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부도지(符都誌)/박금추기원문해설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제1장∼제7장)

유위자 2025. 10. 3. 22:05
부 도 지(符 都 誌)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제1장∼제7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1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2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3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4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5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6장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7장 《징심록(澄心錄)》은 3교(敎) 15지(誌)로 되어 있다. - 상교 : 부도지(符都誌), 음신지(音信誌), 역시지(曆時誌), 천웅지(天雄誌), 성신지(星辰誌) - 중교 : 사해지(四海誌), 계불지(禊祓誌), 물명지(物名誌), 가악지(歌樂誌), 의약지(醫藥誌) - 하교 : 농상지(農桑誌), 도인지(陶人誌), 식화지(食火誌), 궁성지(宮城誌), 의관지(衣冠誌) -《부도지》외에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 등을 복원했다고 하나 일반에 전해지지 않는다. - 금척지 : 박제상의 아들(일설) 백결선생 박문량이 썼다고 하며 박혁거세의 신물 금척에 관한 기록으로 추정, 《징심록(澄心錄)》에 추보(追補) 했다 함. - 징심록추기 : 복원된 《부도지》에는 조선초 대학자 김시습이 영해박씨 집안 박효손으로 부터 전해 받고, 고대어에서 당시의 문장으로 적으면서 내력과 느낀 점을 덧붙였다. 김시습(金時習)은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1435∼1493)으로 말년에 징심록을 보고 느낀바를 징심록 추기로 전한 것인데, 지금으로 부터 불과 520여년 전의 일이다. - 요정징심록연의후기 : 박금씨가 《징심록》을 복원하면서 느낀 점을 기록하였다. - 부도지(符都誌)라는 말은 "하늘의 뜻 (天符)을 받드는 도읍(都)에 관한 기록(誌)"이라는 뜻. □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1장 징심록은 우리 관조(貫祖)이신 영해군 제상공이 양주(양산)주1) 백(伯)으로 있을 때 기록한 것이다. 여러 세대를 걸쳐 복사하여 서로 전하였다. 묶어서 삼신궤의 밑바닥에 감추어 놓고 그 출납을 엄중히 금한 것이 몇 대를 지나온 것이다. 내가 어린 아이일 때 간혹 훔쳐보아, 그 주요한 강령을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뒷 날 동아일보에 재직할 때, 전편을 번역하고 장차 잡지에 게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편집자가 이는 필시 일정의 기휘, 즉 꺼리고 싫어함에 저촉됨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 중지하고, 인하여 옛 광주리 속에 다시 안치했던 것이다. 2차대전을 당한 전후 6년 사이에 이학원을 설립하고 금호2)에 칩거하였는데, 이 때 다시금 이를 뜯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원래의 수리를 고증하는데 바빠서, 깊이 연구하고 상세히 해설하지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오직 한이 많을 뿐이다. 要正 澄心錄演義後記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박금(朴錦) 제1장(第一章) 澄心錄者는 我貫祖寧海君堤上公이 在良州(梁山)伯時紀錄者也라 累世復寫相傳하야 束置於三神匱底而嚴禁出納者니 經幾代也라 余童稚時에 間或偸閱而畧知其要領하고 後日在於東亞日報時에 全篇譯出하야 將欲揭載於雜誌러니 編輯者가 以爲必觸日政之忌諱故로 乃中止而仍置於舊筐中矣라 當二次大戰前後六年之間에 設立理學院而蟄居於錦湖하야 復得披閱之機會라 然이나 自忙於原數理之考證하야 未嘗熟究詳解하니 至今多恨이라 징심록자는 아관조녕해군제상공이 재양주(양산)백시기록자야라 누세복사상전하야 속치어삼신궤저이엄금출납자니 경기대야라 여동치시에 간혹투열이략지기요령하고 후일재어동아일보시에 전편역출하야 장욕게재어잡지러니 편집자가 이위필촉일정지기휘고로 내중지이잉치어구광중의라 당이차대전전후육년지간에 설립이학원이칩거어금호하야 복득피열지기회라 연이나 자망어원수리지고증하야 미상숙구상해하니 지금다한이라 1) 양주 : 지금 경남 양산이라고 하나 박제상 선생 생존 당시 신라의 강역은 양자강 유역일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2) 금호 : 함경도 문천(文川)의 금호종합이학원(錦湖綜合理學院/ 통칭 양산댁)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1장 myh1117 13.11.30 要正 澄心錄演義後記 朴 錦 第一章 澄心錄者 我貫祖寧海君堤上公 在良州(梁山)伯時紀錄者也 累世復寫相傳 束置於三神匱底而嚴禁出納者 經幾代也 余童稚時 間或偸閱而畧知其要領 後日在於東亞日報時 全篇譯出 將欲揭載於雜誌 編輯者以爲必觸日政之忌諱 故乃中止而仍置於舊筐中矣 當二次大戰前後六年之間 設立理學院而蟄居於錦湖 復得披閱之機會 然 自忙於原數理之考證 未嘗熟究詳解 至今多恨 징심록은 우리 관조이신 영해군 제상공이 양주(양산) 백(伯)으로 있을 때 기록한 것이다. 여러 세대를 걸쳐 복사하여 서로 전하였다. 묶어서 삼신궤의 밑바닥에 감추어 놓고 그 출납을 엄중히 금한 것이 몇 대를 지나온 것이다. 내가 어린 아이일 때 간혹 훔쳐보아, 그 주요한 강령을 간략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뒷 날 동아일보에 재직할 때, 전편을 번역하고 장차 잡지에 게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편집자가 이는 필시 일정의 기휘, 즉 꺼리고 싫어함에 저촉됨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 중지하고, 인하여 옛 광주리 속에 다시 안치했던 것이다. 이차대전을 당한 전후 6년 사이에 이학원을 설립하고 금호에 칩거하였는데, 이 때 다시금 이를 뜯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 원래의 수리를 고증하는데 바빠서, 깊이 연구하고 상세히 해설하지 못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면 오직 한이 많을 뿐이다. 드디어 부도지의 마지막 별책이 기록됩니다. myh1117 13.11.30 이제 오늘은 이 부도지의 기록을 전한 박금씨의 마지막 증언이 시작됩니다. 이를 보면서, 부도지의 서지학적 가치나 역사 기록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우선 박금 선생은 이를 <부도지연의>라고 이름 하였습니다. 또 후기를 덧붙여 부도지연의를 쓰고 난 이후의 기록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곧 정사로서의 지志나 서書가 아니라, 삼국지연의와 같이 어느 정도 소설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뜻이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의는 결국 사실을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전하고자 하는 뜻에서 사용하는 문학적 방식이라 하겠지요. 곧 단순히 무미건조한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는 것만이 아니라, 여기에 일정하게 작가의 의도를 담아 어느 정도 각색하였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박금선생께서 스스로 <부도지연의>라고 부른 것이 약간은 의아한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부도지는 그대로 역사서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연의는 이를 부연하여 설명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지금 <부도지연의>라는 말은 박금선생 자신이 이를 부연하여 기록한 것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이렇게 되면 또 학술적으로 많은 논란의 여지를 가지게 됩니다. 더하여 이의 수식에 사용한, <요정>이란 말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르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 되는데, 이제 이런 저런 사정을 고려하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글자 그대로 풀이하고 해석하자면, 이는 지금까지 앞서 기록된 부도지가 글자 그대로의 역사서로 이해되기 보다는 역사에 바탕을 둔 소설적인 부분과 요인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이며, 다시금 이는 좀 더 바르게 정리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리고 말미에 <후기>를 첨가하였으니, 이는 글자 그대로 지금까지의 기록을 남기게 된 연유와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 될 것입니다. 결국 이제 박금선생의 회고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부도지의 의미는 크게 4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첫째는 <부도지>라 명명한 본문 역사기록입니다. 이는 황궁시에서 읍루씨 까지 7천년의 기록으로 마무리 됩니다. 다음은, <소부도지>라 이름한 역사 기록으로, 주로 신라 역대의 일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두 부분은 결국 관설당 박제상 공께서 직접 기록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징심록추기>로, 이는 청한자 김시습선생께서 기록한 것으로 사실상 많은 고증과 박씨 세가와의 관계 등이 김시습 선생을 통해 전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요정 부도지연의후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제 문제는 그 제목의 의미입니다. 결국 박금선생의 의도는 이런 것 같습니다. 곧 첫째, "<부도지>자체는 역사 기록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는 박제상 공께서 작성하신 것이다. 다만 이는 원래 <징심록>이라는 큰 전집의 일부로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그 <징심록>은 김시습선생이 직접 확인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에 선생은 <징심록추기>를 붙여 그 자료의 가치를 알려주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박금선생은 과거의 기억과 수집된 일부의 자료를 토대로 다시금 본 책자를 꾸리고 출판하고자 한다. 그러나 본인 역시 이 역사적 사실의 진위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이에 <요정>을 붙이고, 다시금 <연의>의 두 자를 덧붙여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정리의 의미에서 후기를 첨부하는 것이다. 대략 이런 정도로 정리가 된다고 할까요?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도 방대한 분량의 저술이 과연 기억만으로 가능할까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다시 검토해보고자 합니다. □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2장 이 징심록은 삼교 십오지로 되어 있는데, 곧 상교 오지, 중교 오지, 하교 오지로 이루어져 있다. 금척지는 별도로 기록된 것으로 뒤에 첨부되었는데, 여기에 청한자 김시습 선생의 추기, 즉 추모의 기록이 있다. 상교 오지는 곧, 부도지,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이다. 중교 오지는 곧, 사해지, 계불지, 물명지, 가악지, 의약지이다. 하교 오지는 곧, 농상지, 도인지 등인데, (삼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큰 문종이 4절지에 세필로 써 놓은 것으로 약 삼십 장 정도였다. [윗 원고는 박금 선생 친필본 징심록연의 후기 2장 내용이다. 참으로 숙연한 기분이다. 그분의 뜻을 기려본다] 要正 澄心錄演義後記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박금(朴錦) 2장(二章) 本錄이 爲三敎十五誌하니 卽上敎五誌오 中敎五誌오 下敎五誌오 金尺誌爲別錄而添付於後하고 又有淸寒(金時習)之追記也라 上敎五誌는 卽符都誌, 音信誌, 曆時誌, 天雄誌, 星辰誌也오 中敎五誌는 卽四海誌, 禊祓誌, 物名誌, 歌樂誌, 醫藥誌也오 下敎五誌는 卽農桑誌, 陶人誌等也라 (三誌未詳) 其爲冊則細書而長楮四切約三十張也라 본록이 위삼교십오지하니 즉상교오지오 중교오지오 하교오지오 금척지위별록이첨부어후하고 우유청한(김시습)지추기야라 상교오지는 즉부도지,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진지야오 중교오지는 즉사해지, 계불지, 물명지, 가락지, 의약지야오 하교오지는 즉농상지, 도인지등야라 (삼지미상) 기위책칙세서이장저사절약삼십장야라 * 이 징심록은 삼교 십오지로 되어 있는데, 곧 상교 오지, 중교 오지, 하교 오지로 이루어져 있다. 금척지는 별도로 기록된 것으로 뒤에 첨부되었는데, 여기에 청한자 김시습 선생의 추기, 즉 추모의 기록이 있다. 상교 오지는 곧, 부도지,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이다. 중교 오지는 곧, 사해지, 계불지, 물명지, 가악지, 의약지이다. 하교 오지는 곧, 농상지, 도인지 등인데, (삼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큰 문종이 4절지에 세필로 써 놓은 것으로 약 삼십 장 정도였다. (주) 동아일보 기자를 지내신 박금 선생이 상교 5지 전체를 복원하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는 부도지만 영해박씨 문중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그 친필 원고지 원문을 운영자가 공개한 바 있다. * 친필 원고 보기 바로가기 http://cooreenet.cafe24.com/bbs/board.php?bo_table=operators&wr_id=128#c_469 그리고 제보를 통하여 박금 선생이 기억하지 못한 하교 5지중 나머지 3지 이름을 운영자가 공개한 바 있다. 물론 이 증(징)심록은 저자가 없는 것이라 한다. 진위여부를 떠나 서목이 제보를 통하여 알려진다는 것은 바로 그 징심록 상중하교 15지 38권이 세상에 나올날이 멀지 않았다는 말이다. 위서운운 개소리 해대는 처량한 매식자들의 아가리는 원본이 공개되는날 자연스럽게 봉쇄될 것이다. 다시한번 징심록 구성을 소개해 본다. * 징심록(澄心錄) 구성 ① 상교(上敎) - 부도지(符都誌) : ‘마고 - 궁희 - 황궁 - 유인 - 한인 - 한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천손 역사를 담고 있으며, 징심록 전체의 줄기를 요약해 서술하고 있다. - 음신지(音信誌) : 부도지에 나오는 율려 등에 대한 설명서로 탄생 수리(數理)의 의미를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역시지(曆時誌) : 하늘의 역법에 대해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천웅지(天雄誌) : 하늘 세계의 계보 및 역사를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성신지(星辰誌) : 하늘의 별자리를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② 중교(中敎) - 사해지(四海誌) : 지리에 관하여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계불지(禊祓誌) : 수계제불(修禊除祓) 즉 수련방법에 대해 세부적으로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물명지(物名誌) : 세상만물의 이치를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가악지(歌樂誌) : 하늘의 소리를 이땅에서 표현하는 방법을 세부적으로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의약지(醫藥誌) : 인간의 몸을 하늘에 비추어 원초적 상태로 되돌리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③ 하교(下敎) - 농상지(農桑誌) : 하늘에 천제를 지낼 수 있는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농사짓고 양잠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도인지(陶人誌) : 하늘에 천제를 지낼 수 있는 제기를 제작하는 방법에 대한 세부 방법을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나머지 3誌는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제목일 것 이라는 제보가 있어 올리는 자료이니 단순 참고 바랍니다. - 식화지(食火誌) : 제사음식, 각종 먹거리의 가공 및 조리법, 장과 술등 발효음식 담그는 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보여진다. - 궁성지(宮城誌) : 터 잡는법(풍수), 각종 집 짓는법, 도성 산성 축성법, 현대 토목 및 건축기술을 망라한 책으로 보여진다. - 의관지(衣冠誌) : 각종 복식, 관모, 실뽑는법, 짜는법, 염색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보여진다.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2장 myh1117 13.12.01 第二章 本錄 爲三敎十五誌 卽上敎五誌 中敎五誌 下敎五誌 金尺誌爲別錄而添付於後 又有淸寒(金時習)之追記也 上敎五誌 卽符都誌, 音信誌, 曆時誌, 天雄誌, 星辰誌也 中敎五誌 卽四海誌, 禊祓誌, 物名誌, 歌樂誌, 醫藥誌也 下敎五誌 卽農桑誌, 陶人誌等也 (三誌未詳) 其爲冊則細書而長楮四切約三十張也 이 징심록은 삼교 십오지로 되어 있는데, 곧 상교 오지, 중교 오지, 하교 오지로 이루어져 있다. 금척지는 별도로 기록된 것으로 뒤에 첨부되었는데, 여기에 청한자 김시습 선생의 추기, 즉 추모의 기록이 있다. 상교 오지는 곧, 부도지,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이다. 중교 오지는 곧, 사해지, 계볼지, 물명지, 가악지, 의약지이다. 하교 오지는 곧, 농상지, 도인지 등인데, (삼지는 알지 못하겠다). 그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은 큰 문종이 4절지에 세필로 써 놓은 것으로 약 삼십 장 정도였다. □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3장 본록, 즉 이 징심록은 양산 징심헌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제상공이 일본에서 순절한 이후에 아들이신 백결선생이 증보한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 영해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감으로써 세상에 남게 된 것이다. 이조 세종 때 종가와 차가 두 집이 명을 받들어 서울로 이주하고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단종 선위의 날을 당하여, 온 집안 전체가 금화로 들어갔으니, 이는 곧 차가와 종가 모두가 함께한 것이다. 우리 집안은 차가의 종손에서 나온 차가로, 다시금 이전하여 문천 운림산 중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김시습 공께서 우리 선대에서 맺은 결맹의 교분으로 인하여, 같이 입산하였다. 선생은 이징옥과 이시애로 하여금 복세, 즉 세상을 회복하는 일을 거사하도록 하고, 남북으로 분주히 내왕하였다. 이후 금강산 운와공의 집에서 이 징심록을 휴대하여 와서, 거듭 문천에 이를 두고 가심으로, 이에 우리 집안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3장(三章) 本錄이 成於梁山澄心軒而堤上公殉節於日本之後에 子百結先生이 增補하고 後代携入於寧海而世居러라 李朝世宗時에 宗次二家가 奉命移去於京師라가 當端宗禪位之日하야 擧家入於金化하니 此卽次宗諸家也라 吾家는 卽次宗之次而再轉入於文川雲林山中하니 時에 金時習公이 以吾先世結盟之交로 同伴入山하야 使李澄玉李施愛로 擧復世之事하야 奔走南北之道에 自金剛山雲窩公宅으로 携來此錄하야 仍置於文川而傳於吾家者也라 본록이 성어양산징심헌이제상공순절어일본지후에 자백결선생이 증보하고 후대휴입어녕해이세거러라 이조세종시에 종차이가가 봉명이거어경사라가 당단종선위지일하야 거가입어금화하니 차즉차종제가야라 오가는 즉차종지차이재전입어문천운림산중하니 시에 김시습공이 이오선세결맹지교로 동반입산하야 사이징옥이시애로 거복세지사하야 분주남북지도에 자금강산운와공택으로 휴래차록하야 잉치어문천이전어오가자야라 (주1) 김화(금화) : 강원도 철원소재, 금화에는 구은사가 있다. - 구은사(九隱祠) 소개 :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사곡2리 소재 1445년 세조의 왕위 찬탈시 생육신의 한사람인 김시습외 8현이 김화읍 남면 육단리(매월대)에 초막을 짓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뜻을 이루지 못한 구은사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이다. (2) 문천 : 함경남도에 있다. 문천에는 운림산이 있다. 운림폭포가 유명하다. (운영자 주) 증심록 부도지를 전한 핵심에는 청한자 김시습 선생이 굉장한 역할을 하고있다. 조선조 당대 천재학자, 천제시인, 소설가 그를 기리는 현재 학자들은 도처에 깔려있는데 막상 청한자 김시습 선생이 복원하려 했던 부도지 마고(삼신)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 가지는 이가 없다. 청한자 김시습 선생의 소설이나 시를 이해하려면 부도지에 나오는 우주 평화사상이나 복본사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 그 깊은 뜻을 알 수가 없다. 박제상공 사후 천년뒤에 태어난 김시습 선생이 영해박씨 문중에서 동문수학하면서 징심록 15지를 계승하여 후손들에게 남겼다는 것은 참으로 하늘의 도움이라 할 것이다. 복본을 위해 이시애, 이징옥 장군을 설득 거병까지 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 아닌가? 21세기 이글을 이해하고 이를 계승하려하는 숨은 현자들은 도대체 어디에 숨어있는가? 부산에 계신 민 선생님 외에는 보이질 않으니 이를 어찌 한다는 말인가? 부산 민선생님 찾아가 광안리 동래파전집에서 막걸리 한잔하며 부도복건을 논의해 볼거나? 복본!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3장 myh1117 13.12.01 第三章 本錄 成於梁山澄心軒 而堤上公殉節於日本之後 子百結先生增補 後代携入於寧海而世居 李朝世宗時 宗次二家奉命移去於京師 當端宗禪位之日 擧家入於金化 此卽次宗諸家也 吾家 卽次宗之次而再轉入於文川雲林山中 時 金時習公 以吾先世結盟之交 同伴入山 使李澄玉李施愛 擧復世之事 奔走南北之道 自金剛山 雲窩公宅 携來此錄 仍置於文川 而傳於吾家者也 본록, 즉 이 징심록은 양산 징심헌에서 이루어진 것이나, 제상공이 일본에서 순절한 이후에 아들이신 백결선생이 증보한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 영해로 들어갈 때 가지고 감으로써 세상에 남게 된 것이다. 이조 세종 때 종가와 차가 두 집이 명을 받들어 서울로 이주하고 스승이 되었다. 그러나 단종 선위의 날을 당하여, 온 집안 전체가 금화로 들어갔으니, 이는 곧 차가와 종가 모두가 함께한 것이다. 우리 집안은 차가의 종손에서 나온 차가로, 다시금 이전하여 문천 운림산 중으로 들어갔다. 이때에 김시습 공께서 우리 선대에서 맺은 결맹의 교분으로 인하여, 같이 입산하였다. 선생은 이징옥과 이시애로 하여금 복세, 즉 세상을 회복하는 일을 거사하도록 하고, 남북으로 분주히 내왕하였다. 이후 금강산 운와공의 집에서 이 징심록을 휴대하여 와서, 거듭 문천에 이를 두고 가심으로, 이에 우리 집안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징심록의 체제와 부도지에 대한 박금선생의 회고가 서술되고 myh1117 13.12.01 오늘은 이제 지금까지 보아왔던 <부도지>에 대한 서지학적 설명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징심록] 15지' 가운데 첫 권책이었음을 밝힙니다. 그러니까 결국 징심록은 부도지 말고도 훨씬 더 많은 자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나마 <부도지>마저도 현존하지 않을 뻔한 것을 박금씨가 한국전쟁 중에 근근히 이를 수습하여 남기게 되었던 것이지요. 생각해보면, 참으로 한민족사의 본령과 그 근원의 진실에 대한 다사다난한 역대와 기사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쩌다 한 때의 잘못으로 이렇게 나라와 집안이 한꺼번에 다 망하는 사태를 갖게 되었는지... 새삼 사람으로 살다가 무엇을 하고 가야할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의 기록에서, 이제 또 하나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된 박금선생에게는 어떤 필사본이나 자료들이 어느 정도는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구비전승으로 이루어진, 한국의 전설과 신화들이 그 온전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러다보면 이런 장편의 기록들을 통째로 외워서 옛사람들은 후대로 온전히 전승시켜 오기도 하였습니다. 흥보가나 심청전을 완창하는 우리의 소리꾼들이 보여주는 놀라운 내공이 이를 뚜렷이 증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박금선생이 이를 기억으로 소생시켰다 함을 굳이 문제로 삼아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히려 이를 다 전해보고자, 박금선생께서는 또 얼마나 노력하셨을지 참으로 숙연해 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연유를 들이대어 의심하고자 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너무나 많아 이를 어찌할꼬 하는 걱정이 앞서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욱이 지난 연의를 이해한 대목에서 지적했듯이, 그 본문에서 약간의 첨삭가필이 있었음을 <금당 근서>에서 밝히고 있는 바, 역사의 진실을 위해서는 좀 더 오랜 숙고와 해석이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가운데서도, 저는 조금도 <부도지>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제가 신화를 공부할 때, 그 처음 전제는 결국 산화적 언어와 오늘날의 언어는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이는 빠롤, 랑그의 문제가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곧, 쓰여진 기사의 뜻과 의미 즉 semantics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점은 한단고기와 부도지가 결국 동일한 지점에 서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영광과 찬란했던 고대적 진실 하지만... 그런데 지나간 역사의 한순간 권력과 민중, 그리고 민족사회의 판단에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이 이후 인류는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먹고 사는 것과 생사의 판단 및 결정 등등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곳에 있습니다.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새 날을 향해 나아가면서 더 이상은 틀리지 말자는 것이지요....그러자면..... □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4장 비록, 지금 원문은 내 손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 전 날에 번역한 기억에 의지하여, 그 실마리를 이어서 기록하고 얻어낸 것이 여러 편이 되었다. 고로 이를 이름하여 <징심록연의>라 하고, 원 수리의 연구를 위한 기본으로 제공한다. 다만 원문을 회수하는 동안에는 정요, 즉 교정을 요함이라는 두자를 엄밀히 붙여, 이로써 후일의 정정을 기다리고자 한다. 그러나 기록 중의 중요한 것은 대단히 명료하며 또 대부분 고증을 거친 것이므로, 거의 오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사소한 것들이라도 본 뜻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다만 그 문체와 구절의 순서는 반드시 원문과 부합되지 아니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문의 문체는 금척지를 제외하면 역시 고체가 아니고, 대부분이 근고체로 변해 있었다. 이는 필사로 전하는 시기에, 어렵고 껄끄러운 것들을 반드시 시속에 따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에 틀림없다. 원문은 지금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통칭 양산댁이라 한다)에 있으니, 모르는 어느 곳에 혹시 이와 같은 본이 있지는 않을까 한다. 4장(四章) 今原文이 雖不在手나 幸賴前日飜譯之記憶하야 系綴記得者數篇故로 謂之澄心錄演義하야 供於原數理硏究之基本而原文回收之間은 姑付󰡔正要󰡕二字하야 以俟後日之正訂也라 然이나 錄中重要者는 殆明瞭而又槪濟考證故로 庶幾無誤오 雖些少者라도 注意於本義之不失也라 但其文體與句節之順序는 必多不符於原文하니 此則無可奈何者也오 原文文體가 金尺誌以外는 亦非古體而殆變於近古則此轉寫之時에 難澁者를 必從俗而使易讀也라 原文은 今在於文川錦湖綜合理學院(通稱梁山宅)而未知何處에 或有同本歟아 금원문이 수부재수나 행뢰전일번역지기억하야 계철기득자수편고로 위지징심록연의하야 공어원수리연구지기본이원문회수지간은 고부󰡔정요󰡕이자하야 이사후일지정정야라 연이나 록중중요자는 태명료이우개제고증고로 서기무오오 수사소자라도 주의어본의지부실야라 단기문체여구절지순서는 필다불부어원문하니 차칙무가내하자야오 원문문체가 금척지이외는 역비고체이태변어근고칙차전사지시에 난삽자를 필종속이사역독야라 원문은 금재어문천금호종합이학원(통칭양산택)이미지하처에 혹유동본여아 * ‘징심록’의 이동 1) 박제상 선생이 양산백으로 있을 때 징심헌에서 최초 징심록 기술 : 현재의 경남 양산이 맞을까? 2) 아들 백결선생이 증보하여 영해로 이주할 때 가져감 : 현재의 경북 영덕의 영해가 맞을까? 3) 조선조 세종때 서울로 이동 4) 조선조 세조때 함경도 문천으로 피신(김시습 선생 동행) → 원문은 금강산 운와공집에 있던 것을 김시습 선생이 수습하여 문천으로 가져와 전하게 됨 * 함경남도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 (운림폭포 근처로 추정) 박금선생은 징심록 전체를 보고 복원을 시도한 것이다. 그 경위가 자세히 서술되고 있다. 후일 진본 발견시 보완을 위해 "요증" 두글자를 붙였다. 줄기는 정확하다는 증언과 금척지 이외에는 근고체로 바뀌어 있다고 하였고 다른 본이 존재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금척지는 고체로 되어있다는 의미인데 참으로 원문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박금 선생의 징심록 복원 노력은 참으로 의미있고 눈물겨운 작업 이었습니다.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4장 myh1117 13.12.03 第四章 今原文 雖不在手 幸賴前日飜譯之記憶 系綴記得者數篇故 謂之澄心錄演義 供於原數理硏究之基本而原文回收之間 姑付󰡔正要󰡕二字 以俟後日之正訂也 然 錄中重要者 殆明瞭而又槪濟考證 故庶幾無誤 雖些少者 注意於本義之不失也 但其文體與句節之順序 必多不符於原文 此則無可奈何者也 原文文體金尺誌以外 亦非古體而殆變於近古則此轉寫之時 難澁者 必從俗而使易讀也 原文 今在於文川錦湖綜合理學院(通稱梁山宅)而未知何處或有同本歟 비록, 지금 원문은 내 손에 없다. 하지만 다행히 전 날에 번역한 기억에 의지하여, 그 실마리를 이어서 기록하고 얻어낸 것이 여러 편이 되었다. 고로 이를 이름하여 <징심록연의>라 하고, 원 수리의 연구를 위한 기본으로 제공한다. 다만 원문을 회수하는 동안에는 정요, 즉 교정을 요함이라는 두자를 엄밀히 붙여, 이로써 후일의 정정을 기다리고자 한다. 그러나 기록 중의 중요한 것은 대단히 명료하며 또 대부분 고증을 거친 것이므로, 거의 오류는 없을 것이다. 비록 사소한 것들이라도 본 뜻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다만 그 문체와 구절의 순서는 반드시 원문과 부합되지 아니한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도저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원문의 문체는 금척지를 제외하면 역시 고체가 아니고, 대부분이 근고체로 변해 있었다. 이는 필사로 전하는 시기에, 어렵고 껄끄러운 것들을 반드시 시속에 따라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에 틀림없다. 원문은 지금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통칭 양산댁이라 한다)에 있으니, 모르는 어느 곳에 혹시 이와 같은 본이 있지는 않을까 한다. 지금까지 연재된 부도지 필사의 과정이 설명됩니다 myh1117 13.12.03 오늘은 글자 그대로 박금선생이 이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된 연유와 까닭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곧, 원문 <징심록>은 갖고 있지 않으나, "전 날에 수리를 연구하고 고증하는 기간에, 개인적으로 모아 놓은 자료에 의지한다"고, 분명히 밝힌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몇 가지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선생은 원문이 문천 금호의 종합이학원에 있다고 명기하고 있습니다. 이는 지금 함경남도 문천이란 곳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인데, 문천에는 옥녀봉과 운림폭포, 용담약수 등이 있는 곳으로, 선생이 자주 운림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을 쓰신 것으로 보아, 운림폭포 근처의 지역으로 이해됩니다. 곧 영해 박씨 문중의 세가사와 여기 징심록 제1지 부도지와의 인연이라 할 것인데요. 이는, 처음 관설당 제상공 선생이 양산백으로 있을 때, <징심헌>에서 그 집필이 이루어진 것인데, 이후 아들이신 백결선생이 증보한 것으로 영해로 이주할 때 같이 옮겨 놓은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이로써 영해 박씨가 시작되고, 다시금 역사의 부침을 통하여 문중은 연리의 집안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들어서, 급기야 세종의 배려로 서울로 이사하게 되어 나라의 일을 돌보는 듯 하였으나.... 오히려 세조의 계유 파천을 당하여 마침내 동족처럼 지내던 김시습 선생과 함께 함경도 문천으로 이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문은 원래 금강산 운와공의 집에 있었다 하고, 이를 청한자가 수습 행장하여 문천에 와서 두고간 것이 박금선생의 집안에 남겨지게 된 연유라고 하였습니다. 곧, 이러한 가문의 이합집산에도 불구하고, 이후 영해 박씨 문중은 관조이신 제상공이 남긴 문중의 철학문화사적 기록을, 그 때 마다 잘 수습하여 문천으로까지 이송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사실 백결선생은 금척과 만파식적 같은 전설을 남기면서, 또 수와 음에 관계된 절묘한 신비 내지 수리상수학적 내용의 많은 전설과 일화를 남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방아 찧는 소리를 내어 명절을 지냈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가운데 선생이 증보한 징심록 중 제1지가 부도지란 이름으로, 민족의 고대 역사기록과 함께 부도복본의 이념이 남겨지게 된 것이지요. 이후 영해 박씨문중에서는 이를 극비의 문서로 취급하여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도록 하였다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증언에서는 금척지를 제외한 나머지 기록들은 근고체로 되어 있었다 하니, 위와 같이 극비 문서로 다루는 가운데서도, 때때로 필사를 통하여 그 기록의 훼손에 대비하고 그 기록물을 시대에 맞게 재해석하거나 정리해 왔던 것임을 짐작케 합니다. 이러한 필사의 과정에서 당시에 사용하는 언어글자체로 바꾼 것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1장에서 보듯이 백결선생이 이를 증보하였다면, 당시에는 거의 이두문 곧 향찰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다시금 이것이 한자 한문으로 바뀌는 과정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실로 이 <징심록>이란 자료가 최근세의 병란 속에서라도 멸실되지 않고 <함경도 문천, 양산댁>에 남아 있기만 한다면, 이는 참으로 하늘의 보우하심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입론은 다음 장을 해설하면서 덧붙여 보도록 하겠습니다. □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5장 우리 단씨의 후예가 유사 이래로 가장 처참했던 것은 경인년 12월 대한과 소한의 사이일 것이다. 나는 권속을 이끌고 서울을 떠났는데, 무개차를 타고 보름을 허비하면서 겨우 울산의 피난소에 도착하였다. 식구들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풍운의 고난을 지독하게 맛보고, 말세의 허망함을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자존원리의 실재, 즉 스스로 존재함과 그 참된 이치를 발표하고, 거듭하여 이를 고증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1년하고도 반을 지나는 동안, 삼십여 년의 일을 거의 정리할 수 있었다. 임진년 여름 비로소 깊이 회고하고 기억함에 몰두하여 붓을 들어 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계사년 여름에 이를 마쳤다. 그 일이라고 하는 것이 암기해 둔 것들 가운데서 찾고 구하는 까닭에, 노신초사, 즉 정신은 수고롭고 생각은 애가 타는 가운데, 겨우 단편들을 얻어낸 즉, 이를 근거로 하여 모아서 통하게 하고 이후에 다시 이어 나아갔다. 이와 같이 한 지 일 년 사이 낮으로 밤을 이어 문득 침식을 잊기도 하니, 병이 침입하여 드러눕게 되었다. 그 일의 어려움이야, 이로써 가히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5장(五章) 我檀裔有史以來最慘之庚寅十二月大小寒之間에 余率眷離京하야 乘無蓋車하고 費半月而僅抵蔚山之避難所하니 眷率이 殆至於死境이라 喫極風雲之苦難하고 驗知末世之虛妄하야 乃發表自存原理之實在하고 仍以繼續考證之業이러라 一年有半에 幾整三十餘年之業하고 壬辰夏에 始沈潛回憶而起筆此稿하야 終於癸巳夏라 其爲事也가 覓求於暗記之中故로 勞神焦思하야 纔得斷片則因之以會通傍系而後乃綴이라 如是一年之間에 晝以繼夜하여 頓忘病侵而臥하니 其爲難事를 可以推知也라 아단예유사이래최참지경인십이월대소한지간에 여솔권이경하야 승무개차하고 비반월이근저울산지피난소하니 권솔이 태지어사경이라 끽극풍운지고난하고 험지말세지허망하야 내발표자존원리지실재하고 잉이계속고증지업이러라 일년유반에 기정삼십여년지업하고 임진하에 시침잠회억이기필차고하야 종어계사하라 기위사야가 멱구어암기지중고로 노신초사하야 재득단편칙인지이회통방계이후내철이라 여시일년지간에 주이계야하여 돈망병침이와하니 기위난사를 가이추지야라 * ‘동란을 피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며 울산으로 피난을 와 30여년 연구한 내용을 복원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울산 태화강을 바라보며 부도지 복원 작업을 하였을 박금 선생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태화강 십리대밭의 대나무들아 너희들은 그 맘을 이해 하겠지~ 복본(復本)!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5장 myh1117 13.12.04 第五章 我檀裔有史以來 最慘之庚寅十二月大小寒之間 余率眷離京 乘無蓋車 費半月而僅抵蔚山之避難所 眷率殆至於死境 喫極風雲之苦難 驗知末世之虛妄 乃發表自存原理之實在 仍以繼續考證之業 一年有半 幾整三十餘年之業 壬辰夏 始沈潛回憶而起筆此稿 終於癸巳夏 其爲事也 於暗記之中故 勞神焦思 纔得斷片則因之以會通傍系而後乃綴 如是一年之間 晝以繼夜 頓忘病侵而臥 其爲難事 可以推知也 우리 단씨의 후예가 유사 이래로 가장 처참했던 것은 경인년 12월 대한과 소한의 사이일 것이다. 나는 권속을 이끌고 서울을 떠났는데, 무개차를 타고 보름을 허비하면서 겨우 울산의 피난소에 도착하였다. 식구들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풍운의 고난을 지독하게 맛보고, 말세의 허망함을 경험하고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자존원리의 실재, 즉 스스로 존재함과 그 참된 이치를 발표하고, 거듭하여 이를 고증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1년하고도 반을 지나는 동안, 삼십여 년의 일을 거의 정리할 수 있었다. 임진년 여름 비로소 깊이 회고하고 기억함에 몰두하여 붓을 들어 이 글을 쓰기 시작하여, 계사년 여름에 이를 마쳤다. 그 일이라고 하는 것이 암기해 둔 것들 가운데서 찾고 구하는 까닭에, 노신초사, 즉 정신은 수고롭고 생각은 애가 타는 가운데, 겨우 단편들을 얻어낸 즉, 이를 근거로 하여 모아서 통하게 하고 이후에 다시 이어 나아갔다. 이와 같이 한 지 일 년 사이 낮으로 밤을 이어 문득 침식을 잊기도 하니, 병이 침입하여 드러눕게 되었다. 그 일의 어려움이야, 이로써 가히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부도지를 세상에 전한 박금선생의 개인사가 설명됩니다. myh1117 13.12.04 ㅠㅠ! 하루종일 작업해 놓은 글이 날라가 버렸습니다. 눈물과 한숨이 어쩌나....후! 그래도 다시...엉엉엉 사람으로 살면서 해야할 일을 생각해 봅니다. 박금선생은 이 글을 쓰는 시간대가 경인년 한국전쟁의 나라 최혼란기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 소란한 가운데 자신의 일이 오직 이것임을 또한 말하고 있습니다. 작은 것을 추구하다 보면 큰 것을 놓치게 되고, 큰 것을 추구하다 보면 또 작은 것들을 소홀히 하게 됩니다. 아마 개인으로 태어나 자기자신의 식생보다 더 크고 소중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것이 개인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 동시에 살아가는 까닭에 다시금 해야만 할 일이 따로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하다보면 저것이 문제가 되고, 또 저것을 하다보면 이것이 고장나는....그런 것이 인생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하고, 또 삶은 그렇게 더 어렵기만 하고...이런 가운데 세월은 속절없이 흘러가게 됩니다. 박금선생의 이 연의후기는, 부도지의 전래가 사실상 집안의 족보와 관련된다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뒤섞여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렇게되면 또 민족사의 반대 세력들은 집안을 자랑하기 위한 소설이라고 우기고 면박을 줄 것입니다. 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안 그래도 민족사를 축소하고 제가 한 일들만 자랑하고자 하는 저 소인배들이 또 다시 판치는 것을 두눈을 뻔히 뜬 채, 또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문명이 동방에서 일어나 가을의 숙살을 지나고 흑수북방 감궁에서 쉰 뒤에 다시금 동방으로 돌아가 새로움이 열리는 것임을 저들이 어찌 알까요! 작은 과학과 물질이 뒤를 받치는 이 神을 잃은 세상에서, 하늘의 뜻과 삶의 길을 가르치는 이 위대함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어차피 삶이야! 끝날 것인데, 그 올바름을 어디에서 회복해야 할 지 난감한 것입니다. 선생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국 단씨의 후예, 우리 한민족의 출발과 기원, 그리고 고대적 영화와 부도복본의 뜻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가혹함은 우리 민족을 일제와 한국동란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갔습니다. 바로 이 때에 박씨문중 세가의 비전으로 내려온 연리의 일과, 마고 장남 황궁씨의 후예로서 사해통화의 책임과 운명을 쥔 한민족의 길을 알리게 되는 이것은 실로 하늘의 뜻 천부의 장손으로서의 막중함이 서로 맞물린 것입니다. 선세 조상님들의 집안을 자랑하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민족의 길을 말하고 단씨의 후예들이 지닌 책임의 막중함을 동시에 말하게 되는 것은, 글자 그대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 곧,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이 어찌 절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새삼 생각해 봅니다. 나의 조상을 위하고 내 자신이 스스로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바로 그것이 결국 내 삶의 길이라고 말입니다. □ 요정징심록연의후기(要正澄心錄演義後記)_제6장 슬프다! 나의 고조이신 문홍 공께서 헌종 정미에, 양산을 지키러 나아갔다. 이에 징심헌을 수축하니, 그 기문에 이르기를, “징심록, 한 책은 천고의 은밀한 이치이다. 백세를 지나더라도 그 뿌리를 지켜 전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드물어 한탄함을 이기지 못하겠구나!”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알지 못하는 자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 지키는 자 역시 드물다. 비록 이것이 시대가 그리 시킨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내가 선세의 조상들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힘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로써 그 원의 즉, 본래의 뜻을 천명하는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야 불가불 말을 만들고 덧붙여 후인들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원문을 회수하는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곧 내가 지은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혹 다소는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6장(六章) 噫라 余之高祖文(金弘)公이 憲宗丁未에 出守梁山하야 修築澄心軒하니 其記文에 曰 "澄心一錄千古密理百世之下株守傳受知之者鮮可勝嘆哉"云이라 然이나 今日則不啻知者之爲鮮이오 受守者亦鮮하니 此雖曰時代之使然이나 且余之得罪於先世者也라 故로 克服萬難하고 自勉心得以闡明原義者는 在於今日하야 不可不成言而使後知之오 因此以有原文回收之機則余之獲罪가 庶幾有萬一之贖歟否아 희라 여지고조문(홍)공이 헌종정미에 출수양산하야 수축징심헌하니 기기문에 왈 "징심일록천고밀리백세지하주수전수지지자선가승탄재"운이라 연이나 금일칙부시지자지위선이오 수수자역선하니 차수왈시대지사연이나 차여지득죄어선세자야라 고로 극복만난하고 자면심득이천명원의자는 재어금일하야 불가불성언이사후지지오 인차이유원문회수지기칙여지획죄가 서기유만일지속여부아 * 헌종 정미년은 1874년으로 지금으로 부터 168년 전을 말합니다. 이때도 징심록 정본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부도복건 사해통화 수증자강 불식복본 이 네가지 귀절속에 살아있는 징심록의 위대한 마고 복본사상은 반드시 복원되어야 하며 그리고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계승되어야 합니다. 박금 선생의 그 절규에 가까운 복원 노력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구리넷 운영자가 성심을 다하여 복원중이니 북두칠성에서 평안하소서 또한 도와주소서 복본! * 원문 해설은 부산 계신 민 박사님이 제일입니다. http://cafe.daum.net/myh1117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6장 myh1117 13.12.05 第六章 噫 余之高祖文[金弘]公 憲宗丁未 出守梁山 修築澄心軒 其記文曰 "澄心一錄 千古密理 百世之下 株守傳受 知之者鮮 可勝嘆哉"云 然 今日則不啻知者之爲鮮 受守者亦鮮 此雖曰時代之使然 且余之得罪於先世者也 故 克服萬難自勉心得 以闡明原義者 在於今日 不可不成言而使後知之 因此以有原文回收之機 則余之獲罪 庶幾有萬一之贖歟否 슬프다! 나의 고조이신 문홍(괄호의 글자는 한 글자임)공께서 헌종 정미에, 양산을 지키러 나아갔다. 이에 징심헌을 수축하니, 그 기문에 이르기를, “징심록, 한 책은 천고의 은밀한 이치이다. 백세를 지나더라도 그 뿌리를 지켜 전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아는 자가 드물어 한탄함을 이기지 못하겠구나!”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만 알지 못하는 자가 적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 지키는 자 역시 드물다. 비록 이것이 시대가 그리 시킨 것이라 하더라도, 또한 내가 선세의 조상들에게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만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힘써 마음을 가다듬으며, 이로써 그 원의 즉, 본래의 뜻을 천명하는 것이다. 오늘에 있어서야 불가불 말을 만들고 덧붙여 후인들로 하여금 이를 알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원문을 회수하는 기회를 얻을 수만 있다면, 곧 내가 지은 죄의 만분의 일이라도 혹 다소는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징심록, 천고의 비전! myh1117 13.12.05 지속적으로 징심록을 전하게 되는 과정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헌종 정미라 하면, 지금으로부터 한 170여 년 전으로 기억됩니다. 박금선생의 고조께서 징심헌을 수축하셨다 하고, 징심록을 언급하였으니, 이 때만 하더라도 징심록의 필사본이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자료의 멸실이 곧이어 일어나니, 과연 구한말 나라의 운명 또한 위태롭기만 합니다. 선대의 유업을 잇고, 그 말씀을 지켜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일지 해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오늘 개인주의와 자본주의의 냉정함 속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알아내어 세상을 밝힐 수 있을 지 자못 궁금하고 사실상 두렵기만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다 하여도 나라가 또 강해지고 스스로에 대한 자각의 필요성이 주어지게 된다면, 부도지가 말하는 새로운 문화의 도래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리하자면, 그나마 얼마되지 않는 자료들이라도 열심히 연구하고 그 이치를 깨우쳐 후세에 전할 필요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록 지금은 무시하고 오해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그 비밀을 열어 보일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결국 세상의 일이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고, 부도복본 천부계승의 올바름을 또한 찾는 것은 한민족 곧 우리 배달겨레에게 주어진 영원한 과제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로써 사해통화 세계일가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하늘도 가히 이민족을 용서하실 것이라 또한 생각해 봅니다. 한 때의 잘못으로 과거의 모든 진실을 잃어버린 지금, 더더욱 가열찬 열망과 냉정함으로 역사의 진실 그리고 천고의 은밀한 이치를 찾아갈 수 있는 노력을 계속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나라, 신선불사의 뜻이 새겨진 동국, 바로 우리 대한민국의 내일을 꿈꾸고자 합니다. -----------<<<이하 부산 민박사님 https://cafe.daum.net/myh1117>>>----------- <요정> [징심록연의후기], 제7장 myh1117 13.12.07 第七章 蔚山邑 西望鵄述嶺 東臨栗浦 栗浦者 先世堤上公出發日本時解纜處也 鵄述嶺者 公之夫人金氏與二娘 哭盡而化神母之地也 余來此地 記錄此稿者可謂奇緣 而癸巳夏稿終之日 有一羽靑鳩突現洞中 群兒追捕騷然 鳩去不見 至夕 忽然飛入於余室 坐於余臂 喙余衣裳 連發奇音 諸隣 見而駭然 余甚異之而黙視其狀 終與余同室一月而去 卽八月五日來九月四日去 經一月卽十月三日 又忽然飛來 同視余室 須臾而去 後無消息 陰七月旣望鳩在之日 與諸友 擧堤上公及神母追念式於太和江上 而洗此稿筆 此鳩分明知人之語者 隣人證之 可謂奇鳥也 鳩來之意 雖云來詳 當此千古記事整稿之日 有如是奇異事故 追記以存之 癸巳 仲秋 琴堂 朴 錦 記 (觀雪堂 五十五世孫) 울산읍은 서쪽으로 치술령을 바라보고 동으로는 율포에 닿아 있다. 율포는 선세 제상공께서 일본으로 떠나실 때 닻줄을 푼 곳이다. 치술령은 공의 부인이신 김씨와 두 따님이 통곡하다 죽어 신모로 화하신 땅이다. 내가 이 곳에 와서 이 글을 기록하게 되니, 가히 기이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계사년 여름 이 글을 마무리하는 날, 한 마리 푸른 빛이 도는 비둘기가 돌연 마을 가운데 나타났다. 동네 아이들 여럿이 이를 따라가 붙잡고자 소란스러웠는데, 비둘기는 날아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 되었는데, 홀연 비둘기가 날아와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내 어깨 위에 앉아 옷을 부리로 쪼면서 연신 기이한 소리를 발하였다. 여러 이웃들이 이를 보고 해괴하게 생각하였다. 나도 참으로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가만히 그 상황을 바라보았는데, 종래에는 나와 더불어 같은 방에서 한 달을 같이 지내다가 날아갔다. 즉 8월 5일에 와서 9월 4일에 간 것이다. 다시 한 달이 지나니 곧 10월 3일 이었는데, 또 홀연히 날아왔다. 전처럼 내 방을 같이 바라보다가 잠깐 사이에 날아가서는 이후로는 소식이 없었다. 음력 7월 기망, 즉 16일은 비둘기가 있던 날이다. 여러 벗들과 더불어 제상공과 신모의 추념식을 태화강 위에서 거행하고 다시금 이 글을 쓰던 붓을 씻었던 것이다. 이 비둘기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음이 분명한 것은 이웃사람들이 증명하는 것이니, 가히 기조, 즉 기이한 새라 할 것이다. 비둘기가 날아온 뜻은 비록 상세히 알 수 없다 하겠으나, 이 천고의 기사를 적은 글을 마무리하는 날을 맞아 이와 같은 기이한 일이 있음으로 하여, 추기하여 여기에 남긴다. 계사 중추 금당 박 금 쓰다 (관설당 55세 손) 부도지 번역, 이제 대단원의 막을 내려야 되겠습니다. myh1117 13.12.07 계사년, 오늘은 12월 7일 대설입니다. 박금선생이 작업을 시작하여 마친 것이, 역시 계사년 이었음을 마지막 장을 번역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이군요. 중추 한가위에 마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신조의 등장이 있고, 울산 치술령 태화강에서 붓을 씻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고 하였습니다. 새삼 인연의 깊이와 그 의문을 되새겨 봅니다. 처음 제가 부도지를 접했던 것이 1987년 경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벌써 26년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결혼하고 애들 낳고,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살아 오면서, 어디 대학에 취직이라도 해볼까 하여 여러 논문들과 저술작업을 해 왔습니다만, 사람의 자리라는 것이 결코 뜻대로 되지를 않더군요.. 게다가 철학을 전공했음에도 단군할아버지를 말하고 민간의 무속과 민중신앙 등등에 관심을 기울여 오다보니, 저를 반기는 학계의 따뜻함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운 것이 이것 밖에 없다보니, 다른 직업을 가지지도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군요..... 어쨌든 내 개인의 이야기야, 그리 즐겁지도 반갑지도 못한 이야기인 것이고.... 이제 서서히 인생의 정리를 해가야 할 때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다 우선 부도지부터 번역해서 세상에 알려 두어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이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중간 중간 번역의 문제와 오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따로 주석을 달아서 설명을 보충해야 되는 대목들도 많이 눈에 뜨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없는 한자가 여럿 있어서 이들을 교정해야 되는데, 급한 마음에 이런 것들을 다 정리하지 못하고 싣게 되었습니다. 출력을 해서 손으로 써 놓기는 했으나, 지금 여기 판본에서 틀린 한자가 그대로 실린 부분이 대략 7-8 곳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원래 한자는 충분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제가 참고로 한 책은 <부도지, 1987년, 가나출판사. 김은수 역>본 입니다. 다행히 이 책에 원문이 따로 기록되어 있었던 관계로, 이들을 제가 개인적으로 다시 정리하여 해석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다음 날은 지금까지 <부도지> 번역과 관계하여, 이 자료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오늘밤은 새삼 감개무량함을 홀로 느껴보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