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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40. ≪동국정운≫, 중국 황제 권위에 도전한 책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1.15
40. ≪동국정운≫, 중국 황제 권위에 도전한 책
세종의 명으로, 9명 학자가 훈민정음으로 저술...인류문명사에 경천동지 내용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11.15
1447년 9월, 동아시아 문자사 아니 인류 문명사에
경천동지할 책이 조선에서 세종 임금에 의해 완성되고 1448년에 간행되었다.
그 당시까지의 한자 1만8801자를 발음 특성으로 분류하고
대표 한자의 한자음을 훈민정음으로 표기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이 바로 그 책이다.
간송미술관 소장본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1, 6권으로서 국보 71호,
건국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은 1972년 강릉에서 발견된 6권 6책의 완질로서 국보 142호로 지정됐다.
중국은 온 나라를 통일한 황제들이 표준 운서를 펴낸다.
소리와 문자를 통일해야 황제의 옥음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황제들은 천 년 이상 한자음을 제대로 적으려고 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한다.
≪동국정운≫ 6책 표지 모음. /건국대박물관 제공.
뜻글자인 한자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자 발음을 설명하듯 적는 반절법식 표기로
‘德(덕)’의 발음은‘東(동)’의 첫소리 발음과‘億(억)’의‘ᅟᅥᆨ’발음을 합쳐 놓은 발음이라는 식으로 적어 놓았다.
이렇게 한자 음가를 풀어서 억지로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을
세종, 신숙주 등이 훈민정음으로 발음 그대로 적었을 뿐 아니라
중국어의‘성모(음절의 첫소리)와 운모(음절의 첫소리를 제외한 소리)’를 뛰어넘어
‘초성-중성-종성’음운의 짜임새가 드러나는 한자음을 적은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문자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문자를 탈 것으로 비유하자면 한자는 수레였고 일본 가나 문자식의 음절 문자는 자전거,
로마자와 같은 알파벳은 자동차, 훈민정음은 비행기 같은 문자였다.
이러한 비행기 같은 문자로 동아시아 보편 문자인 한자음을
기존의 그 어떤 문자로도 바르게 적을 수 없었던 것을 온전하게 해결해낸 것이었다.
<동국정운>이라는 책 제목도 아예 조선(동국)이 한자음을 바르게 적었음을 드러냈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한자, 한문으로 중국을 섬겨야 하는 당시로서는 일종의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한자음의 표준은 황제가 정하는 것인데 조선의 임금이 정한 격이니 황제의 권위에 도전한 셈이었다.
≪동국정운≫서문(신숙주)에서. /딴따라붓밴드.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국 황제들뿐 아니라
당시 중국 지식인과 관리들은 이 책의 놀라운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 해도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조선에서 만든 문자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동국정운≫은 명나라 태조가 편찬한 ≪홍무정운≫에 대응하는 운서였는데
≪홍무정운≫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한 셈이었다.
당시 중국의 한자음은 ≪고금운회거요≫에서 36자모, 107운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동국정운≫에서는 우리 한자음을 23자모, 91운모로 규정했다.
글자의 배열을 전통적인 중국의 운서 순서에서 훈민정음의 글자 차례로 바꾸어 완전히 새롭게 했다.
이 책을 완성하기 1년 전인 1446년에 훈민정음이 반포됐고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 등이 이미 세상에 드러났지만,
중국은 조선을 속국이나 오랑캐로 여겨서인지 훈민정음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훈민정음을 반대한 최만리 등 7인 반대 상소의 핵심은
훈민정음으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까 하는 두려움이 훈민정음 반대 첫 번째 근거였는데 실제로는 기우였던 셈이다.
중국에 훈민정음이나 동국정운의 가치를 알아보는
단 한 명의 지식인이나 관리가 있었다면 중국의 역사나 조선의 역사는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국정운≫은 세종의 명으로 펴낸 책으로
해례본의 공저자 8인 가운데 정인지를 제외한‘최항,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이개, 강희안, 이선로’ 등
일곱 명이 참여하고 조변안, 김증 등이 함께 국가 대사업으로 나온 저술이다.
대표 저자는 신숙주였고, 집필한 서문 전문이 세종실록 1447년 9월 29일 자에 실려 있다.
신숙주는 대표 저자답게 이 책의 가치를 정확히 간파했다.
“아아, 소리를 살펴서 음을 알고, 음을 살펴서 음악을 알며, 음악을 살펴서 정치를 알게 되나니,
뒤에 보는 이들이 반드시 얻는 바가 있으리로다.”라고 했고,
≪동국정운≫의 훈민정음 기준 분류와 글꼴 예시.
세종이 친히 지은 훈민정음으로 적은 것의 의미도 부여하여
“우리 성상(세종)께서 성운에 마음을 두시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참작하여 지침을 만들어
억만 대의 모든 후손들의 길을 열어 주신 까닭이다.”라고 했다.
물론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이상적인 표준음이다 보니 현실 한자음과 다른 점이 있고,
현실을 반영하지 않은 한자음은 점차 쓰이지 않게 되어
≪육조법보단경 언해(六祖法寶壇經諺解)≫(1496년)에서는 현실 한자음으로 편찬됐다.
이후 16세기에 이르러서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은 아예 쓰이지 않았다.
이런 맥락 때문에 동국정운을 실패한 책으로
마치 이상한 한자음을 적은 책 정도로 폄하해왔지만, 결코 그렇게 가볍게 볼 책이 아니었다.
국내적으로는 우리말에서 비중이 높은 한자어 발음 표기에 자신감을 보여줘
훈민정음이 한자를 뛰어넘는 문자 기능이 있음을 입증함으로써 훈민정음이 양반 지식인들 사이에서 쓰게 만들었다.
특히 국제적으로는 한자음을 발음답게 적어 지식 문명의 핵심인 문자의 발음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 글꼴을 반듯하게 적용하여 한글 글꼴의 표준을 제시한 것도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