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훈민정음(訓民正音)/훈민정음탐구_김슬옹

36.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후 첫 번째 발자취

유위자 2026. 5. 22. 09:26
.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참고자료14_22 훈민정음 탐구_김슬옹] * 36.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후 첫 번째 발자취 / 김슬옹교수 <충청리뷰> 2024.10.17 36.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후 첫 번째 발자취 창제 반포 못지않게 중요했던 세종의 의지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 원장[김슬옹의 훈민정음 해설] 입력 2024.10.17 세종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 첫 번째 한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다. 창제 연도(1443)와 반포 연도(1446)가 다르다 보니 창제 후 제일 먼저 한 일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 궁금증을 갖는다. 어떤 이들은 창제 후든 반포 후든 한자음 적기를 처음 했으니 세종이 한자음 발음기호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전혀 근거가 없고 황당한 주장을 펼치는 이들도 꽤 있다. 발자취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에 근거한 것이고 당연히 ≪훈민정음≫ 해례본도 주요 근거가 된다. 훈민정음 최초 기록은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처음으로 알린 실록 기록으로 1443년 12월 30일 자에 실려 있다. 임금(세종)이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훈민정음이라 일컫는다는 것과 초성자, 중성자, 종성자 낱자를 결합하여 글자를 만든다는 것과 그런 원리대로 하므로 생성되는 글자가 끝이 없을 정도로 문자 기능이 매우 뛰어나다는 내용을 간략히 기록했다. 언문청 상상도. /이무성 화백 그렇다고 이 날짜에 창제됐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록은 한 달 발자취를 그달 말일에 모아 적는 달별 기사와 해당 발자취를 그 날짜에 기록하는 날별 기사로 나뉘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최초 기록은 달별 기사이므로 정확한 창제 날짜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창제 사실을 신하들에게 처음 알린 것은 1443년 12월이 분명하다. 세종이 창제 사실을 알린 후 최초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역시 실록에 실려 있는 기사로 1443년 2월 20일 자 최만리를 비롯해 신석조, 김문, 정창손, 하위지, 송처검, 조근 등 7인의 언문 반대 상소에 드러나 있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이후 백성들에게 새 문자 한글(언문)을 하루빨리 보급하고 싶어서 하급 관리들 십여 명을 먼저 가르치고, 기능공 수십 명을 모아 급히 판각을 새겼다. 아마도 이런 일을 위해 창제 7년 전 무렵 인쇄소겸 출판사 역할을 했던 주자소를 경복궁 안으로 옮겼을 것이다. 필자가 펴낸 ≪하마터면 한글이 없어질 뻔했어≫(한울림) 그림책(그림 이형진)은 1443년 창제 후 주자소에서의 행적을 상상으로 복원한 것이다. 하급 관리를 중심으로 훈민정음 보급을 서두른 것은 행정 문자로 정착시키려는 의도와 일반 백성에게 빨리 보급하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한 일은 1444년 2월 16일 자에 실려 있는데 그것은 중국의 한자 발음 책인 운서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말 속의 한자어를 훈민정음으로 적으면서도 한자음에 대한 조선 중심의 표준 표기법을 마련하여 양반들로 한글을 적극적으로 쓰게 만들려는 전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1445년 1월 7일에 세종대왕은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 동시통역사 손수산 등을 중국 요동으로 보냈을 것이다. 당시 요동에는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이 귀양 와 있었다. 신숙주 일행은 요동까지 7, 8회나 오가며 황찬에게 정확한 음운을 묻고 자문을 요청했다. 운서 작업을 지시한 후 4일 뒤인 1444년 2월 20일 자에 실려 있는 것이 그 유명한 최만리 등 7인의 반대 상소이다.(본지 연재물 5회 ‘5. 최만리 등 반대 상소의 영향력’참조) 이날 기록에 반대 상소문과 세종과 반대론자들과의 토론, 세종의 처결 내용 등이 상세히 실려 있다. 반대 상소문으로 인해 하마터면 알 수 없었던 역사의 사실과 진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 동기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1445년 4월 5일 자에 권제․정인지․안지 등이 ≪용비어천가≫ 10권을 올리왔다는 기사인데 이 기록 때문에 최초의 한글 기록을 용비어천가로 많이들 생각해 왔다. 그러나 필자가 ≪조선 시대 훈민정음 발달사≫(역락)에서 자세히 밝혔듯이 이때 올린 용비어천가는 한문으로 된 것이다. 1446년 해례본 저술 후에 한문 시를 한글로 번역하여 1447년에 펴낸 것이 용비어천가이다. 드디어 해례본이 완성되었다는 기록으로 역시 달별 기사로 세종 28년 1446년 9월 29자에 실려 있다. ≪훈민정음≫이 이루어져 임금이 직접 취지와 내용을 어제(御製)로 지었다며 훈민정음 해례본에 있는 세종 서문과 정인지 서문을 그대로 실어 놨다. 해례본 초간본이 1940년에 발견되기 전에는 음력 9월 29일을 반포 날짜로 오인하여 이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를 기준으로 한글날을 기념했다. 1940년에 해례본이 발견되어 그 기록에 보니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되어 알린 날짜가 음력 9월 상순이라는 것이 밝혀져 상순의 마지막 날짜인 9월 10일을 그레고리력 양력으로 환산한 날짜가 오늘날 한글날 10월 9일인 것이다. 훈민정음 반포 후 제일 먼저 한 일 반포 후 세종이 가장 처음 한 일은 공문서를 발행한 일이다. 반포 한 달쯤 뒤인 1446년 10월 10일 대간(정창손․조욱․유맹부․강진)의 죄를 언문으로 써서 의금부와 승정원에 보낸 것이다. 창제 반포한 이로써 당연한 행적이었지만 조선왕조가 공문서 한글 사용을 1894년에 와서야 허용하게 되므로 이때의 사건은 반포 못지않은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세종은 최초의 언문 공문서를 근거로 신하들과의 토론을 이어갔다. 10월 10일 그날 이계전 등이 대간 처벌을 거두어 달라고 하자 그들의 죄를 의금부에 유시한 언문서를 보였고, 10월 13일에는 하연 김종서 등이 정창손․조욱․유맹부 등의 용서를 청하자 그들의 죄를 적은 언문서를 수양대군을 통해 가져와 보여주게 했다. 세종은 행정 문서로 직접 새 문자 모범을 보임으로써 한글이 더욱 실용적으로 쓰이길 바랐다. 그 다음 발자취가 반포 두 달쯤 뒤인 1446년 11월 8일에 언문청을 설치했다는 기록이다. 물론 언문청을 이날 설치한 것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이날 기록에 용비어천가를 들이게 하니 춘추관에서 언문청의 경비 허술함을 간했다고 했기 때문이다. 경비 문제가 설치한 날 발생할 수는 없으므로 아마도 이날 이전에 설치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창제 후 반포 전에 설치했다는 주장도 있다.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 최초 발자취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세종이 왜 어떤 목적으로 훈민정음을 만들고 진정한 나라글자로 삼기를 원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새 문자를 공문서에 쓰고 전문 관청을 세웠다는 것은 훈민정음을 한자 못지않은 주류 공식 문자로 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1446년 반포 석 달쯤 뒤인 12월 26일에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과거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되 뜻은 모르더라도 합자 능력만 있으면 뽑게 했다. 그다음 해인 1447년 4월 20에는 함길도 다음 정기 시험에서 훈민정음을 1차 시험으로 하고 각 관아 관리시험에서도 모두 훈민정음을 시험하게 하다. 이후로 용비어천가가 완성 간행되고 한글 불경서 석보상절, 한자음 표기 관련 동국정운이 간행되는 것이다.