는 전문 사냥꾼들과 독수리들을 주었는데, 이 독수리들은 후에 거란족에 의해서 종교적 성격을 띤 야생 거위 사냥에 사용되었다. 수사슴 사냥은 여가를 즐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종교적 행사이기도 했는데, 거란 족들의 종교 의식에 여진족들이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누구나 이러한 일이 선호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여진족들은 거란인들의 손아귀에서 때만되면 반복되는 굴욕적인 취급을 받았던 것 이다. 여진족들의 마지막 봉기는 요나라 법정에서 여진족 부족장 아골타(阿骨打)에게 가해진 치욕적인 행태로 인 해 발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나라를 세운 뒤, 중국인들을 통치하는 어려운 임무에 직면한 여진족은 그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은 그들 고유의 문자를 개발했으며, 그들의 언어가 살아남게 하기 위한 조처들을 취하고 지방의 인구들이 혼합되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이인종(異人種)의 융합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몽골인들이 금조(金朝)를 멸망시켰는데, 이 때에 금조는, 실질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 피한 것이었겠으나, 이미 중국화되어 있었다. 이건 야율아보기와 요나라 중국 요(遼;거란)나라 초대 황제(916∼926). 이름은 억(億), 자는 아보기. 거란 질랄부(迭剌部) 출신. 901년 거란 요련부(遙輦部)의 흔덕근(痕德菫)이 칸[可汗]이 되자 그 밑에서 질랄부 이리근(夷離菫;추장)이 되어 902년 허둥[河 東;지금의 山西省 중남부]·대북지방(代北地方;지금의 山西省 북부)을 침략하여 많은 한인(漢人)을 영토 내로 강제 이주시켜 시라무룬강[西拉木倫江]과 랴오허강[遼河]의 합류점 부근에 용화주(龍化州)를 설치하고 살게 하였다. 거 란족은 8부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8부의 장에서 선출된 사람이 칸이 되었는데, 그는 칸위[汗位;왕위] 교체제를 종 신제로 고치고 여러 부를 통합하여 907년 칸에 즉위하고 중국식으로 황제라 하였다(제 1 차 즉위). 이어 군주권 강 화에 많은 노력을 하였으며, 916년 용화주에서 대성대명천황제(大聖大明天皇帝)에 즉위했다(제 2 차 즉위). 그 해 7월 당항(黨項)·토욕혼(吐谷渾)·사타(沙陀) 등 여러 부를 정복하고 장성(長城)을 넘어 화북(華北)에 침입하여 울 주(蔚州;지금의 河北省 蔚縣)·신주(新州;지금의 河北省 承鹿縣) 등을 공격하고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司)를 규 주(지금의 河北省 懷來縣)에 설치하였다. 921년 대군을 거느리고 단(檀;지금의 河北省 密雲縣)·순(頂;지금의 河北 省 順義縣)·안원군(安遠軍) 등 허베이[河北]에 있는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의 주민들을 거란 각지로 옮 겨 본래 살던 곳과 같은 주현명(州縣名)을 설정하여 살게 하였으며 농경 및 기타 생산에 종사하게 하여 거란의 재 정적 기반을 다졌다. 924년 6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요골(堯骨;뒤의 태종)과 함께 서쪽 여러 부족을 정복하였는데, 아보기는 고회골성을 거쳐 포류해(蒲類海)까지 원정하였고 요골의 군대는 오르도스의 토욕혼부·당항부에 원정하였 다. 925년 12월 발해(渤海) 원정에 나서 926년 1월 발해 부여부(扶餘府;지금의 吉林省 農安縣)와 수도 홀한성(忽汗 城;지금의 黑龍江省 寧安縣)을 함락시켜 발해를 멸망시켰다. 그 뒤 그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옛 수도를 천복 성(天福城)이라 고치고 아들 야율배(耶律倍)를 왕으로 봉하고 귀국하는 도중 부여부에서 죽었다. 묘호(廟號)는 태 조(太祖). 요(遼) 중국의 왕조(916~1125). 정복왕조의 하나이다. 창시자는 동호계(東胡系) 유목민인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 機)이다. 거란족은 4세기 이후 네이멍구자치구[內蒙古自治區] 시라무렌강(江)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6~9세기 경, 수(隋)·당(唐)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발전하였는데, 9세기 말 당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점차 발흥(勃興)하였 다. 질라부(迭刺部)의 실력자 가문에서 태어난 야율아보기는 무공을 세워 기반을 구축하고 이주시킨 한인(韓人)의 협력을 얻어 거란제부(契丹諸部)의 통합에 성공하여, 군장(君長)이 되었다가 916년에 즉위하여 중국식으로 황제라 칭하고 본거지였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遼寧省 巴林左旗)에 도읍을 정하였다. 그가 곧 요의 태조(太祖)이다. 태 조시대에 서쪽으로는 탕구트·위구르 등 제부족을 제압하여, 외몽골에서 동투르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확보하였 고, 동쪽으로는 발해(渤海)를 멸망시켜 만주지역 전역을 장악하였다. 제2대 태종(太宗)은 중국 경략에 힘써, 후당 (後唐)의 장군 석경당(石敬d)을 도와 후진(後晉)을 세우게 하였고, 그 보상으로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16주(燕雲十 六州)를 할양받아 국호를 요라 하였다(946). 태종은 만리장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후진을 멸망시키고, 대량(大梁:河 南省 開封)으로 진출하였으나 한지(漢地) 지배에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제3대 세종(世宗), 제4대 목종(穆宗), 제5 대 경종(景宗) 때에는 제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이 계속되어 남방진출은 어려웠으나, 제6대 성종(聖宗), 제7대 흥 종(興宗), 제8대 도종(道宗)의 3대 약 100년간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성종 때 가장 강성해져서 성종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송(宋)을 공격하여 1004년 유리한 조건으로 송과 화의를 맺었다(淵의 盟約). 이후 요는 송으로부터 획득한 세폐(歲幣)로 재정이 풍요해졌고, 송과의 무역에 의해 경제·문화상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편 동만주 의 여진(女眞), 닝샤[寧夏] 지역의 탕구트(후의 西夏) 등을 복속시켜, 그 세력은 중앙아시아로부터 페르시아 방면 으로까지 미쳤다. 흥종 때에는 송과 서하와의 분쟁을 틈타 조약을 유리하게 개정하는 등 탁월한 솜씨를 보였으나, 성종이 국력 충실을 꾀하여 중국 체제를 많이 받아들인 결과, 국수적인 보수파(保守派)와 혁신파(革新派) 사이에 마찰이 일어나, 흥종·도종 때에는 양파의 파쟁과 종실(宗室) 내부의 세력쟁탈이 결부되어 때때로 반란이 일어났 다. 이 사이에 동부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완옌부[完顔部]가 점차 강대해져, 1115년 그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독립 하여 제위에 올라(太宗)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요의 토벌군은 번번히 패퇴를 거듭하였으므로 요 는 금과의 화친을 고려하여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에 대하여 금은 일찍부터 연운 16주 회복을 꾀한 송의 요청에 따 라 대요협공조약(對遼挾攻條約)을 맺었으므로 요는 갑자기 곤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마지막 황제 천조제(天祚 帝)는 연경(燕京:北京)과 다퉁[大同], 그리고 서쪽의 협산(夾山:內蒙古 自治區)으로 도망가 금군의 추격을 피했으 나, 25년 여도곡(余睹谷:山西省 朔縣下)에서 사로잡혀, 요는 멸망하였다. 이때 제실(帝室)의 일족이었던 야율대석 (耶律大石)은 서쪽으로 망명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서요(西遼)를 건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