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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42. 조선어학회 1946년 10월 9일, ≪훈민정음≫ 해례본 최초 영인본 발간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1.28
42. 조선어학회 1946년 10월 9일, ≪훈민정음≫ 해례본 최초 영인본 발간
간송 전형필 선생, 광복된 나라에 벅찬 감동을 선물하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11.2
몇 해 전에 경기도 어느 공기관에서 필자에게 ≪훈민정음≫ 해례본 진본 감정 의뢰를 해왔다.
일본에서 구한 것인데 진본이라고 추정된다고 검증 의뢰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담당 공무원은 진본이라 여겨서인지 목소리가 나직하니 떨렸다.
해례본 전공자로서 당연히 떨리기는 마찬가지다.
간송본 원본이 있지만 또 다른 원본이 발견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더욱이 간송본 66쪽 가운데 앞 네 쪽은 1940년 무렵 복원된 것이니
완전한 진본이 발견된다면 세계가 들썩일만한 사건이 될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 진본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었고 의뢰인이 실망하는 탄식은 땅이 꺼지는 듯하였다.
의뢰품은 바로 1946년 10월 9일에 나온 최초 영인본이었다.
이 책이 나온지도 70년이 넘었고 빗물까지 스며들었으니 여지없는 15세기 고서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다.
조선어학회 영인본(1946) 표지(외솔회 소장본)와 첫 쪽(정음1ㄱ).
그동안 10여 차례 진본 감정을 했지만 대부분 1946년 영인본이었다.
이 영인본은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 명칭은 1949년부터)가 몇 권을 찍었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만여 부 찍었다는 증언은 남아 있다.
조선어학회 핵심 인물이자 조선문자급어학사로 유명한 김윤경 선생은
“훈민정음의 장점과 단점. ≪자유문학≫ 1-2. 자유문학자협회. 1955”라는 글에서
“해방 뒤 조선어학회에서 사진판으로 만 부를 찍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저명한 각 도서관에까지 널리 펴게 되었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몇 부를 찍었는지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김윤경은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핵심 인사였기에 믿을만한 증언으로 볼 수 있다.
김주원 교수는“광복 이후 5년간(1945-1950)의 훈민정음 연구. ≪한글≫ 316호. 한글학회. 2017년”라는 글에서
최소 두 번 이상 찍어냈음을 입증했는데, 아마도 김윤경 증언대로 만 부를 찍었다면
여러 차례에 걸쳐 찍은 것을 합한 부수일 것이다.
≪독립신보≫ 1946년 11월 2일 자 보도에 따르면
조선어학회는 한글날에 펴낸‘훈민정음 원본 영인본’을 대량으로 인쇄하여
일반에게까지 보급하기로 했다는 것으로 보아 그런 점을 잘 알 수 있다.
최초 영인본의 가치와 아쉬움
조선어학회 영인본은 최초 영인본으로서의 역사적 가치가 있다.
최초 영인본이라는 것 때문에 간송 전기나 일부 논저에서
전형필이 해례본을 광복 후에 최초로 공개했다고 기술한 것은 잘못이다.
간송은 진본 감정을 위해서 또는 내용 파악을 위해 일부 전문가들에게 내용을 공개했다.
다만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제한 공개를 한 셈이다. 전면 공개는 1946년 조선어학회 영인본이 맞다.
이러한 역사적 가치가 있음에도
헌책방에서 10만 원 정도의 낮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이다.
하나는 조선어학회에서 많은 부수를 발행했으므로 희소 가치가 떨어진다.
둘째는 깨끗하게 다듬어 펴내는 과정에서 4침 제본의 간송본과 달리
위 여백을 키우고 5침 제본으로 한 것은 의미가 있었으나 원본의 판심을 모두 지운 것은 큰 실수였다.
판심은 일종의 책의 호적과 같은 것이기에
비록 깨끗하게 수정해서 내놓는다 하더라도 지워서는 안 되는 성역인데
아쉽게도 모두 지워 책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한글학회는 1997년에 2차 수정 영인본을 펴냈다.
방종현 해제의 특징
최초 영인본은 전문 번역 없이 방종현 별책 해제로만 간행되었다.
아마도 번역본을 붙이지 않은 것은
조선일보 1940년 7월 31일-8월 4일까지 5회에 걸쳐 번역이 공개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방종현 해제는 국한문혼용체로 세로짜기 10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종현은 이 해제에서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펴내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훈민정음이 한 책으로서 세상에 전래하기는 그 수가 지극히 적은 데다가,
더군다나 그 초간본임이 확실하다고 일반이 공인할 만한 그런 책이 나타난 일은 일찍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다 가져야 할 것이니, 가지되 소중히 지니어야 할 것이요,
누구나 다 읽어야 할 것이니, 읽되 정밀히 깨달아야 할 것이어늘, 원체가 희귀함에야 어찌 하리요?
여기서 단 하나뿐인 이 전형필 씨 소장의 진본을 진본 그대로 누구나 가질 수 있게 하고
누구나 읽어 볼 수 있도록 하게 하고자 하여 이 영인본을 내게 됨이니,
특히 이 일이 훈민정음 반포 500주년을 기념하게 됨에 있어서야 더욱 의미 있다고 할 것이다”
방종현 해제 표지와 맨 뒷면(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제공).
곧 방종현은 훈민정음 해례본의 희귀성으로 인해 대중이 실물 접촉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인본을 발간하여 '누구나 가질 수 있고 읽어볼 수 있도록 한 것'을 이 작업의 핵심 목적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문화재의 접근성을 높이고 교육적, 연구적 가치를 확산하려는
조선어학회와 전형필의 노력을 잘 보여주는 표현이다.
다만 누구나 읽게 한다는 취지였는데 번역본을 첨부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었다.
이밖에 방종현 해제에서 훈민정음 창제(1443)와 반포(1446)의 차이를 분명히 밝힌 것은 잘한 것이다.
지금도 창제와 반포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은 터에 최초 해제서의 내용이 의미가 있다.
훈민정음 발달 단계를 4기로 구분했다.
1기는 훈민정음 창제(1443년)부터 연산군 탄압 때까지,
2기는 중종 때 최세진이 언문을 정리한 때부터 고종 때까지,
3기는 갑오경장으로 국문의 지위가 높아진 때,
4기는 일제강점기 때로 훈민정음 연구가 이루어지면서도 일제 탄압을 받아야 하는 시대로 나눴다.
바로 1940년 무렵 해례본이 빛을 보게 된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500년간 묻히었던 훈민정음의 이 원전(原典)도
이 어려운 때에 그 틈을 뚫고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시세(時勢)의 힘은 인력(人力)이 미치지 못할 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세상은 정도(正道)에서 움직이고 학문은 진리에서 탐구될 뿐인가 한다.
우리 문자의 전도(前途)는 오직 이에 양양(洋洋)하고 빛날 것뿐이다.”
이어서 해례본과 이 가운데 세종이 저술한 정음편을 언해한‘언해본’을
방종현은‘주해본’이라 부르면서 해례본이 초판본임을 강조했다.
끝으로“전형필씨가 이 소중한 책을 잘도 보관하여 주심과,
또 이 사진본의 대본(臺本)으로 널리 퍼지게 하여 주신 고마움에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마무리를 했다.
조선어학회 영인본은 1957년 통문관에서 또 다른 영인본(사진본)이 나올 때까지
10여 년간 한글(훈민정음)의 학문적 연구와 대중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례본은 훈민정음 창제 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유일한 문헌이었기에
조선어학회(한글학회)가 한글의 과학성과 우수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한글의 자주성과 민족적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해례본 영인본으로 한글 연구의 바탕을 제공했고,
이후 한글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반 대중과 학계 모두가 훈민정음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